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테레지아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막 문을 열고 저택으로 들어오던 자작이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테리? 왜 이 시간에 나와 있어?”
“아빠, 연락 못 받았어?”
“무슨 연락?”
자작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자 괜스레 울컥했다.
이피아가 쓰러진 이후로 지금껏 맘 놓고 기댈 어른 없이 혼자 두려움에 떨며 느꼈던 서러움이 한순간에 밀려들었다. 테레지아가 울먹이며 자작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어, 엄마가. 엄마가 아파. 아빠아, 흐으, 엄마…… 죽는 거 아니지……?”
“이피아가……?”
자작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리더니, 아이에게 보일 만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어?’
그 순간, 테레지아는 저도 모르게 울먹이던 것을 그치고 눈을 깜박였다.
‘방금…….’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떠오른 때 자작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손을 내렸다. 그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비통해하는 남편의 것이었다.
자작이 심각한 목소리로 테레지아에게 말을 건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엄마는? 방에 있니?”
“으, 응.”
테레지아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자작이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 뒷모습을 보자 조금 전 느꼈던 이질감이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테레지아는 고개를 휘휘 내저어 석연찮음을 털어 냈다. 그리고 자작의 뒤를 따라서 이피아의 방으로 향했다.
<…….>
한편, 토미는 여전히 1층 중앙 홀과 연결되는 계단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자작이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 *
“안주인의 건강에 각별하게 신경 쓰도록 하게. 알았나?”
“알겠습니다, 주인님.”
오블렌 자작은 귀환하여 이피아의 병세를 알게 된 날부터 모든 사용인에게 ‘안주인을 잘 모셔라’라며 당부했다. 테레지아는 마침내 일말의 불안마저 털어 냈다.
‘그럼 그렇지. 아빠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테레지아는 밝게 웃고는 자작의 다리를 붙잡고 엄마가 걱정된다며 칭얼거렸다. 그러면 자작이 슬픈 미소를 띠며 아이를 안아 올려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분명 웃었어, 저놈.’
하지만 토미는 자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테레지아와 달리, 그는 오블렌 자작이 ‘이피아가 아프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찰나 웃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을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토미는 며칠째 테레지아와의 접촉도 줄여 가며 자작을 끈질기게 감시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이 약재들은 왜 버리는 거지?”
몸져누운 이피아를 대신해서 저택을 둘러보던 오블렌 자작이 약재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약재들을 분류하고 있던 주치의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주인님. 이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약효가 떨어진 것들이라서요. 잘못 조합하면 안 좋은 효과를 낼 수도 있고, 지금 마님의 건강에는 도움이…….”
“아깝게 그걸 왜 버리나. 약효가 조금 떨어졌다뿐이지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아닌가?”
“예?”
설명하던 주치의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자신이 방금 들은 것이 사실인가 반신반의하는 태도였다.
토미 역시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자작은 따로 정정의 말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내뱉은 말이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주치의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당황해 입을 열었다.
“그, 그렇지만…….”
찰캉-
그때 자작이 주치의의 손을 붙잡더니 그 위로 작은 주머니 하나를 떨어트렸다.
주머니가 떨어지는 금속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주치의가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헉…….”
“행여 ‘실수로’ 잘못 조합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신경 써 주게. 알겠나?”
자작이 한 손으로 주치의의 어깨를 꾹 쥐었다. 주치의와 시선을 맞추는 그의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주치의는 ‘각별하게’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결국 손안의 묵직함에 마음을 빼앗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치의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주치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돈주머니를 품에 넣더니 모른 척 분류해 뒀던 약재를 다시 합치기 시작했다.
일련의 광경을 모두 목격한 토미는 망령임에도 피가 끓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개자식들이…….>
토미는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테레지아에게 달려갔다. 이 저택에서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산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으니까.
<테리!>
“웅?”
테레지아는 마침 혼자 정원에 나와 있었다. 이피아의 방에 가져다 두려 한 것인지, 품에는 어설프게 꺾은 꽃들을 한 무더기 안고서.
<그게……!>
토미는 당장에라도 자작의 두 얼굴을 까발리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갛기만 한 테레지아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게.>
토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가 도통 말을 하지 않자 테레지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니야.>
“피, 뭐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테레지아는 별다르게 캐묻지 않았다. 아마 이피아의 건강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채 다섯 살도 되지 못한 아이에게 ‘네 아빠가 엄마를 죽이려 한다’라는 말을 하기엔…….
텅-!
“아니, 이게 또 왜…….”
결국 토미는 테레지아에게 아무것도 털어놓지 못한 채, 주치의가 이피아에게 내미는 약 그릇을 열심히 엎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조차도 힘이 부족해 가끔은 실패하기 일쑤였다.
“…….”
처음에는 우연이라 여기던 이피아도 이쯤 반복되니 무언가 심상찮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허공을 한번 힐긋 일별하고는 약 쟁반을 밀어냈다.
“가져가.”
“예? 마, 마님. 하지만 약을 드셔야…….”
“약을 먹어도 영 차도가 없잖아. 안 먹어도 달라질 건 없을 듯하니 굳이 수고할 필요 없어. 가져가.”
이피아의 단호한 말에 우물쭈물하던 주치의가 결국 물러갔다. 그리고 그날 밤, 자작이 이피아의 방에 찾아왔다.
“이피아, 약을 안 먹겠다고 했다며.”
“…….”
이피아는 침대 헤드에 가만히 기대어 앉은 채 남편을 맞이했다.
평소라면 테레지아가 그녀의 곁에 꼭 붙어 잠들어 있었겠지만, 오늘은 사용인에게 부탁해 다른 방에서 재우도록 했기에 현재 그녀의 방에는 부부뿐이었다.
자작이 짐짓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이피아의 손을 감쌌다.
“몸이 계속 나아지지 않아서 지치는 건 이해하지만 얼른 나아야지. 그래야…….”
“라이.”
“응?”
이피아는 자작에게 잡힌 제 손을 부드럽게 빼냈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담담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약에 무슨 짓을 했어?”
“……뭐?”
자작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혈색이 빠져나갔다. 일순 굳어졌던 그는 곧 가까스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피아. 약에 무슨 짓을 했냐니. 농담이라기엔 다소 지나친 것 같은데.”
자작은 이피아가 농담이었다고 말하길 바라며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피아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저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서 전해지는 확신, 그리고 압박에 자작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졌다. 숨 막히는 분위기가 방 안을 짓눌렀다.
“……젠장.”
얼마간의 정적 후, 자작이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고개를 푹 떨궜다. 곧 그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자작은 이피아가 보아오던, 다정하고 선량한 얼굴이 아닌 비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작이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다른 손으로는 목을 갑갑하게 죈 크라바트를 풀어헤쳤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린 채 기묘한 광기가 서린 눈으로 이피아를 쏘아보았다.
“그거 아나? 나는 당신이 그렇게 나를 ‘천한 것’ 보듯 바라볼 때마다 진절머리가 나. 필요하니 사랑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만큼.”
“내가 언제…….”
“하긴, 당신은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 나처럼 천한 놈과는 다르게 뼛속까지 고귀한 아가씨이시니.”
이피아의 말을 가로막고 빈정거린 자작이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고대하던, 이피아의 죽음이 머지않은 지금. 어차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그는 거리낌 없이 제 본색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자작이 이피아의 머리 옆으로 손을 뻗어 침대 헤드를 짚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도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 약을 먹든 먹지 않든, 당신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
“홀로 남겨질 아이에 대한 걱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죽을 때까지 얌전히 지내다 가. 그러면 적어도 그때까지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노릇 얼마든지 해 줄 테니까.”
이불을 움켜쥔 이피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토미는 저도 모르게 살기를 품었다.
<저 미친 새끼가, 뭐?>
분노가 극에 달해 살의로 바뀌었다. 그 기운이 어찌나 흉흉한지 자작이 흠칫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유령을 볼 수는 없지만 그 살기는 느낀 것이었다.
자작은 끝내 토미의 살기가 두려웠는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어. 다음부터는 이런 대화를 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아이를 위해서라도 무슨 선택을 해야 할지는 알 거라고 믿지.”
쾅!
자작은 말을 맺고 도망치듯 방문을 닫아 버렸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방은 침묵에 젖어 있었다.
“……토미, 거기 있지?”
내내 다물려 있던 이피아의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그녀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유령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테레지아를 통해 토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응. 여기 있어.>
토미 또한 이피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피아가 설핏 웃으며 또렷한 음성을 흘렸다.
“라이를…… 아니, 저 사람을 해코지하지 마.”
<그렇지만!>
“네가 자칫해서 악령이라도 되면, 그러면 테리는 정말 혼자가 되는 거잖아. 그건 막아야지.”
소리치려던 토미는 제 반응을 다 예상한다는 듯 덧붙이는 이피아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피아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유령으로 떠도는 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련이 많은 이들은 망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는 하나 결국 확률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피아가 설령 운 좋게 망령이 될 수 있다 한들, 테레지아를 보살필 수 있는 ‘산 사람’은 결국 자작이 유일했다.
토미는 무력감에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이피아는 보는 사람이 슬퍼질 만큼 아름답게 미소하며 인사를 건넸다.
“염치없지만, 테리를 잘 부탁해.”
<윽…….>
토미는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는 가까스로 눈물을 흘리지 않고, 힘주어 말을 뱉었다.
<내가…… 내가 꼭 지켜 줄게.>
“…….”
<테리만큼은, 어떻게든 내가 꼭…… 무사할 수 있게 지킬게.>
분명 그들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온전히 전해진 것처럼, 이피아가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토미.”
* * *
테레지아는 이피아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부터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아이가 간신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는 자작이 장례식 절차를 마무리하고 출장을 나간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아, 빠…….”
테레지아는 아직 열이 다 가시지 않은 몸으로 비척비척 바깥으로 나왔다.
도저히 혼자서 이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저를 안아 줄 품이 간절했다.
“……아오셨습니까, 주인님.”
때마침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레지아는 양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다가, 1층에 길게 늘어진 세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아, 마침 왔군.”
자작이 테레지아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곁에는 낯선 여자, 그리고 저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듯 보이는 남아 한 명이 서 있었다.
이어진 말이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하게 테레지아의 귓가에 박혀 들었다.
“테레지아 오블렌. 이쪽은 오늘부터 네 어머니가 될 카를로타다. 이쪽은 네 이복 오빠인 로렌스고. 함부로 대했다가는 크게 혼이 날 줄 알아.”
“무슨…….”
문득 입을 열던 테레지아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변화하는 표정에 따라,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해석되기 시작했다.
테레지아는 그날부터 단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