8화
그렇다.
내가 굳이 헛소리하고 연기를 하며 루드비히를 자극한 이유는 이 타이밍을 위해서였다.
‘나는 황제가 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와 루드비히의 결혼식은 황제가 직접 중매를 선 것이다.
아들을 믿지 못하는 황제는 조카인 루드비히에게 세력을 만들어 주고자 했고.
그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 나였다.
지금 내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황실의 보물인 이유도 그래서였다.
약혼식 때 황제는 나와 루드비히를 함께 불러 덕담을 하며 이 반지를 예물로 내주었다.
그 때문에 황제는 결혼식 날인 오늘 아침에 깜짝 방문하여 축복해 주려 했다.
‘당연히 나는 그 타이밍을 잘 기억하고 있었지!’
내 계산이 맞다면 황제는 우리의 옥신각신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드비히를 결혼식 전날 어려움에 처한 신부를 내팽개치고 놀아난 난봉꾼으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아니, 오해는 아니다.
사실이니까.
그 와중에 내 비명까지 들렸으니 황제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제는 성큼성큼 다가와 루드비히의 손에서 내 손목을 빼내었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 보더니 혀를 찼다.
“이 멍은 대체 무슨 일이냐?”
‘그거 당신 아들이 한 짓인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그저 말을 흐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소매를 다시 내려 멍을 감추자 황제가 보기엔 이렇게 보일 터다.
‘내가 약혼자의 편을 들어주려는 걸로만 보이겠지.’
과연 황제는 루드비히에게 불처럼 화를 냈다.
“네게 아주 실망했다, 루드비히.”
“아닙니다, 폐하!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황제에게 루드비히의 변명은 형편없이 들린 모양이다.
전혀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황제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조카에게 경고했다.
“오늘의 혼인을 추진한 것이 짐이라는 건 네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 의미 역시.”
“폐, 폐하!”
“한 번만 더 나를 실망시킨다면 나는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루드비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와 달리 황제가 보는 앞에서는 더 날 추궁하거나 비난하지 못했다.
‘소심한 놈.’
루드비히는 불만을 억누르며 조심스레 나에게 면사포를 씌웠다.
그러면서도 치사하게 소리를 아주 작게 낮추어 나를 협박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늘 밤에 두고 보자.”
나는 베일 안에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부케 안쪽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가 또 너랑 단둘이 될 일을 만들면 손에 장을 지진다!’
나와 루드비히의 동상이몽과 함께 네 번째 결혼식 행렬을 시작하게 되었다.
창밖으로 익숙한 황도의 광경과 인파가 스친다.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였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포석을 디디는 소리.
그리고 마차 바퀴가 도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 고동이 점점 더 커졌다.
어느덧, 신부 마차는 황궁 앞을 지나기 시작했다.
바로, 아르파드와 약속한 장소였다.
* * *
물색 모르는 사람들은 오늘의 신부를 향해 환성을 내질렀다.
내겐 이들의 축복이 저주처럼 들렸다.
“와아! 축하드려요!”
“대공비 전하!”
“꼭 어울리는 한 쌍이 되실 거예요!”
“신의 축복이 두 분과 함께하시길!”
듣기 싫었지만 마차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이유는 간단했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어디 있는 거지? 저기 있나? 여기 있나? 거기?’
약속한 장소에, 약속된 시간이 정오다.
하지만 광장 안 곳곳을 둘러봐도, 황태자의 금발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불안감이 치솟았다.
‘설마,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는 분명히 어제 내가 준 아그리피나의 눈물이 본인의 광증에 효과가 없다는 걸 알았을 거다.
당연히 내 말의 신빙성도 더 올랐을 텐데.
자신이 미치지 않고 황제가 될 방법을 안다는 데,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지 않는다면?’
심장이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만일, 그렇다면…….’
실패 가능성은 더 크지만, 따로 생각해 둔 방법을 실행해야…….
그때.
쿵!
예기치 못한 충격의 엄습에 나는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뭐, 뭐지?”
마차가 급정거한 모양이다.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불안감과 기대감에 찬 채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보았다.
눈부신 백마 위에 앉아 오연하게 신부 행렬을 막아선 한 남자를.
‘아르파드!’
정오의 태양빛 바로 받아, 아르파드의 머리카락은 황제의 보관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뭐,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황제의 조카인 루드비히와 델핀 공작가의 유일한 상속자인 힐리아의 결혼식.
이는 황실의 국혼 다음가는 큰 행사였다.
당연히 구경꾼들이 엄청나게 몰려와 있었고, 그들은 모두 눈을 의심할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말았다.
대신전으로 향하는 신부 마차의 행렬을 누군가가 단신으로 막아선 것이다.
당연히 기사들이 호통을 치고 제압해서 쫓아내야 마땅했다.
신부 행렬을 막아선 것이 ‘이 남자’만 아니라면.
“황태자 전하!”
신부를 호위하는 기사의 수장이 경악하여 그를 불렀다.
“전하. 무슨 일로 이리 행차를 하신 것이온지…….”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종자에게 눈짓했다.
‘어서 가서 대공께 알려라!’
그는 루드비히의 기사였다. 이 사태를 루드비히에게 알리기 위해서 움직이는 건 당연했다.
발 빠른 종자가 앞서 대신전으로 향하려는 찰나였다.
퍽!
황태자가 번개처럼 석궁을 들어 올려 종자의 다리를 쏘아 버렸다.
“아악!”
종자는 다리를 붙잡고 바닥을 나뒹굴었고.
기사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아르파드는 붉은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살기가 넘쳐흐르는 눈빛이 보는 이를 오싹하게 했다.
“무슨 짓이긴. 감히 내 앞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달려들려던 생쥐를 잡은 것뿐이다만?”
“말씀이 심하십니다!”
모욕을 참기가 힘든지 루드비히의 기사는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간 상태였다.
하지만 차마 뽑지는 못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루드비히의 기사인 자신이 황태자의 앞에서 칼을 뽑는 것은 곧 반역이었다.
기사만이 아니라 루드비히까지 연좌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이를 용납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기사가 망설이는 사이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놀랍게도 황태자가 아닌 다른 이였다. 여기서 누구도 나서리라 예상 못 한 이.
사락, 흰 베일이 정오의 햇살 아래 드리워졌다.
“공녀님!”
“대공비 전하!”
경악하는 이들의 사이에서 홀로 침착하게, 오늘의 신부 힐리아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델핀의 딸이 전하를 뵙습니다. 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신지요.”
신부가 나선 것을 보고, 기사는 차라리 안도했다.
‘설마 미친 황태자라도 사촌의 신부 앞에서 더 행패를 부리진 못하겠지.’
기사는 자신이 연약한 귀족 영애를 앞에 세우고 뒤에 숨은 꼴이라는 걸 애써 외면했다.
그때, 일견 화기애애해서 이상한 인사말이 오고 가고 있었다.
“그대가 델핀 공녀로군. 처음 보게 되는군. 반가워.”
“제가 사교계 생활을 거의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나선 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신부 행렬을 막아서고, 석궁까지 쏴 대는 미친 짓을 벌인 황태자가 훌쩍 말에서 내렸던 것이다.
흰 망토가 우아하게 흩날렸다. 그제야 기사는 깨달았다.
지금 황태자는 신년제나 대연회 때나 입을 법한 완벽한 성장 차림새였다.
그리고 그가 거기까지 생각지 못한 건 당연하지만, 황태자 본인의 결혼식에도 비슷한 옷을 입는 게 관례였다.
델핀 공녀, 즉 오늘의 신부 힐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이대로라면 결혼식에 늦어질 것 같습니다. 부디 비켜 주세요.”
호위 기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고귀하고 가련한 레이디가 직접 요청한 것이다. 명예를 아는 이라면 이걸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모든 이가 잠시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미친 황태자와 명예만큼 안 어울리는 말도 없다는 걸.
황태자가 성큼성큼 신부의 앞으로 다가와 어떤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그들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휙, 황태자가 손을 뻗어 신부의 베일을 벗겼다.
신랑이 아닌 남자가 신부의 베일을 벗기는 것은 지독한 치욕이다.
결투 신청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무도한 짓.
“저, 전하!”
“안 됩니다!”
“이 무슨……!”
비명이 울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당황스러움보다도 신부의 미모에 놀라 시선을 빼앗겼다.
드리웠던 흰 베일이 걷혀 공녀의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이 만인의 앞에 드러났다.
탐스러운 분홍빛 구름 같은 머리카락은 다이아몬드와 은으로 만든 월계수로 장식되어 있었고.
분홍빛으로 상기된 뺨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보랏빛 커다란 눈동자를 담은 눈꺼풀이 깜빡거릴 때마다 푸른색에서 붉은색 사이의 온갖 오묘한 빛깔이 반짝였다.
‘요, 요정 같아…….’
석궁을 맞은 종자조차 잠시 통증마저 잊고 멍하니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