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르파드 황태자는 매번 부황과 대립하다가 황실에 유전되는 정신병으로 미쳐서 죽는 남자였다.
한번은 미치광이 살인마가 된 그가 벌인 피바다를 본 적도 있었다.
‘하마터면 나도 그 손에 죽을 뻔했었지.’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루드비히와 맞설 수 있는 건 정통성을 가진 그뿐이다.
게다가 나에겐 세 번째 삶에서 얻은 결정적인 정보가 있었다.
그 대가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아르파드 황태자가 미치지 않을 방법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바로 뛰쳐나가 황태자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곧 사람이 올 거야.’
그것도 두 명이 다른 타이밍에 말이다.
이 시점을 나는 이제 네 번째 경험하는 것이다.
게다가 회귀 직후의 일이다. 당연히 선명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부터 결혼식까지 벌어질 일은 특히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을 대충 가늠하고, 페이퍼 나이프를 보석 상자의 비밀 공간에 숨겨 둔 다음.
창문과 문을 다 열어젖혔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첫 번째 사람이 방에 들어오고 한참 뒤…….
온 저택에 쩌렁쩌렁 다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악!!!”
귀가 멀쩡한 자라면 들을 수밖에 없도록.
그래서 모든 이가 내 방으로 달려올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 * *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 정도로 당혹해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세 번의 인생 모두 저 남자의 아내였지만, 저렇게 당황하고 난처해하는 목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정말로 내 앞에서는 늘 거짓말과 가식뿐이었구나.’
나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황태자보단 못하지만 꽤 수려한 얼굴의 미남자였다.
탁한 잿빛 머리칼, 그리고 첫 번째 생에는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적갈색 눈동자.
세 번의 생 모두 내 남편이었고, 나를 이용만 하다 버린, 원수.
루드비히 키엘른 대공.
현 황제의 조카이자, 황태자 아르파드의 라이벌.
지금은 나의 약혼자이며, 내일 아침이면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이 될 남자였다.
그는 나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드레스가 어떻게 이런 꼴이 된 거지? 바로 내일이 결혼식인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야!”
엉망이 된 웨딩드레스와 나를 번갈아 가며 삿대질하면서.
‘아, 화난 표정과 비난하는 말투는 익숙하네.’
지난 삶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나는 하던 연기를 열심히 이어 갔다.
힘껏 눈물을 짜내며 훌쩍거렸다.
“미, 미안해요. 루드비히. 당신이 준 드레스인데 지키지 못했어요.”
어흑흑!
내 귀로 듣기에도 서러운 울음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나는 일부러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미친 사람처럼 반복했다.
결혼식 전날 드레스가 망쳐져서 절망한 신부답게 말이다.
그러자 나를 비난하던 루드비히는 도리어 난처해했다.
자책만 하는 가장 큰 피해자를 오히려 몰아세운 격이 되었으니.
그때, 달콤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그만하세요, 오라버니. 새언니가 누구보다 반성하고 있을 거예요.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잘 아는 목소리.
“잘 가. 원작의 여주인공 씨.”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갈 뻔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울고 있는 척해서 정말 다행이다.
‘X랄하네!’
저 말만 들으면 내가 웨딩드레스를 난장판으로 찢어 놓은 사람인 줄 알겠다.
‘…아, 내가 한 거 맞지?’
하도 열심히 연기하다 보니 내가 찢어 놨다는 것도 깜빡했다.
하지만 내가 했다고 자백하는 건 미친 짓이니 당연히 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펑펑 우는 동안 간드러진 목소리의 주인은 어느새 루드비히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로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훔쳐보았다.
“아무리 새언니가 경솔하게 문을 잠그지 않았다가 벌어진 일이라지만, 너무 화내지 마세요. 드레스가 저렇게 되어 가장 슬픈 건 신부잖아요.”
“너는 너무 착해서 큰일이다, 에반젤린.”
에반젤린, 아니, 진짜 이름은 알 수 없는 빙의자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꿀 빛 금발을 배배 꼬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는 약혼녀인 내가 앞에 있는데도 분노한 루드비히의 어깨를 살살 쓸어내리며 달랬다.
누가 봐도 남의 남자에게 보일 행동은 아니다.
게다가 그를 오라버니, 나를 새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하기에는 절대 안 맞는 행동이다.
‘오라버니는 얼어 죽을.’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후작 영애에 불과한 그녀가 황족인 루드비히를 오라버니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 황후가 데려온 전 남편의 딸이니까.’
원래대로라면 반대가 많았을 일이지만, 현 황후는 전 황후의 시녀 출신이다.
게다가 전 황후가 직접 정한 황태자의 유모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황제는 아들을 돌볼 수 있도록 그녀를 황후로 들였다.
물론 그 황후가 자신과 황태자 사이를 갈라놓게 될 줄은 황제도 미처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황후의 딸인 에반젤린은 거의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기 때문에 루드비히와는 사촌이나 마찬가지라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그걸 이유로 자기가 먼저 루드비히를 ‘오라버니’라 부르고, 나를 ‘새언니’라 부른 것이다.
저 둘이 사실 어떤 사이인지 아는 내가 보기에 저들의 행태는…….
‘…역겨워.’
사촌이나 다름없다고 오빠라 부르면서, 결국은 피가 안 섞였으니 상관없다며 바람을 피웠으니까.
‘뭐, 빙의자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려나.’
어쨌든 내 알 바 아니다.
저 끈적한 손길을 보면, 아마 이번에도 저 둘은 깊은 사이가 될 모양, 아니 이미 그런 모양이다.
‘이번에는 꼭 저 둘을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넣어서 처리해 버리겠어.’
으득, 나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가서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제 약혼녀가 펑펑 울고 입술에 피가 나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에반젤린과 시시덕거리기에 바빴다.
나는 계속 울다가 몸에서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척을 했다.
“아……!”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루드비히를 향해 쓰러지는 데에 성공했다.
“힐리아!!”
그제야 루드비히는 내 상태를 눈치채고 손을 뻗어 부축했다.
덕분에 내팽개쳐진 꼴이 된 에반젤린은 잠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사이, 나는 회심의 공격을 했다.
루드비히의 품속으로 가련하게 파고들며 외친 것이다.
“무서워요, 루드비히!”
“응? 갑자기 무슨……?”
나는 눈물로 촉촉해진 눈으로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이 불륜 남녀 때문에 개고생하기 전이다 보니, 나는 인생 최고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대륙 제일의 미녀 소리를 듣던 때라는 소리다.
미녀의 눈물에는 누구라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설사 그게 내연녀의 앞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에반젤린이 질투와 패배감을 미처 다 감추지 못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걸 보지 못한 척 루드비히에게만 집중했다.
“누가 웨딩드레스를 망쳐 놔 내가 비명을 지른 건 당신도 알죠?”
“그래. 다 알고 있어. 당신 비명이 하도 커서 나도 에반젤린도, 그리고 지금 방 밖의 고용인들도 다 몰려와 있잖아.”
그는 좀 짜증을 내려 했다.
절대 상심한 약혼녀를 위로하는 말투가 아니다.
“사실…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저는 봐 버렸어요!”
“봐? 뭘… 아, 설마 범인을 봤다는 건가?!”
두려움을 가장해 온몸을 발발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드비히의 분노가 구체화되었다. 내가 범인이라도 되는 것처럼─사실 맞지만─어깨를 잡고 흔들며 화를 냈다.
“누구지? 어서 말해! 당장 죽여 버리고 말겠어!”
다른 것도 아니고, 나와 루드비히의 결혼식에 쓰일 웨딩드레스다.
결혼식 하루 전에 격에 맞는 드레스를 구하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이미 디자인도 전부 공개가 됐는데 갑자기 바뀌게 되면 이걸 두고 말이 많을 것이다.
루드비히 같은 다혈질은 당연히 화를 낼 만했다.
노발대발하는 그에게 나는 여전히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인지 얼굴까진 못 봤어요. 너무 빨리 도망쳐서. 하지만… 여자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여자?”
나는 연이어 천연덕스럽게 폭탄을 내던졌다.
“너무 무서워요, 루드비히!”
그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며 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누가 우리 결혼을 방해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저를 미워하고, 우리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은 사람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
아닌 척했지만, 루드비히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런 사람이 근처에 있지. 정확히는 우리 바로 앞에.’
그리고 나는 지금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 당황해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대충.
‘설마, 에반젤린 너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오라버니!’
이런 느낌의 눈짓을 주고받고 있겠지.
본인이 빙의자라는 걸 밝히기 전에도 에반젤린은 내 것이 당연히 자기 것이라는 듯 굴었다.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어. 처음부터 루드비히도, 황태자비 자리도 내 것이었어. 네게 잠시 맡겨 두었을 뿐이지.”
당연히 루드비히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이 결혼식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그래서 드레스를 망칠 동기가 있는 사람.
사실, 한 명뿐이지 않은가.
루드비히의 내연녀 에반젤린.
루드비히가 그걸 떠올리지 못할 리 없었다.
‘좋아. 의심의 씨앗은 뿌렸어.’
나는 굳어 버린 루드비히의 품에 안긴 채 몰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