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그쪽 호수도 아니거든! 강 쪽이라고!”
제론은 발레리안의 뒤를 쫓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뒤를 힐끔 일별하고는 오히려 속도를 높여 그로부터 멀어졌다.
사람이 많아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들었음에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 ‘익숙해졌다’라는 말로 애써 덮어 두었던 짜증이 폭발했다.
‘아, 진짜……!’
제론은 이를 악물고 집요하게 발레리안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어느새 호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널찍한 강 한복판을 내달리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다리를 움직이고 있음에도 발레리안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야! 넌 대체 내가 왜 싫-”
숨을 헐떡이던 제론이 한탄하듯 입을 여는 순간, 거침없이 달려 나가던 발레리안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휙 뒤돌아서는 그의 금빛 눈은 평소와 달리 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내내 닫혀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꺼져.”
“싫은…… 무, 뭐?”
제론은 놀라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발레리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는 것도, 그렇게 내뱉은 첫마디가 욕설에 가깝다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조금 전까지 느끼던 짜증과 분노도 모조리 증발했다. 제론은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바보 같은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그사이, 발레리안은 그동안 꾹꾹 참아 놓은 분노를 터트렸다.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어조와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렇게 피해 다닌 걸로는 부족했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왜 자꾸 쫓아와서 귀찮게 구는 건데……!”
발레리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치고는 이를 악물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것이 언뜻 보면 분노에 잠식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영악하고, 영리했다. 그건 곧 타인의 기분과 속을 읽어 내는 데도 어느 정도 능숙하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지금 발레리안이 보이는 분노가 온전히 제 탓이 아니라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오히려 발레리안의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은데.’
잠시 호흡과 표정을 가다듬은 제론이 이윽고 선선히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 자세를 취했다.
“그래, 내가 귀찮게 한 건 인정할게. 미안.”
“…….”
제론이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사과할 줄 몰랐는지, 발레리안이 움찔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의 사과로 인해 이성이 어느 정도 돌아온 모양이었다.
제론은 그 틈을 타서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꺼지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대체 왜 에버딘 공작님한테까지 벽을 치는 거냐? 나는 그렇다 치고, 그분은 네 아버지이신 데다가 좋은 분이잖아.”
물론 친자식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로 지내야 할 텐데.
제론은 입속으로 뒷말을 삼키고 발레리안의 답을 기다렸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발레리안의 입이 마침내 벌어졌다. 언뜻 속삭임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입술 새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안 돼.”
“뭐?”
“좋은 분이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나 같은 놈을 아들로 두시면 안 돼.”
제론은 순간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양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입술을 앙다문 발레리안의 얼굴을 보자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론이 당혹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빠지직.
그 순간, 발레리안의 발밑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찰나 굳어졌던 두 소년이 시선을 휙 내렸다.
“……!”
그들이 얼음에 거미줄처럼 난 금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위태롭게 버티던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며 발레리안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풍덩-!
“발레리안!”
제론이 경악해 외쳤다. 제론은 발레리안보다 체력과 속도 모두 부족해, 그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 있었기에 얄궂게도 무사했다.
제론은 얼굴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발레리안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호수 쪽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이 빠졌어요! 누구 없냐고요!”
나름 한 목청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건만. 애석하게도 거리가 거리인지라 제론의 목소리는 호수에 다다르기 전에 흩어져 버렸다. 몇 번 더 외쳐 봐도 호수 쪽은 잠잠하기만 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제론은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에서 발견한, 그나마 두껍고 긴 나뭇가지를 들고 돌아와 얼음 위로 몸을 낮췄다. 그가 나뭇가지의 반대쪽 끝을 발레리안에게 내밀며 외쳤다.
“이, 이거라도 잡아! 빨리!”
반사적으로 그것을 쥐기 위해 손을 뻗던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이를 악물더니 제론이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뿌리치며 강 저편으로 날려 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제론이 화가 나 외쳤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발버둥 치던 것도 멈추고 담담히 눈꺼풀을 닫았다. 그 모습이 외려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섬뜩하도록 시린 빛깔의 물속으로 가라앉는 발레리안을 보던 제론이 결국 입 안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스케이트와 외투를 엉망으로 벗어던진 그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체격 차이 때문에 쉽지는 않았지만, 제론은 우여곡절 끝에 발레리안의 멱살을 잡아 그를 얼음 위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콜록! 콜록, 커흑, 콜록!”
“커헉, 으……!”
제론은 발레리안을 안전한 얼음 위에 팽개쳐 두고 거칠게 물을 토해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던 중 몸이 어딘가로 휙 끌려가는가 싶더니 얼굴에 강한 충격이 일었다.
뻐억!
“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짤막한 신음을 내뱉는 제론의 멱살을 쥔 발레리안이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너야말로 무슨 짓이냐! 기껏 구해 온 구명줄을 왜……!”
“그럴 필요 없다는, 내버려 두라는 뜻이잖아! 이 멍청이가……!”
발레리안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격앙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흐려지지 않은 자존심을 공격당한 제론이 울컥해 외쳤다.
“누구보고 멍청이래! 나 천재거든! 그 정도는 당연히 알거든! 그런데 그렇다고 진짜로 내버려 두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 미친놈아!”
“나는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고!”
발레리안은 끝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가장 뱉고 싶지 않았던 말을 토해냈다. 그러나 제론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마주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
“……!”
그 순간 발레리안의 얼굴에 얼빠진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내내 나이답지 않게 무겁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제 나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며, 제론은 제 멱살을 쥔 발레리안의 손을 쳐 내고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제론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푹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버럭 외쳤다.
“에이, 씨. 야! 뭔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방금 너 살려 줬으니까, 맘대로 죽지 마! 알았냐! 난 누구 죽는 거 싫단 말이야!”
“……뭐 그런 억지가.”
“아, 내 맘이야! 구해진 놈은 조용히 해.”
“…….”
발레리안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제론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제론과 언쟁을 해 봤자 자신만 피곤해진다는 걸 깨달은 모습이었다.
제론은 발레리안이 입을 다물자 만족스럽다는 듯 콧방귀를 흥 끼고는 양팔로 상체를 감싸 안았다.
“어우, 기껏 얼어 죽지 않게 됐다고 좋아했더니 이러다가 폐렴으로 죽겠네. 돌아가…… 아야.”
벗어 던졌던 스케이트를 찾아 몸을 돌리던 제론이 얼음 위로 철퍼덕 넘어졌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발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아무래도 발레리안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치느라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부축해 달라고 하면 안 해 주겠지?’
제론이 진지하게 호수까지 기어가면 너무 모양새가 빠지나, 고민하는 사이. 작게 혀를 찬 발레리안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귀찮은 녀석.”
“뭐? 너 지금 은인한테 말 다 했냐?”
두 사람은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투덕거리며 간신히 호숫가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아 슬슬 사람을 풀려던 후작과 공작이 경악했다.
“제론!”
“리안!”
후작과 공작이 기겁하며 달려와 아이들을 살폈다. 후작이 마차 쪽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빨리 수건이랑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라, 빨리!”
“너희 대체 이게 무슨……!”
공작은 너무 놀란 탓에 제대로 추궁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제론이 발레리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치고는 투덜댔다.
“얘가 멍청하게 제대로 얼지도 않은 데까지 뒤도 안 보고 달리는 바람에 제가 구해 줬죠.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안 한다, 너?”
“…….”
“방금까지 말 잘하던 놈이 꼭 이럴 때만 입을 다무…… 아악!”
“시끄러워.”
“이 미친놈이? 너 방금 일부러 다친 발목 찼지?”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잠잠했던 것도 잠시. 발레리안과 제론은 금세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후작과 공작은 표범과 여우처럼 왁왁 대는 자식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작이 한참의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 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졌느냐?”
그 말에 제론과 발레리안이 동시에 정색했다.
“제가요?”
“얘랑…… 말입니까?”
“아닌데요. 친하긴 무슨.”
“잘못 보셨습니다.”
공작과 후작은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 자식에게 ‘진짜’ 친구가 생긴 모양이라고.
* * *
“야, 리안! 이 몸이 오셨…… 악!”
“노크하랬잖아, 멍청아.”
“미, 미, 미친놈이? 그렇다고 진짜 걷어차냐? 악! 두 번 찼어!”
이후 제론은 꽤 자주 에버딘 저택을 찾았고, 그때마다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바람에 발레리안에게 걷어차였다. 하지만 끝내 방문을 거부당하지는 않았다.
발레리안이 에버딘 공작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