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저를 약탈해 주세요.”
분홍색 머리의 사랑스러운 소녀가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분명 의뢰할 것이 있다고 왔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요구가 튀어나올 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이건 의뢰나 요구라고 할 수 없었다. 숫제 협박이다.
자신보다 머리가 한 개 반은 큰 건장한 남자를 향한.
덕분에 이 황당한 말을 들은 당사자는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옮겼다.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시간과 장소도 지정해 드릴게요. 내일 정오 직전, 저를 태운 마차가 황궁 앞 광장을 지나갈 때 거기서 약탈혼을 진행하세요.”
“나더러 그 사람 많은 광장에서 당신을 약탈혼하라고?”
“네! 정확해요! 아주 잘 이해하셨어요!”
소녀는 신비한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짓이 아주 신이 나 보였다.
절대 이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할 미친 인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협박받은 남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당신,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건가?”
“납치로만 끝나서는 안 돼요. 바로 결혼 계약서에 서명 끝내고, 신전 공증까지 받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하고요!”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 모든 과정에 제 의사는 하나도 없다고 알려져야 한다는 거죠!”
이 아지트의 주인이자, 협박당한 피해자인 용병왕 제랄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종을 울려 밖에서 대기 중인 수하를 부르려 했다.
“당장 이 미친 여자를 끌어……!”
덥석!
하지만 놀랍게도 여자가 한 박자 빨랐다.
거의 달려들다시피 제랄드에게 매달려 종을 흔드는 걸 막았던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당신은 제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걸요.”
“내가 미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어.”
그러자 여자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당신은 곧 미치겠군요. 아니, 반드시 미쳐야 할 거예요.”
이 목소리는 마치 예언처럼 들렸다.
이 자그마한 여자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더없이 천진스럽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명령했다.
“나를 약탈하세요.”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폭탄을 내뱉었다.
“안 그러면 당신은 죽어요.”
“…!”
그러자 용병왕은 화를 낼 타이밍마저 놓쳤다.
그의 손을 잡은 여자의 손길은 깃털보다 가벼웠고, 피부는 우유처럼 부드러워 거친 옷감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날 듯했다.
이런 협박의 주체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용병왕은 그녀를 비웃었다.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그리고 가늘고 부드러운 손을 뿌리치려는 찰나.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폐부를 찔렀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용병왕 제랄드의 정체가 황태자 아르파드 전하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거예요.”
남자의 얼굴에 떠올랐던 비웃음이 싹 가셨다. 대신 긴장감이 떠올랐다.
여자는 씩 웃었다.
“특히,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아주 재밌어지겠죠?”
‘그냥 협박이 아니군.’
이 여자는 실제적인 위협이었다.
그것도 아르파드의 목덜미에 드리워진 날카로운 칼날.
그래서 남자는 가면을 벗기로 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여자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여기서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주장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
이 여자의 협박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지금 여기서 절 죽여도 입막음은 할 수 없어요.”
“…뭐?”
여자는 다시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의 비밀이 적힌 편지가 황궁으로 보내질 거예요.”
“…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그다지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아르파드는 잠시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여자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크게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발끝이 땅에서 들렸다.
“아!”
여자는 당돌하고 미친 협박을 한 당사자답지 않게 너무 쉽고 하찮게 끌려왔다.
되레 아르파드가 더 당황할 정도로.
“진심이군.”
“맞아요. 저는 진심으로 의뢰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빙자한 협박이겠지.”
뒷덜미가 잡혀 제압당했음에도 여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설사, 부황이라 해도 그의 앞에서는 이렇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르파드는 여자의 얼굴을 자신의 코앞으로 잡아당기면서 맹수가 으르릉거리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내일 결혼식 올릴 사촌 동생의 신부를 약탈하라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여자의 보라색 눈동자가 떨렸다.
“저를, 아시는군요?”
“당연하지. 내일이면 내 사촌 제수가 될 예정인, 힐리아 델핀 공녀.”
그러자 힐리아라 불린 소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제 개인정보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요.”
“그렇다면 다른 설명은 좀 들어야겠군.”
“다른 설명요?”
“황제에게 내 비밀을 알리겠다는 협박 말고, 내가 얻을 수 있는 합당한 이득이 뭔지 말이야.”
“이득이요?”
“그래,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의뢰’라는 말을 쓸 필요 없겠지.”
여자는 승리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광기로 젖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황태자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영명한 머리를 가졌다.
단어 하나를 두고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바로 눈치챌 만큼.
힐리아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저는 그 대가로 전하가 미치지 않은 채 무사히 황위에 오르게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아르파드 황태자는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저 ‘대가’는 아르파드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Chapter 1. 사실 내가 원작 여주였다
“잘 가. 원작의 여주인공 씨. 이제 네 모든 건 전부 내 거야. 걱정 마. 아주 소중히 여겨 줄 테니까.”
“…뭐?”
“그러니까 안심하고 죽어.”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게다가, 지금 한국어로 말하고 있잖아? 어떻게……?’
하지만 그 내용이 미처 머리에 다 들어오기도 전.
쿵!
단두대의 칼날이 내 목을 내리쳤다.
충격이 세상을 뒤흔들었고, 곧 의식이 흐려졌다.
“왜 이렇게 어중간한 몸에 빙의했나 했더니, 결국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거네…….”
그 와중에 나는 마지막 한마디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아하하! 이제 내가 진짜 여주인공이야.”
그리고, 암전.
*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XX!”
나는 첫 번째 삶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험한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
한 번 더.
“XXX!”
처음의 욕은 상황 자체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아주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것.
세 번째 죽음 직전에 들은 충격적인 말을 한 당사자를 향한 거였다.
지난 세 번의 삶에서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여자.
착하고 친밀한 척 접근해서 늘 남편의 내연녀가 되었고.
마지막엔 날 불륜과 반역으로 몰아 처형시켰다.
그 여자의 진정한 정체를 어리석게도 나는 이제 와서 알게 됐다.
‘그 여자, 빙의한 거였어?!’
뒤늦게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그 여자가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고, 내가 가진 모든 걸 빼앗으려 한 이유를.
“잘 가. 원작의 여주인공 씨.”
내가 바로 ‘이 세계’의 진짜 여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