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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5화 (5/210)

5화

애니에게 에반젤린의 방에 몰래 가져다 두라고 말한 그 칼이다.

‘이게 왜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와?’

벨테인 경과 나는 숨을 죽이고 나무 아래 몸을 숨겼다.

그리고 테라스 위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곧 잔뜩 화난 남녀의 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당연히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었다.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 테라스에서 언쟁 중이었던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다는 거야? 저 멍청한 힐리아가?”

알고는 있었는데 이 시기에 저 둘이 날 두고 깎아내리면서 대화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이었다.

이전 생들에서는 결혼 직후부터 둘이 노골적으로 굴기 시작했으니.

나는 흥미진진해서 귀를 기울였다.

“내가 그 미친 황태자에 대항하려면 델핀 공작가의 힘이 꼭 필요하다는 거 알잖아? 너도 동의한 일이었고.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당신 말대로 델핀 공작가를 당신이 손에 넣기 전에 결혼을 깨는 건 나에게도 손해야! 그런데 내가 왜 그러겠어?!”

“어제도 내가 널 두고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게 슬프다고 울었잖아!”

“그거야……!”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은 내 집안을 무슨 자기들 사유물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들의 대화는 곧 이루어질 미래이기도 했다.

지난 세 번의 삶에서 모두 그랬으니까.

‘이번엔 절대 안 돼.’

내가 결의를 다지며 치맛자락을 꽉 쥐고 있는 걸 옆에 있던 벨테인 경은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안쓰러운 눈으로 보더니 조심스레 내 손등에 본인의 손을 올린다.

따스하고 커다란 손.

새삼 깨달았다.

‘지난번 나를 데리고 도망쳤을 때는 손도 댄 적 없었으면서.’

그는 지나칠 정도로 기사다운 기사였던 것이다.

이렇게 사적으로 먼저 나에게 손을 내미는 건 처음이라 조금 놀라고 또 어색했다.

이를 눈치챈 건지 벨테인 경은 곧 입술만으로 ‘죄송합니다’ 라고 소리 없이 사과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내가 그 온기에 더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테라스 위의 두 사람이 더욱 격하게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면, 아까 여기 있던 보석 상자는 뭐야? 그게 왜 네 방에 있는 거지? 그건 내가 힐리아에게 선물한 거야! 게다가 그 안에 있던 칼에는 왜 웨딩드레스를 찢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데?!”

“정말 내가 한 짓이면 그런 증거물을 왜 떡하니 당신 보이는 데 두겠어? 왜 내 말을 못 믿어?”

“지금까지 네가 힐리아의 물건들을 빼돌린 게 몇 번인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런데 어떻게 믿겠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콩가루처럼 무너지고 있는 꼴이 조금 웃겼다.

나는 소리 내어 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지금은 이런 작은 일에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저 둘 사이에 금이 가게 하는 건 당연히 내가 바라는 일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짝!

놀라서 올려다보자 에반젤린이 놀란 눈으로 손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가 있는 루드비히의 얼굴도.

에반젤린은 경악해서 태세를 바꾸고 루드비히에게 매달렸다.

“미, 미안해요. 내가 너무 감정이 격해서 실수를……!”

“됐어.”

“루드비히!”

루드비히는 싸늘하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황궁으로 돌아가고, 내일 결혼식에는 오지 마. 또 망치려 들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루드비히!!”

하지만 루드비히는 에반젤린이 매달리는 걸 뿌리치고 나가 버렸고.

에반젤린이 망연하게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 * *

막장극의 비밀 관객이 되느라 예상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우리는 무사히 델핀 저택을 빠져나왔다.

벨테인 경은 조금 걱정하는 것 같았다.

“혹여 루드비히 대공이 다시 아가씨께 가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럴 리는 없어.”

나는 루드비히를 잘 알았다.

내가 펑펑 우는 걸 달래 주기 싫어서 에반젤린을 보러 갔다가 싸운 상황이다.

다시 나에게 갔다가 또 내가 울고 있는 걸 보기 싫어할 게 뻔했다.

‘진짜로 올지도 모르니까 애니에게 문밖에서 지키고 있어 달라고 하기도 했고.’

누가 오면 내가 너무 상심이 커서 울고 있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 루드비히는 알아서 돌아갈 테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완벽하게 둥근 보름달이 거의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진홍월.’

하필이면 오늘이 붉은 달이 뜨는 날이라는 것이 공교로웠다.

네 번의 생에서 모두 그랬지만, 오늘 이 달빛을 밟으며 ‘그 남자’를 보러 가고 있는 건 조금 신기한 기분이다.

“난 내가 언제 미쳐 버릴지 늘 두려웠거든. 특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진홍월이 뜬 때에는 더 그랬지.”

이 달이 뜬 날이면, ‘그’는 절대 황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수도에서 가장 깊은 지하로 파고든다.

별빛마저 닿지 않는 거대한 지하묘지 구석에 마련한 본인의 아지트에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나는 벨테인 경만 대동하고 불 꺼진 등잔을 든 채 수도 외곽 카타콤의 입구에 도착했다.

무덤에서 당장 일어난 시체 같아 보이는 묘지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같은 밤에 성묘하러 오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것도… 불 없는 등을 드시고.”

나는 말 없이 웃으며 은화 하나를 내밀었다.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입에 넣어 주는 부장품으로 만들어지는 은화였다.

그걸 보고 뼈만 남은 미간을 찌푸리던 묘지기는 결국 문 앞에서 비켜섰다.

하지만 내 뒤를 따르려는 벨테인 경은 막았다.

“이게 무슨!”

“의뢰인 본인만 들어갈 수 있소. 그게 여기의 규율이지.”

‘의뢰인’이라는 말에 벨테인 경은 당혹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명령했다.

“여기서 기다려. 무사히 나올 테니까.”

“…예. 아가씨.”

결국, 나는 빈 등불을 들고 홀로 묘지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곳은 용병왕 제랄드가 부하들에게도 잘 알려 주지 않은 비밀 거처였다.

그렇게 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르파드의 비밀 신분인 용병왕 제랄드를 만나는 데 성공했고.

드디어 이 말을 던질 수 있게 됐다.

“저를 약탈해 주세요.”

* * *

내 지나치게 과격한 의뢰 내용을 듣고 용병왕 제랄드, 아니, 아르파드 황태자는 당황한 듯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물건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제 의뢰를 받아들여 주신다면, 저는 대가로 전하가 미치지 않은 채 무사히 황위에 오르게 해 드릴 수 있어요.”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제안을 황태자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어!’

실제로 지난 세 번의 삶에서 그는 모두 미쳐 버렸으니까.

한번은 미친 폭군으로서 제위 일주일 만에 목이 떨어졌고, 남은 두 번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매번 아르파드를 죽였던 건 그의 부친이었다.

황제는 아들을 믿지 않았다. 언제 미쳐서 나라를 망칠지 모른다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파드는 내 세 번의 전생에 모두 미쳐서 죽었으니, 황제의 의심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친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루드비히 대공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니까.

‘황태자가 굳이 용병왕 제랄드라는 가짜 신분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지.’

제랄드의 용병 길드는 사실상 아르파드 황태자의 사병이었다. 부친에 대항하기 위한.

그러니 ‘제랄드’에 대한 진실이 황제에게 알려지는 걸 황태자는 피하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승리감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아르파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백금빛 머리카락은 달빛을 물레로 자아낸 듯했다.

유달리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단순히 아름답다 예쁘다 정도의 감상이 아니라, 보는 이를 홀리게 할 정도의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미모.

우아한 선을 그린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위협적인 미소를 그렸다.

“후…….”

그는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 가득 조금 전의 총기는 온데간데없이 광기로 가득 물들었다.

‘어?’

내가 당혹할 사이도 없이.

다음 순간, 아르파드는 검을 뽑아 들어 내 목에 들이댔다.

서늘하고 예리한 금속의 번뜩임이 내 목덜미에 달라붙는다.

“윽…….”

정제된 차가운 광기가 아르파드의 눈빛에 어려 있었다.

“난 말이지, 나를 조종하려 드는 자들을 싫어해.”

그가 누굴 떠올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황제.

아들을 믿지 못하고 끝내 죽였던 아비.

“네가 어떻게 용병왕과 나의 연관 관계를 알아낸 건지, 그리고 무슨 자신감으로 내 역린을 건드린 건지 모르겠지만.”

“…크흑!”

칼날이 바짝 다가왔다. 그 감촉이 맨살에 닿는 감각이 소름 돋았다.

그는 유리잔을 가볍게 들어 올린 듯이 굴고 있었지만, 명백한 위협.

당장에라도 내 목을 베어 버릴 수 있다는 으름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이미 세 번 죽어 봤어!’

당연히 목이 잘려 죽은 적도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비참하고 끔찍한 경험 끝에 다시 죽을 거다.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고 빠르게 끝내는 편이 나았다.

‘할 거면 해보라지!’

나는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도전적으로 노려보았다.

입술에서 피 맛이 나도록 깨물며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예리한 칼날이 살갗을 베는 감촉이 느껴졌다. 피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

도리어 나를 막은 건 아르파드였다.

두려움 없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자 내 머리를 잡고 있던 그가 손을 뒤로 당겼다.

내 목이 깊게 베이지 않도록.

덕분에 상처만 조금 나고 끝났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됐어!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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