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에반젤린 루스.
그녀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새언니.”
새언니라는 표현부터가 안 맞았다.
남편의 사촌이나 다름없다고 하긴 했지만, 진짜 사촌도 아니지 않나.
‘결국 둘이 바람나 버렸지.’
그래. 여기까진 그냥 이상하고 머릿속이 꽃밭인 불륜녀라 그렇다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모든 게 너무나도 쉬웠다.
내 남편의 사랑은 물론이요.
촉망받는 대신관, 대륙 최강의 기사, 마탑의 주인, 암흑가의 실력자, 언론의 거물 등등.
이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전부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들의 도움과 헌신을 당연한 듯 수집하면서.
에반젤린은 마침내 황태자비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녀가 앉아야 할 자리를 눈치 없이 막고 있던 장애물일 뿐.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치워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 번의 삶 동안 매번.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되었다.
에반젤린의 고백을 통해.
“이제 내가 진짜 여주인공이야.”
내 모든 고통은 빙의자가 내 자리를 빼앗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다.
에반젤린은 분명히 ‘한국어’로 말했다. 내가 알아들을 거라 확신하고서.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졌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어.’
한국에서 ‘유신아’라는 이름으로 살다 죽었다가 이 세계에서 환생했다는 건 말이다.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에반젤린이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듯 모든 걸 쉽게 얻은 이유를.
‘원작을 읽은 빙의자였기 때문이야.’
게다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그러니까 ‘원작’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사실 에반젤린이 말한 ‘여주인공’의 자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난 내가 책 속 세상에 환생한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남편인 루드비히나 다른 사람들도, 황태자비 자리나 부귀영화 역시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았다.
두 번째나 세 번째 삶에서 내가 도망쳤을 때, 그냥 놔뒀다면…….
그리고 몇 안 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독하게 마음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전부 빼앗아 주겠어.’
그녀가 손에 넣고 웃던 그 모든 게 사실 내 것이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으득, 이가 갈렸다.
내가 목이 잘리기 직전 비웃던 그 여자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내 것을.
이 세계를.
‘되찾을 거야. 모조리!’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 원작이라는 걸 몰라. 읽어 본 적이 없다고!’
그랬다면 진작 알았을 것이다.
19년을 이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 뒤로 세 번이나 회귀를 겪었으니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벼락처럼 머리에 꽂혔다.
‘혹시 이게 내가 세 번이나 회귀한 이유인 걸까?’
나는 한국인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환생했다. 그건 아마도 ‘원작’과 같을 것이다.
‘빙의자가 내가 한국어를 알아들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원작’의 내용을 모른다. 이건 분명한 약점이다.
대신 나에게는 다른 것이 있었다.
‘회귀를 통해 얻은 미래의 지식들!’
지난 세 번의 삶 동안 에반젤린이 회귀를 인식한 느낌은 없었다.
그렇다면 회귀로 인한 기억은 나만 있다는 거다.
에반젤린에게 원작의 지식이 있다면, 나에겐 회귀를 통해 얻은 정보가 있었다.
그것도 전부… 에반젤린이 나에게 알려 준 셈.
‘그걸 이용해서 전부 갚아 주겠어!’
결심과 함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
눈앞이 까맣게 물들며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다시 회귀한 줄 알았잖아!’
천만다행으로 또 죽은 건 아니었다.
너무 갑자기 일어나다가 빈혈 때문에 잠깐 쓰러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이때 나는 결혼을 앞두고 극단적인 식이 조절을 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분노가 치밀었다.
“빌어 X먹을 결혼!”
욕설을 내뱉으며 왼손 약지의 반지를 뽑아 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너무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그런지 작은 소리 하나 울리지 않았다.
나는 오늘이 언제인지 알았다. 결혼식 전날.
결혼반지가 손에 끼워져 있다는 게 증거였다.
첫 번째 삶에서 나는 미래를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이 반지를 끼고 잠들었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예정대로 호화찬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과는…….
‘끔찍했지! 단물만 쪽쪽 빨리고, 이용만 당하다가, 황태자비 자리 뺏기고 반역자로 죽었으니까!’
내 세 번째 죽음을 보면 알겠지만, 세 번 모두 결과는 같았다.
과정은 첫 번째 생보다 복잡해지고 달라진 게 많았지만 말이다.
에반젤린 말고도 원망하고 복수해야 할 인물은 많았다.
당연히 그 중 첫 번째는 ‘그’였다.
매번 삶에서 내 남편이자, 나를 이용하다가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 같은 놈.
‘빌어먹을 루드비히!’
현 황제의 총애 받는 조카.
내 집안을 쪽쪽 빨아먹은 끝에 황태자 자리까지 꿰찬 뒤 나를 버리는 개X끼!
‘아니, 아니지. 그놈에게 비교하기엔 멍멍이들이 불쌍해.’
댕댕이들은 귀엽고, 착하고, 따스하고, 복슬복슬하다.
안 타는 쓰레기, 아니, 썩은 음식 쓰레기보다 끔찍한 루드비히에게 비교하는 건 너무 미안하다.
‘미안해, 댕댕이들아.’
나는 잠시 모든 세계의 귀여운 털 뭉치들에게 사과하는 시간을 가진 뒤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니까.
‘내일이 결혼식이야.’
저기 거울 앞 토르소에 입혀진 휘황찬란한 웨딩드레스를 보라.
나를 기다리는 처참한 미래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저것도 그 빙의자가 골라 준 거였지.’
“새언니의 얼굴색과 몸매에는 이 디자인이 딱인 것 같아요.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려요.”
그렇다. 나는 멍청하게도 남편의 내연녀가 골라 준 드레스를 입고 결혼했었다.
세 번이나!
물론 모른 건 처음 한 번뿐이고, 남은 두 번은 싫다고 해도 소용없었던 거지만.
‘악! 아악! 내 흑역사!’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나는 책상 서랍 속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서 드레스에 다가갔다. 그리고 치맛자락과 면사포를 박박 찢어 버렸다.
“하. 시원하다.”
뭐, 어차피 드레스 하나 작살냈다고 내일 결혼식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웨딩드레스 찢어 본 건 지금이 처음이거든!’
4회차 인생인데도 말이다.
약간 화풀이도 했겠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선 아까 내던진 결혼반지를 다시 주워 들어서 확인했다.
‘역시… 빛이 전부 사라졌어.’
이 반지는 보라색의 다이아몬드 세 개가 세팅된 것이었다.
황제가 총애하는 조카의 결혼을 위해 직접 내려주었다는 황실에 전해지는 보물 중 하나.
나는 매번 회귀 때마다 이 반지를 낀 채 침대에 누웠던 결혼식 전날 밤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회귀를 할 때마다 반지의 보석에서 빛이 사라졌지.’
이 기이한 빛은 내 눈에만 보였다.
‘마치, 주어진 기회가 하나씩 없어졌다고 알려 주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이 반지에는 어떤 신비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도 그저 평범한 반지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회귀할 기회는 다 끝난 거야.’
반지가 가진 힘이 정말 나를 과거로 돌려보냈다면 그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지난 세 번의 삶 동안 나름대로 온갖 노력과 시도를 했었다.
‘전부 실패했지만.’
하지만.
‘이번엔 달라. 나는 진짜 적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지금 내겐 한 가지가 부족했다.
‘조력자. 그것도 아주 강력한 조력자가 있어야 해.’
빙의자가 루드비히를 끼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수많은 능력 있는 이들을 매혹해서 거느리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차피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면…….
‘극약 처방이 필요한 건지도 몰라.’
독에는 독으로. 악당에겐 악당… 아니, 그 이상의 미친놈으로!
나는 단 한 명 외에 떠올릴 수 없었다.
붉은 달빛 아래, 피에 젖은 채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
그럼에도 아름다워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아르파드 황태자.’
그는 지난 세 번의 삶에서 한 번도 빙의자의 손에 들어간 적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그 전에 죽었기 때문이지만.’
하지만 이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힌트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