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동시에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그의 반응을 살폈다.
내 피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하지만 아르파드는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몸을 내던진 것에 놀랄 뿐이었다.
흘린 피 자체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행이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거구나.’
아르파드가 진짜 광증에 휩싸이기 전이라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이런 관찰의 이유나 결론을 알 리 없는 황태자는 그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델핀 공작가에 정신병이 유전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저희 가문은 보잘것없는 인간의 혈통이라 그럴 일이 없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한 셈이었다.
‘우리 집은 너희 집안처럼 용의 혈통을 못 이겨서 미쳐 버리는 유전병은 없단다.’
황태자의 뺨을 정면에서 날린 격이다.
‘뭐, 어쩔 거야. 자기는 나한테 칼부터 들이밀었으면서.’
게다가 아르파드는 이미 행동으로 증명했다.
‘정말 날 죽이려고 칼을 들이민 게 아니야.’
그러면 내가 칼날에 뛰어들어 죽든 말든 그냥 놔뒀을 거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막았다.
적어도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기는 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내 제안이 조금은 혹했다는 소리기도 하겠지.’
아르파드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놀랍게도 인간 같지 않은 미남은 얼굴 근육을 막 써도 조각 같았다.
세상 살기 참 편하겠어.
아, 아닌가. 세 번이나 미쳐서 죽었으니.
“그래. 자신만만하고 용감한 공녀님. 어떻게 이 미치광이 황태자가 안 미치게 할 수 있단 소리지?”
자기가 미치광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의외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나?
“황가에 내려오는 광증은 누구도 치료하지 못해. 그 방법을 말한다면 살려 주지.”
“맨입으로요?”
황태자의 말문이 막혔다.
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지금 그 방법을 다 알려드리면 저 죽이실 거잖아요?”
“…….”
야, 왜 부정 안 하는데?
진짜 죽일 생각이었냐?
소름이 쭉 돋았지만, 최대한 아닌 척했다.
아르파드는 좀 더 노골적인 협박을 입에 담았다.
그 자체가 좀 몰렸다는 증거였다.
“…이대로 너를 납치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두고 고문하다 보면 입을 열겠지.”
“아, 델핀 공작가에서 황궁으로 가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고 막아 버린 뒤예요?”
자신이 할 말을 내가 대신하자, 아르파드의 잘생긴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이 정도 반응도 예상 못 할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전하의 비밀을 알릴 루트는 하나가 아니에요. 그중에는 황후 폐하의 친정에 보내질 것들도 있답니다.”
계모인 황후는 황태자의 가장 큰 정적이다.
당연히 황후에게 용병왕에 대한 정보가 넘어가는 건 황태자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르파드의 잘생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피부에 닿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예술적인 미남과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설레는 게 당연하겠지만…….
‘설레긴 개뿔. 언제 목 날아갈지 몰라서 심장이 두근거리긴 하네.’
한참을 뜸 들이며 나를 뜯어보다가 결국 항복하듯 아르파드가 내놓은 말은 이것이었다.
“이상한 여자군.”
“저는 그냥 평범한 여잔데요.”
“평범한 여자가 내 비밀 신분을 알고, 황제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진 않지.”
“…….”
“그리고 불길한 진홍월이 뜬 밤에 혼자 지하 묘지로 숨어들어 오지도 않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진홍월이 불길하다고 불리는 데엔 역대 용혈을 이은 황족들이 이 시기에 미쳐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 알았다고만 해 두죠.”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거군.”
나는 해죽 웃었다. 초반부터 어떻게 밑천을 다 내주겠는가.
사실 아르파드도 그걸 기대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네 협박대로 따랐다가 속았다면 위험이 너무 커.”
하긴 안 그래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취급받으면서 위태로운 처지인데.
멀쩡한 사촌 동생의 신부를 약탈했다고 하면 다들 이렇게 생각할 테니까.
‘황태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럼, 지금이 그 타이밍인 모양이다.
‘채찍만 휘둘렀으니 제대로 된 당근 하나는 줘야지.’
그래야 내 말의 신빙성을 올릴 수 있을 거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저를 잠깐만 놔주시면 의뢰에 대한 선불 하나 먼저 드릴게요.”
“뭐?”
“도망치게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의 팔에 단단히 잡힌 내 오른손 끝을 까딱거렸다.
“손 한쪽만 움직일 수 있게 해 달라는 거죠.”
“…….”
그는 정말로 의심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나를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목을 꽉 잡아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하던 손이 거두어진다.
나는 품속에서 작은 벨벳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아르파드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드리는 선불금이에요. 원래 용병은 선금 없이는 움직이지 않잖아요?”
아르파드는 여전히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주머니를 찢었다.
그러자, 반짝거리는 것이 툭 떨어졌다.
역시 무인이라 반사 신경이 좋은 건지 그는 보석을 공중에서 잡아챘다.
흰 손가락 사이에서 빛나는 은색 사슬의 가운데에 매달린 커다란 푸른색 진주.
그것을 보고 아르파드의 붉은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 보석의 이름을 말했다.
“아그리피나의 눈물. 전하께서 찾으시는 다섯 개의 축복받은 보석 중 하나예요. 이 정도면 충분한 선금이 되지 않을까요?”
아그리피나는 바다의 여신 이름이다. 즉, 저 진주에 붙은 별명은 여신의 눈물.
신의 축복이 내려졌다 알려진 유명한 보석 중 하나.
‘그리고 내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외가의 가보 중 하나지.’
그리고 어차피 루드비히와 결혼하게 되면, 에반젤린에게 빼앗기게 될 무수한 귀중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의 황태자 전하 겸 용병왕께선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삐뚜름하게 웃더니 되물었다.
“물론 귀한 보석이긴 하지만, 황태자인 내가 이 정도 보석에 눈이 멀어 움직일 거라 생각하나?”
본인이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던 주제에 아닌 척하는 연기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걸 지적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저는 전하께서 이것을 비롯한 5대 축복받은 보석 모두를 찾고 계신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방금 그중 하나를 손에 쥐여드렸죠.”
다시 잘생긴 눈썹이 튕겨 오른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만했다.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아는 거지? 내 옆에 간자를 붙였나? 하지만 황제조차 모르는 일을…….’
나는 거기에 결정타를 먹였다.
“제가 말하는 선금은 단순히 진주만이 아니에요. 한 가지 정보가 더해진 거죠.”
아르파드의 눈빛에 어린 경계심과 호기심이 극에 달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칼로 자르듯 선언했다.
“소용없어요.”
“뭐?”
“이 진주도, 그 어떤 축복받은 보석이나 신물이라 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
“이런 걸로는 전하의 광증을 약화하거나 없애 드릴 수 없다는 정보, 이것까지가 제 선불이에요.”
나는 가혹한 사실을 들이밀면서 웃었다.
그 순간, 남자의 표정이 가면처럼 굳었다.
그리고.
“컥!”
챙강!
내 목덜미에 들이댔던 아르파드의 칼날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소리를 조금 늦게 들었다.
그보다 먼저 아르파드의 손이 내 목을 졸랐기 때문이다.
아까 뒷덜미를 들어 올린 것과는 전혀 달랐다.
진심으로 살의를 담아 내 숨통을 쥐고 있었다.
그는 피 묻은 늑대 같은 미소를 입가에 새겼다.
“나를 화나게 하는 말이 선불이라니, 대범하군.”
“큭!”
“그러면 대체 잔금은 어떻게 치를지 궁금하군.”
“말씀, 드렸잖아요? 전하를 미치지, 큭! 손에 힘 좀 빼요! 말도… 못 하겠네!”
그러자 놀랍게도 목을 틀어쥔 손에서 힘이 약간 덜해졌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콜록콜록! 하아, 전하가 미치지 않고 황제가 되게 해 드리겠다고요.”
“그 방법을 제대로 설명해. 허황된 소리만으로 나에게 정치적으로 자살에 가까운 짓을 시킬 참이라면.”
안 그래도 광증을 의심받는 황태자가 사촌의 신부를 약탈혼하면 다들 그가 진짜 미쳤다 여길 거다.
그걸 정치적 자살이라 할 거면 못 할 것도 없긴 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전부 다 털어놓을 순 없었다.
‘세 번 회귀해서 다 안다는 소리를 어떻게 해? 그러면 목 조르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댕강일 거야.’
나는 황태자 앞의 공녀가 아니라, 용병 앞에 선 의뢰인으로 돌아갔다.
“그건 당신이 의뢰를 받아 준 뒤에 알게 될 거예요. 용병왕, 제랄드.”
“…대가를 치르라는 건가?”
“그래요. 나는 이미 선금을 줬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할 일은 의뢰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선택하는 거죠.”
“…안 받으면 내 정체를 알리겠다고 협박해 놓고?”
“아.”
이건 올바른 지적이긴 했다.
나는 발랄하게 윙크하며 대꾸했다.
“그것까지 전부 포함해서 의뢰 조건이에요.”
아르파드는 급격하게 피곤해 보이는 표정을 했다.
어쩐지 나에게 오래 괴롭힘당한 것 같은 표정이라 이상했다.
‘난 하나도 안 괴롭혔는걸! 지금 목도 졸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내일 그대를 약탈혼하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 그건가?”
“네.”
“미치겠군.”
아르파드는 마른세수를 했다.
누가 보면 목 졸린 내가 아니라, 조르고 있는 그가 궁지에 몰린 꼴로 보일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약탈혼, 그것도 황실 직계가 직접 행하는 약탈혼이 아니면 내 결혼은 못 막는걸!’
나는 그 사실을 이미 세 번의 회귀를 통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흔들리는 아르파드에게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 넣었다.
“저는 아르파드 전하가 미치지 않게 해 드릴 수 있어요. 이건 맹세코 사실이에요.”
“맹세? 무엇에 대한 맹세?”
아르파드는 맹세니 신뢰니 하는 것을 비웃으며 물었다.
그러니 남들이 말하는 맹세나 약속 따위로는 절대 납득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었다. 조금 전 내가 선금으로 준 신물에 손가락을 댄 채.
신성언(神聖言)을 읊조렸다.
이에 반응해 신물의 신성력이 반짝거리며 새어 나왔다.
아르파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
이건 세 번의 회귀 중 수도사로 잠시 살았던 때에 익힌 초보적인 재주였다.
-여신의 축복에 기대어 하찮은 종이 청하나니. 이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소서.
신성언이 끝나자, 아그리피나의 눈물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내 손목에 팔찌 형태로 맺혔다가 사라졌다.
나는 아직 신성력의 잔재가 남은 손목을 아르파드에게 들이밀고 말했다.
“내가 거짓을 말했다면 손목이 날아갈 거예요. 나는 당신의 광증을 잠재워 줄 수 있어요.”
“…….”
잠시 시간이 흘렀지만, 내 손목은 무사했다.
“신성언을 통한 진실의 판별에 자기 손목을 거는 여자는 처음 보는군.”
“그야 이 정도가 아니면 안 믿으실 거잖아요? 틀려요?”
아르파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믿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쥐고 있던 내 목을 놓아주었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걸 막지도 않았다.
‘내가 줄 ‘잔금’이 궁금해지긴 했다는 소리일 거야.’
그렇다면 내 의뢰에 따를 마음도 들었다는 것일 터다.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면… 더 최악의 방법이라도 써야 할 수도 있으니까…….’
벨테인 경의 도움으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 뒤 나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뒤늦게 온몸이 떨려 왔다.
거울에 몸을 비추자 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명백하게 죽음의 위험을 이겨 내고 온 것이다.
‘이건 도박이야.’
하지만 나는 도박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로 들어갔지만,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뜬 눈으로 결혼식 날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