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2. Nostalgia
“……이번에도 꼭 가야 하는 일이야?”
“음?”
라이 아로이즈, 이제는 라이 오블렌 자작이 된 사내는 떠날 채비를 서두르다가 귓가를 파고든 고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심 가득한 얼굴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은빛이 섞인 옅은 백금발, 호수와 바다를 반씩 섞어 둔 듯한 청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아직 사방이 시끄러운데, 당신이 자꾸 오래 바깥에 있으니까 걱정된단 말이야. 게다가 최근 몸 상태가 안 좋기도 하고…… 곧 테리 생일이기도 한데…….”
말이 이어질수록 이피아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녀는 제 말이 근본 없는 투정같이 들릴까 봐 염려스러운 마음에 남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10년에 걸친 크렘위든 제국의 정복 전쟁이 끝나고, 에버딘 공작가가 칩거를 시작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끝을 선언한 것은 황제라지만, 그 전쟁을 이끈 것은 명실공히 에버딘 공작과 그 휘하의 기사단이었다.
그런 그들이 저주로 인해, 전쟁의 후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칩거에 들어가 버려 제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에버딘 공작이 저주로 인해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소식을 접한 망국의 귀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이피아는 그런 상황에 사업을 이유로 자꾸만 바깥을 전전하는 자작이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최근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남편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 어렵사리 말을 꺼내 본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왜 자꾸만 집을 비우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이피아의 고개가 미안함으로 떨구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오블렌 자작이 한숨을 내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피아, 알잖아. 내가 당신과 결혼하며 가져온 지참금으로는 장인어른이 졌던 빚의 2할 정도밖에 해결하지 못했다는 걸.”
“…….”
“물론 장인어른께서 영지민들을 살피느라 그러셨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나에게는 가족이 더 중요해.”
“……응.”
이피아는 자작의 말에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녀는 영지민들을 위해 가산을 내다 파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아버지를 존경했으나, 한편으로 정작 제 가족은 안중에도 없었던 그를 향한 원망도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내 가족이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스스로의 생각에 죄책감과 혼란을 느끼던 이피아를 위로해 준 게 라이였다. 그랬기에 그가 평민임에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린 것이 아니던가.
이피아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자작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게 다 당신과 테리랑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일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래도 이번엔 테리 생일에 늦지 않게 돌아와 보도록 할게.”
“약속했어.”
이피아는 샐쭉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나 자작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자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오르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때 이피아의 뒤에서 불퉁한 음성이 들려왔다.
“흥, 아빠는 거짓말쟁이. 저번에도 약속해 놓고 생일 다음 날에나 왔으면서.”
이피아와 자작이 고개를 돌렸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이피아의 치맛자락에 찰싹 달라붙어 얼굴을 반만 드러내고 으르릉대는 조그마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자작이 웃음과 신음이 반쯤 섞인 부름을 내뱉었다.
“테리…….”
“이번에도 늦으면 나 진짜 화낼 거야. 작년처럼 선물로 무마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올해는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난! 이제 곧! 무려 다섯 살이니까!
테레지아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자작과 이피아가 나란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알았다. 무마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자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약속했다. 그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의아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테리는 나이치고 말이 참 빨리 느는 것 같아. 당신이랑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가?”
“……아이가 똑똑해서 그렇지, 뭐.”
“하긴. 그럼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오블렌 자작은 이피아를 한번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결국 크게 웃어 버렸다.
테레지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술을 비죽이고 있었는데, 와중에도 포옹은 포기할 수 없었는지 양팔만 자작 쪽으로 새침하게 벌린 상태였다. 참으로 앙큼한 모양새가 아닐 수 없었다.
자작은 한참을 웃다가 씩씩대는 아이를 꼭 끌어 안아 주고 마차에 올랐다. 이피아와 손을 꼭 잡고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테레지아가 맞잡은 손을 당겼다.
“엄마, 엄마.”
“응?”
“……아빠 아직도 유령 무서워할까?”
그리 묻는 테레지아의 눈에서는 드물게도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 이피아의 얼굴이 찰나 흐려졌다.
‘유령? 그런 얘기 하지 마, 여보. 자작 부인씩이나 되어서 그런 미신을 믿는다고 하면 남들이 뭐라고 보겠어.’
테레지아가 유령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이피아는 남편에게 유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물었었고, 그는 코웃음을 치며 이상한 소리라고 단언했다.
이피아는 제 어머니가 소싯적 ‘모르티아 일족’이었으며, 우연히 바깥에 나왔다가 선대 자작을 사랑하게 되어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제국인은 유령을 믿지 않고, 소수 일족을 배척하니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 또한.
‘어머니께서 내게 그 이야기를 해 준 건…… 모계 혈통을 통해 이어지는 힘이니, 혹 아이가 일족의 능력을 타고났을 때를 염려하신 것이겠지.’
하여 이피아는 테레지아가 제 어머니로부터 모르티아 일족의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걸 곧장 알아챌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피아는 자작이 유령을 믿지 않는, 외려 경멸하는 사람임을 깨닫고는 아이를 위해 우선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테레지아는 ‘아빠가 유령을 무서워하니 우선은 네 능력을 감추자’라는 그녀의 변명을 선선히 믿어 주었다.
다만 종종 제 아빠에게 무언가 비밀을 만든다는 사실이 불편한 모양인지 이런 물음을 건네곤 했다.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던 이피아는 저를 보며 웃던 자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의보다 가족이 소중하다고 말해 주었던 그 남자라면. 잘 이야기해 보았을 때 생각을 바꾸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망설임 끝에 입술을 열었다.
“……이번 생일에 아빠 돌아오면 다시 물어볼까? 아직도 유령을 무서워하냐고.”
“웅!”
테레지아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 기쁨이 옮는 듯 이피아도 따라 웃으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몸을 돌렸다.
“그래, 들어가자. 엄마랑 생일파티 준비하다 보면 금방 시간이 지나갈 거야. 이번 파티는 어떻게 하고 싶어, 아가?”
“흐음. 일단 종이를 오려서 벽에 붙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모녀의 그림자가 땅 위로 길게 이어졌다.
* * *
이피아의 말대로 시간은 금세 흘렀다. 자작을 떠나보낼 때 흩날리던 단풍은 어느새 초겨울의 눈송이로 바뀌어 있었다.
자작가의 형편이 여전히 썩 좋지 않아 거창한 파티는 벌일 수가 없었다지만 가족끼리 조촐히 즐길 생일파티를 준비하기에 부족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피아와 테레지아는 손수 재료를 사다가 파티 장식을 만들며 자작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날이 추워지며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진 이피아가 쓰러졌다.
“엄마, 엄마…….”
단순히 ‘아프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이피아는 심하게 앓았다. 안주인이 매일 밤 고비를 넘기는 일이 반복되자 저택 전체에 암울한 분위기가 드리웠다.
테레지아는 매일 이피아의 침대 곁에 앉아 울다가 지쳐 까무룩 잠드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깨어났을 때는 집사를 붙들고 물었다.
“집사, 아빠는? 아빠 언제 와?”
“우선 연락을 보내 두긴 했습니다만, 길이 엇갈린 것인지 도통 답이 오질 않아서…….”
하지만 집사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았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주인님께 연락을 취하긴 했으나 아직 답이 없다’라는 말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테레지아는 이피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절박하게 자작을 기다렸다.
<야, 이러다가 진짜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너까지 환자가 될 셈이야?>
늦은 밤. 1층 중앙 홀과 연결되는 계단에 숄 하나만 두른 채 앉아 꾸벅꾸벅 조는 테레지아를 향해 토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초겨울이라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 테레지아 같은 어린아이가 숄 하나만 달랑 걸치고 차디찬 계단에 앉아 있을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졸음이 점점이 묻어나는 눈을 한 채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걸려…… 헷츄.”
<안 걸리긴 개뿔. 들어가라니까?>
토미가 재차 독촉했으나 테레지아는 완강했다. 그렇게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문이 작게 끽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그 틈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잠이 확 달아난 테레지아가 숄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