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3. 같은 곳에서
“아이고, 올해 야외 다과회는 이게 끝이겠다. 햇빛 쨍한 거 봐.”
멀린이 의자 등받이에 벌러덩 기대며 기지개를 쭉 켰다. 이제는 소년보다 청년에 조금 더 가까워진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그가 있는 곳은 에버딘 저택이었다. 정자의 지붕이 햇빛을 어느 정도 가려 주지만 그늘에 있어도 피부가 홧홧한 건 막을 수 없었다.
제국 전체로 보았을 때는 에버딘 영지가 여름에도 선선한 편이라지만, 에버딘령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이들에게는 이조차 꽤 고역이었다. 지금처럼 갓 여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은 더더욱.
멀린은 결국 더위를 참지 못하고 셔츠 소매를 걷고 단추를 풀어헤쳤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리벨이 손을 뻗어 멀린의 팔을 찰싹 때리며 눈을 흘겼다.
“밖에서 단추 그렇게 막 풀어헤치지 말라니까.”
“왜? 보면 막 설레? 아니면 남들이 나 보는 게 싫, 으악!”
“내가 헛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아, 아파! 잘못했어!”
키가 훌쩍 크고, 몸의 선이 달라졌어도 관계는 그대로였다. 리벨은 익숙하게 멀린의 등을 때리기 시작했고 그는 따갑다며 칭얼댔다.
하리엔은 맞은편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참 한결같이 사이가 좋다니까.’
멀린이 들었다면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만한 생각이었다.
하리엔은 한동안 리벨과 멀린의 투덕거림을 지켜보다가 문득 시야 구석에 비치는 반짝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
그러자 테이블 위로 턱을 괸 채, 녹음이 우거진 정원 저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테레지아가 시야에 비쳤다. 연한 백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며 햇빛의 파편 같은 자잘한 반짝임을 만들어 냈다.
열넷의 테레지아는 이제 더는 ‘아이’라고 보기 어려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톡 튀어나와 있던 볼살이 들어가고, 얼굴과 몸의 선이 전체적으로 길고 갸름해지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졌다.
‘아홉 살 생일 이후로 뭔가 성격이 더 밝아진 것 같긴 한데.’
테레지아는 본래도 밝고 씩씩했지만, 아홉 살 생일을 기점으로는 에버딘 저택을 완전히 집으로 여기게 된 듯했다.
이전보다 한결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괜스레 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 종종 들었다.
다만 테레지아는 이따금 지금처럼, 금방이라도 지쳐 바스러질 것처럼 멍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하곤 했다.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으나 리벨과 멀린, 하리엔은 그녀가 먼저 이유를 말해 주기 전까지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암묵적인 합의였다.
멀린을 한껏 응징하고, 그의 단추를 절반쯤 다시 채워 준 리벨이 테레지아를 돌아보며 짐짓 밝게 물었다.
“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혹시 또 교제 신청서가 우르르 들어와서 그런 거야?”
테레지아가 아이 티를 벗기 시작할 무렵부터 에버딘 저택에는 연일 교제 신청서, 혹은 혼담이 줄줄이 들어왔다.
특히나 테레지아가 이렇다 할 사교 모임에 참석만 했다 하면 그다음 날은 무수한 불쏘시개를 처리하느라 업무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리벨의 말에 정신을 차린 테레지아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음, 그렇긴 한데 어차피 처리는 아빠랑 미나가 알아서 하는 편이라……. 그냥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지 좀 피곤하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리벨.”
테레지아가 그리 말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조금 전 그녀의 옆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애써 안쓰러움을 감췄다.
테레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애들이 눈치챌 정도면 내 표정이 많이 안 좋긴 했나 보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공놀이하러 갔던 소년 소녀들이 돌아와 세 사람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그 틈을 타 다시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테레지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릭.’
릭이 사라진 지도 어느덧 5년.
테레지아는 릭이 사라진 후,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시에 그를 찾으려 애썼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겼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4년 이상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난 소년을 찾으려 해도 ‘릭’이라고 확신할 만한 대상은 없었다.
혹시 릭이 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을까 봐 유령들을 통해서 수소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어휴.’
건국제 때 만났던 ‘걔’도 그렇고, 뭐 이렇게 하나같이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건지. 정말 유령이 곡할 노릇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 기약 없는 기다림이 갑작스레 힘겹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테레지아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또다시 우울감이 찾아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리벨과 멀린, 하리엔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곧 정자 한구석으로 몰려가 머리를 맞대고 조용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의를 마친 하리엔이 결연한 얼굴로 테레지아를 향해 다가갔다. 하리엔이 그녀의 한 손을 꼭 잡고 입을 열었다.
“테리.”
“응?”
“가자!”
“엥?”
어, 어딜?
* * *
첨벙!
“아, 좀 살겠다!”
멀린이 대번에 호수에 뛰어들며 웃는 얼굴로 머리를 푸르르 털었다. 리벨이 물이 튄다며 질색하자 그는 키득키득 웃고는 보란 듯 그녀에게 물을 튀겼다.
“지금 나랑 해 보자는 거지, 멀린?”
“어, 엉?”
결국 리벨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에 뛰어들었다. 멀린은 뒤늦게 위험을 감지했으나 이미 늦었을 때였다.
리벨과 멀린이 약혼자다운 다정한 – 아마도 –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테레지아는 하리엔과 호숫가에 앉아 발만 찰박였다.
테레지아가 가볍게 웃었다.
“갑자기 ‘가자!’라고만 해서 무슨 뜻인가 했더니. 호숫가 피크닉 가자는 말이었어, 하리?”
“으응. 그때 좀 긴장했는지 내가 앞을 너무 생략하고 말해 버렸지. 미안.”
“친구한테 놀러 가자고 하는 건데 긴장할 이유가 뭐가 있어. 나야말로 같이 가자고 해 줘서 고마운걸?”
테레지아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긋 웃었다. 말간 얼굴에 거짓의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리엔은 그제야 테레지아와 마주 보고 웃었다. 테레지아가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서 다소 막무가내로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었는데, 즐거워하는 모습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하리, 안 되겠어! 도와줘!”
“응! 갈게.”
“야! 하리엔! 너 이러기야! 이 배신자……!”
하리엔은 쉬던 도중에 리벨의 도움 요청에 따라 물놀이에 참전했다.
테레지아는 좀 더 쉬다가 놀겠노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그녀를 배웅했다.
“확실히 여름은 여름이구나. 엄청 시원하네.”
테레지아는 홀로 남아 흡사 폭풍이 이는 듯한 호수를 구경하며 찰박찰박 발장구를 쳤다.
물이 발을 간질이는 느낌이 시원했다.
에버딘의 여름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무난한 편인데도, 막상 이렇게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머리끝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응?”
테레지아의 위로 문득 긴 그림자가 지졌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박이고 고개를 돌리자 담담한 표정의 제르비스가 그녀의 어깨에 숄을 걸쳐 주었다.
“그래도 조심해. 혹시나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어, 제리! 왔어?”
테레지아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 광경을 빠짐없이 눈에 담은 제르비스가 느른히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응. 왔어. 출출하지는 않…….”
“이거 먹어 봐, 테리. 애플 셔벗이야. 황궁 파티시에의 레시피로 만들게 한 거니 맛은 보장할 수 있어.”
그때 제르비스의 눈앞을 셔벗 그릇을 쥔 손이 불쑥 가로막았다. 그가 미간을 설핏 찌푸리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전하께서는 대체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음? 그야 당연히 나도 테리의 ‘친구’니까. 그렇지, 테리?”
칼리오스가 능글맞게 웃음 짓고는 테레지아에게 셔벗 접시와 스푼을 건넸다.
테레지아는 이제 두 사람의 불협화음을 조정해 보려는 생각을 포기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스푼을 받아 들었다.
셔벗을 한 입 떠먹은 그녀가 제 옆에 앉는 칼리오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온 거야, 카오? 폐하께서 순순히 보내 줬어?”
“정말이지. 아바마마께 ‘순순히’라는 표현을 쓰는 건 아마 너뿐일 거다.”
칼리오스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한숨을 푹 내쉬고 덧붙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 돌아가면 자리를 비운 동안 미뤄 둔 공부와 업무를 세 배로 처리해야 하지만, 그만큼 널 보고 싶었으니까 괜찮아.”
칼리오스가 눈을 접어 웃으며 테레지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손이 드러난 어깨를 스쳤다.
반대쪽에 앉은 제르비스가 대번에 정색했다.
“수작 부리지 마시죠, 전하.”
“수작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영식.”
“날이 갈수록 뻔뻔함만 늘어나시는 듯하네요. 그 노력이 키로도 가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말 다 했나, 영식? 아니, 그보다 지금 고작 1cm 더 크다고 유세 부리는 건가? 치졸하긴.”
“전하께서는 그 유세도 못 부리시는 분 아닌지. 안타깝군요.”
가만히 놔두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투덕거릴 듯한 모습이었다.
테레지아는 결국 남은 셔벗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의 손을 하나씩 덥석 움켜쥐었다.
“어?”
“테, 테리?”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동시에 굳어졌다. 그들의 귓가가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레지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음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 먹었으니 소화 시켜야지. 셋 하면 뛰는 거야. 하나, 셋!”
“뭐? 잠깐……!”
“으악!”
풍덩!
제르비스와 칼리오스가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테레지아가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 후로 한동안은 난투였다. 리벨, 멀린, 하리엔까지 합세해 여섯이서 정신없이 물놀이를 즐기니 하늘이 순식간에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다가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을 때, 테레지아는 무의식중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소가 한가득 번져 있던 얼굴이 구름 끼듯 찰나 흐려졌다.
‘……너도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 어디 있어, 릭?
* * *
“……아.”
“…….”
“……형아!”
“응?”
아이릭은 제 소매를 당기는 손길에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동생, 아이반이 입술을 삐죽이다가 제 소매를 놓고 다시 말 고삐를 쥐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대답도 안 하고 하늘만 봐? 저기 뭐 있어?”
“아니, 그냥.”
아이릭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다잡고 아이반과 나란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형제는 클라센 후작저의 후원과 이어진 숲을 말을 탄 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반이 말을 몰며 옆에서 재잘거렸다.
“형이랑 이렇게 산책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려나? 앞으로는 바빠질 거랬잖아.”
아닌 척하려고 해도 말에서 시무룩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그동안 아이릭은 후작의 뜻에 따라 대외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조용히 저택에 머물며 건강 회복, 후계자 수업 등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클라센 후작가라는 대 가문의 후계자가 열여덟이 넘어가도록 아무런 사교 활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후계자의 소양을 갈고닦는 데 정진한다는 소문보다, 후계자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더 크게 번질 테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열여덟의 아이릭은 사 년이나 혼수상태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장한 모습이었다. 반듯한 자세와 다감하고 예의 바른 태도에 수려한 외모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후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후작이 바라는 대로.
“응. 이제는 슬슬 대외 활동을 시작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치. 그동안 형이랑 많이 놀 수 있어서 좋았는데…….”
“그래도 놀 시간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잖아. 이제 내가 직접 변명해 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너도 수업 그만 빼먹고, 채소 골라내고 먹지 말고.”
“알았어…….”
아이반이 처량하게 코를 훌쩍였다. 아이릭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도련님들.”
저택에 도착한 형제를 사용인들이 깍듯이 맞이했다. 아이릭은 아이반과 헤어져 제 방으로 돌아왔다.
욕실에서 흙먼지를 털어 내고 나오는 그에게 집사가 다가왔다. 꾸벅 인사한 그가 은쟁반을 내밀었다.
“카라벨라 후작 영애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잠시 심란한 얼굴로 은쟁반 위의 편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두고 가.”
“알겠습니다.”
집사는 책상 위에 편지를 옮겨 두고 사라졌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아이릭은 참았던 한숨을 토해 내며 창턱에 걸터앉았다. 그는 주홍빛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까지 묵묵히 창밖을 응시했다.
툭-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흰빛의 은발이 창문에 살짝 눌리며 흐트러졌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아이릭이 가만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당신은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으로써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녀가 보고 싶었다.
-1부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