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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7화 (7/210)

7화

그날 새벽.

아르파드는 황태자 궁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환에 번을 서고 있던 황태자 궁의 궁인들은 기겁했다.

“저, 전하!”

“어찌 벌써……!”

“왜? 미쳐 날뛰며 너희를 찢어 죽이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나?”

“전하!!”

궁인들은 황공해하면서도 그의 말에 반론하지 않았다.

실제로 다들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의 광증이 언제 도질지.

그의 등 뒤에는 선명한 붉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선황후가 광증으로 죽은 날에 떠 있던 것과 같은 진홍월.

아르파드는 제 눈빛을 닮은 달을 지긋지긋해하며 노려보았다.

‘내가 진홍월 뜨는 날에는 광증을 억누르기 위해 카타콤에서 밤을 지샌다는 걸 아는 자는 거의 없는데…….’

하지만 그 여자는 알고 찾아왔다.

용병왕 아르파드를 찾아올 때 내밀어야 하는 망자를 위한 은화까지 가지고서.

그것만이 아니긴 했다. 그는 손안에서 굴러다니는 진주의 감촉을 느꼈다.

‘그 여자는 용병왕에 대한 정보도, 황태자에 대한 정보도 함께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들.

그 하나하나가 아르파드 외에 아는 자가 거의 없는 수준의 것들이다.

‘황궁은 물론이고 용병 길드 전체에, 아니 대륙 전체에 간자를 깔아 놔도 알아내는 게 불가능한 정보들이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아르파드는 두려움에 가득 찬 궁인들을 전부 물린 뒤.

조금 전 그 수수께끼의 여자가 준 ‘선금’을 확인했다.

엄지손톱보다 커다란 귀한 진주가 신비한 빛을 내뿜었다.

‘이건 진짜가 맞아. 물론 아까 그 여자가 신물의 신성력을 끌어 쓰는 것도 확인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이마에 진주를 가져다 댔다.

신물의 신성력이 아르파드의 핏속에 흐르는 드래곤의 혈통에 반응하여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용없어요.”

그 말대로였다.

신물에 남은 축복은 아르파드의 혈통을 타고 흐르는 이 광증을 중화시키거나 없애 주지 못했다.

결국 그 여자의 말이 옳았다.

신물에 기대 보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얄팍한 희망 중 하나였다.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님에도 정말로 효과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무력감이 몰려왔다.

아르파드는 바닥에 진주를 내던졌다.

그리고 떠올렸다.

‘그 여자, 대체 뭐지?’

겨우 몇 시간 전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온 여자.

‘그 여자는 어떻게 이게 실패하리라는 걸 알았던 거지?’

가늘고 보슬보슬해 보이는 분홍색 고수머리가 눈에 띄는 여자였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는 마치 제비꽃 사탕 같았고, 매끄러운 흰 피부에는 벚꽃을 닮은 옅은 분홍빛이 돌았다.

그야말로 혀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한 외모를 가진 주제에…….

“이 진주도, 그 어떤 축복받은 보석이나 신물이라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아주 냉정한 말이었지.’

게다가 당돌하고 위협적인 협박까지 더해서.

확실한 건 하나였다.

‘정체가 뭐든, 그 여자는 너무 위험해.’

적어도 루드비히 곁에 얌전히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정체불명의 능력을 루드비히를 위해 쓴다면?

‘당장에 황태자가 바뀌겠지.’

그렇게 본다면 결국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는 셈이었다.

‘그 의뢰를 빙자한 협박, 처음부터 내가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리고 그 여자는 그걸 확신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기이할 정도로 두려움 없이 직시하던 제비꽃 색 눈동자가 구미를 당겼다.

그건 침착한 광기가 깃든 눈이었다.

그 눈을 다시 한번 본다면 결심이 좀 더 확실해질지도 모르겠다.

아르파드는 막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노려보며 사납게 웃었다.

본인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이는 먹잇감을 이미 점찍은 굶주린 맹수와 닮아 있었다.

결국 뜬눈으로 아침 해를 맞이한 그는 시종장에게 시켜 자신의 흰색 예복을 가져오게 했다.

* * *

내가 첫 회귀 이후 아주 싫어하게 된 속담이 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였다.

매번 다음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때마다 저 속담은 늘 가차 없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 날은 또 오고 말았다.

‘내 네 번째 결혼식 날 아침.’

처음을 빼고는 설렘이나 기쁨 따윈 조금도 없었다.

물론 결혼식 날 자체를 이렇게 얌전히 내 방에서 맞은 것 자체가 몇 번 안 된다.

첫 회귀 직후에는 신전으로 도망쳐서 수녀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바로 직전 회귀 때는…….

‘벨테인 경과 함께 도망쳐서 가장 처참하게 실패했으니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힐리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드비히…….”

그의 이름을 담는 내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물론 이 인간 얼굴을 보니까 감상에 젖었다거나 미련 따위가 남아서 이런 건 아니었다.

으득.

‘새삼 죽X을 날리고 싶다!’

부케를 든 손가락 끝이 넘쳐흐르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어제 조금 후회했던 것이 있었다.

‘회귀가 이제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빙의자를 신경 쓰느라 너무 정신없이 움직였어.’

게다가 아르파드에게 너무 집중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식 당일이 되어 얼굴을 보자 살의와 억울함이 치밀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최소한 세 번 회귀 중에 한 번 정도는 저 남자 얼굴에 X빵을 날려 줄걸!’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안 된다. 아직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자 루드비히 놈이 떠드는 X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내가 어제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웨딩드레스에다 면사포를 새로 마련해 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거의 윽박지르듯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하, 하지만 루드비히. 드레스를 망친 건 내가 아니에요. 침입자가…….”

“그래도 네가 문을 제대로 잠갔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 아냐!”

저 비슷한 논리로 말한 게 어제 한 명 있었지.

“아무리 새언니가 경솔하게 문을 잠그지 않았다가 벌어진 일이라지만…….”

저놈은 결국 어제 에반젤린과 싸우다가 비슷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그 논리를 똑같이 가져온 걸 보면.

그리고 어쩌면 둘은 똑같이 내 탓을 하는 것으로 극적인 화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생에 내가 그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서 잘 안다.

“그래. 에바.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당연히 네 것이어야 할 자리를 빼앗아 간 힐리아가 문제지.”

“아냐. 진심을 숨기고 있어야 하는 당신이 제일 힘들 텐데.”

새삼 혈압이 마구마구 치솟았다.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은 참아야 하느니라, 힐리아 델핀!’

시계가 너무나도 느리게 가는 것 같다.

하지만 도저히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는 걸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도리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정도 말 좀 했다고 울다니.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대공비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겠어?”

그의 개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너 때문에 드레스가 망가진 것에 상심해도 그렇지. 목까지 그 꼴로 만들어 놓다니. 정신을 대체 어디 두고 있는 거야?”

어젯밤 아르파드의 칼날에 베이고 목 졸린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내 상처는 안 좋은 선택을 하려다 실패한 걸로 오해하기 딱 좋았다.

이걸 초커와 레이스 장식으로 가리느라 아침에 또 한 번 난리가 벌어졌었다.

오늘 아침, 내 꼴을 본 애니가 통곡하고 벨테인 경이 얼마나 걱정했는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가장 걱정하고 슬퍼해야 할 내 약혼자는 그걸 빌미로 날 몰아붙이기에 바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실망했어. 힐리아. 당신과의 결혼을 재고해 보고 싶을 정도로.”

나는 루드비히의 방식을 잘 알았다.

그는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과하며 빌기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면 그는 관대하게 내 실수를 용서해 준 자비로운 남편이 되는 것이다.

‘내가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줄 알아?’

나는 섬세하게 계산하며 시간을 끌었다.

입 안을 다 깨물며 억지 눈물을 짜낸 다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호소했다.

“사실, 사실 루드비히… 새벽에 또 침입자가 있었어요. 어떡하죠?”

“…뭐?”

루드비히의 당황한 대꾸가 더 길어지기 전에 끝까지 쭉 늘어놓았다.

“자다가 이상한 느낌이 와서 깼는데, 누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제 그 일 이후로 경비를 더 단단히 했어! 그런데 침입자가 있었다고?! 당신이 악몽이라도 꾼 거겠지!”

“그럼 이 상처는요?”

“악몽을 꾸다가 자해한 거겠지, 멍청하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펑펑 울었다.

“내가 스스로 이런 상처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외부의 침입자가 한 짓이 아니라면, 내부인의 짓이겠죠!”

“……!”

루드비히는 이번 내 발언에 대해서는 반론을 하지 못했다.

내가 거의 울다가 쓰러질 지경이 되었는데도 루드비히는 날 부축하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 있을 뿐.

나는 어제 불씨를 뿌린 그의 의심에 부채질을 시작했다.

“역시 누군가, 우리 결혼을 방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루드비히! 어떡하면 좋아요?”

루드비히는 초조해 보였다.

“말도 안 돼.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조금 전 기세 좋게 나를 몰아붙일 때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없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대꾸했다.

“당신을 남몰래 사모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생각보다 가까이에.”

“…뭐?”

루드비히가 눈에 띄게 놀라는 게 보였다.

나는 그를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날 죽여서라도 우리 결혼을 방해하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 억측이야.”

“아니라면 대체 누가 왜 드레스를 망치고 신부인 나를 죽이려 했겠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새벽에 침입자가 있었을 때 왜 사람을 부르지 않았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루드비히와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쳤다.

루드비히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불렀어요.”

“뭐?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여자처럼 흐느끼며 말했다.

“수도 없이 당신을 불렀어요!”

“뭐?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당연히 이건 헛소리 맞다.

어제 새벽에 아르파드와 만난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당연히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가 있나?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루드비히 앞에서는 너무나도 쉬웠다.

내가 듣기에도 눈물이 날 정도로 처연하고 불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졸린 채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와 주지 않았죠.”

“아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는 미치고 환장하다 못해 화가 난 듯했다.

나는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혹시 다른 여자와 있느라 내 비명을 듣지 못한 건가요?”

“힐리아!!!”

조금 전까지와 달리 이 말에 그는 지레 찔린 듯 기겁했다.

‘실제로 여자가 있긴 하니, 그럴 만도 하지.’

그는 지금 내 헛소리를 결혼식 직전의 히스테리 정도로 치부했다.

그리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만 울고 어서 일어나지 못해, 힐리아?!”

루드비히는 내 손목을 잡아 거칠게 당겼다.

“악!”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어제 아르파드가 거칠게 잡아 멍이 생긴 곳이다.

내 비명은 생각보다 크고 날카롭게 공기를 할퀴었다.

루드비히는 당황했다.

“뭐, 뭐야?”

그때.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분노한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대체 지금 무슨 짓이냐, 루드비히?”

내 손목을 잡은 그대로 루드비히는 경악해서 뒤돌았다.

그곳에는 금빛 화려한 성장을 걸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이제 백발이 희끗희끗 자라난 백금발은 어제 내가 본 누구와 꽤 닮아 있었다.

꽤 많이 기른 수염으로도 왼쪽 뺨부터 턱까지 이어진 흉터를 다 가려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커다란 흉터라도 남자의 위엄과 고귀함을 조금도 해치지 못했다.

그가 누구인지, 나와 루드비히는 잘 알았다.

“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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