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20) (120/124)

<120화>

1부 외전

1. 표범과 여우

덜컹-

입김이 나오는 즉시 얼어붙을 만큼 시린 동부의 겨울. 아메트리스 후작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새하얀 설경 속을 가로질렀다.

8살의 제론 아메트리스는 아버지와 마차 안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한 다리를 달랑거리며 아버지를 향해 조잘거렸다.

“그래서 아버지, 갑자기 에버딘 저택에는 왜 가는 거예요?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에버딘은 겨울만 되면 너무 추워서 싫다고 그러셨잖아요.”

그 말에 창밖을 응시하던 후작이 제론을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제론.”

“네?”

“에버딘가에 후계자가 생겼다.”

“……네?”

제론은 순간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공작님이 재취를……?”

현 에버딘 공작은 일찍이 사랑하던 부인을 잃은 후 지금까지 홀로 지내고 있었다.

많은 이가 비어 버린 공작 부인의 자리를 탐냈으나, 죽은 아내를 위해 영영 수절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후계자라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서야.

제론이 얼떨떨하게 뱉은 물음에 후작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붉은 눈을 한 바퀴 굴린 제론이 질문을 바꿨다.

“그럼 방계를 입양한 건가요?”

“아니. 그 아이는…… 작고하신 공작 부인의 사생아다. 그러니 직계라고 봐야겠지.”

“…….”

8살이라는 어린 나이이지만, 제론은 영리하고 영악하기로는 이미 여러 선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는 순간 제 아비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붉은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거짓말이신가 보네.’

아메트리스 후작 역시 제론의 똑똑함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였다.

하여 평소에는 후작 부인에게 등판을 맞아 가면서도 아들에게 가감 없이 대부분의 이야기를 전해 주곤 했는데, 그런 그가 거짓을 말한다는 건.

‘흠, 금언령인가.’

제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찾아냈다. 아무래도 그 ‘후계자’의 일에 높으신 분들이 꽤 많이 연관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후작의 눈이 ‘알았어도 알았다고 드러내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아비의 뜻에 따라 순순히 의문을 지우고 활짝 웃어 보였다.

“잘됐네요! 몇 살이래요? 아, 굳이 저까지 데려가시는 걸 보면…….”

“그래, 너랑 동갑이다. 굳이 너를 데려가는 것도, 그 아이가 영 저택에 적응을 못 하고 있다고 해서야. 아이가 긴장을 늦추게 네가 좀 도와주거라.”

“에헴, 저만 믿으세요. 아버지도 제 사교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시잖아요.”

“그래, 그래.”

제론이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심 가득하던 후작의 얼굴이 아들의 재롱으로 잠시나마 활짝 펴졌다.

화기애애한 마무리를 거치자 정적이 조금 가벼워졌다. 제론은 웃는 얼굴 뒤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에버딘 공작가의 후계자라면 뭐, 좋은 인상을 심어 놔서 나쁠 건 없으니까.’

후작에게 한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실제로 제론은 서글서글한 성격, 영리함, 또래 중에서 나름 손꼽히는 미모를 지닌 덕에 인기가 아주 좋았다.

어린애 하나를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다,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태평하게 벽에 등을 기댔다.

* * *

“어서 오게, 후작. 쉬운 길은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와 줘서 정말 고맙네.”

“저희 사이에 낯간지럽게 무슨. 장작이나 많이 때 주십시오.”

에버딘 공작과 아메트리스 후작이 만담을 나누며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고 등을 퍽퍽 두드렸다. 인접한 영지의 후계자로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내 왔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 이쪽은 내 후계자라네. 마침 제론과 동갑이니 잘 지낼 수 있다면 좋겠군.”

후작과 포옹을 푼 공작이 옆으로 한 발 비켜섰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 얌전히 서 있던 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주위의 흰 눈과 대비되어서인지 새카만 흑색 머리카락이 유달리 눈에 띄는 아이였다.

내내 땅바닥을 향하고 있던 눈이 공작의 소개에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제론은 아이의 금빛 눈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흑표범?’

제국 내에 금빛 눈을 지닌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아이처럼 ‘맹수’가 연상되는 눈을 지닌 이는 처음이었다.

‘……짜식, 키 크네.’

분명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아이는 제론보다 머리가 하나 정도 컸다. 귀하게 자란 사람처럼 피부도 깨끗하고 자세도 곧았다. 메마른 눈빛만 제외하면 여느 귀족가의 도련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정말 도련님이었나?’

아비의 말로 미루어 짐작해, 에버딘의 후계자가 잔뜩 주눅 든 조그만 꼬맹이리라 멋대로 예상하던 것이 깨져서일까.

제론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생글생글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제론 아메트리스입니다. 그쪽 이름은 뭐예요?”

잠시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제론을 응시하던 아이가 이윽고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리며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대답하기 싫다는 태도였다.

그에 두 사람을 주시하던 에버딘 공작이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그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아무래도 처음으로 외부인을 만나는 자리라 긴장했나 보군. 아이의 이름은 발레리안 에버딘이란다. 우선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갈까? 후작의 안색을 보니 당장 따듯한 수프라도 대접해야겠어.”

“좋습니다.”

후작이 재빨리 맞장구쳤다. 어른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푸는 사이, 발레리안은 슬쩍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제론의 입이 벌어졌다.

‘나 지금 무시당한 거……?’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먼저 나서서 호의를 보인 이 중에 저런 반응을 내비친 사람은 없었다.

‘그런 꼬맹이쯤이야’ 하고 태평하게 굴던 제론의 알량한 자존심에 금이 갔다. 그는 멀어지는 발레리안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이미 아버지에게 아이 하나 구슬리는 것쯤은 쉽다고 큰소리를 쳐 놓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상냥하니 질책하지는 않겠지만, 이건 제론의 자존심 문제였다.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아?’

제론은 어떻게든 저 건방진 놈을 친구로 만들리라 다짐했다.

* * *

“소공작!”

“소공……!”

“소……!”

“아, 좀 나와 보라고요!”

하지만 제론의 다짐은 며칠이 지나도 실천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얼굴을 봐야 친해지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발레리안은 식사 시간에조차 뜸하게 얼굴을 드러냈으며, 이외의 시간에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제론을 피하는 것인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론은 결국 여유롭던 태도까지 내려놓고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후원을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씨이, 분명 이쪽으로 나가는 거 봤는데. 그새 다른 데로 도망갔나?”

제론이 씩씩거리다가 지쳐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에버딘 공작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반가운 미소를 띠며 제론을 향해 다가왔다.

“여기 있었구나. 네 아버지와 얘기하다가 다 같이 스케이트라도 타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떠니?”

“스케이트라면 좋아요. 그런데 자제분께서 사라져서 보이지 않습니다만.”

제론이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공작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후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음? 조금 전에 이쪽으로 나가지 않았던가? 리안! 들리면 나와 보거라!”

제론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렇게 시끄럽게 불러 댔는데도 대답하지 않았던 걸 보면, 발레리안이 여기 있을 리가 없는…….

파사삭-

그때 후원의 나무 한 그루가 크게 흔들리더니 발레리안이 마지못한 얼굴로 땅으로 뛰어내렸다. 제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발레리안은 머리카락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내며 어색하게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다정히 웃으며 말을 붙였다.

“리안, 손님들과 다 같이 스케이트를 타러 갈까 하는데. 함께 가겠니?”

“…….”

발레리안은 소리 내어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망설이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반응만으로도 공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에버딘 저택에 온 이후로 말 한마디를 안 해서 공작님께서도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더니.’

제론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내내 어색하게 굴던 아이가 조금이나마 내보인 긍정의 반응에 기뻐하는 공작 앞에서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그 모습을 보자 내내 ‘어떻게든 저놈에게 친구 하자는 말을 받아 내겠다’라는 오기에 밀려나 있던 의문이 비로소 떠올랐다.

저 아이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자신이 부모님 다음으로 존경할 만큼 따스한 인품을 지닌 에버딘 공작에게도 저렇게 벽을 치는 것인지.

‘……아휴, 내가 알아 봤자 뭐 할 거야.’

하지만 제론은 곧 의문을 꾹 밟아 넣었다.

금언령도 그렇고, 어차피 알아 봤자 귀찮아지기만 할 것이다. 그는 상처 난 자존심의 회복을 원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발레리안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제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근처의 호수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 *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에버딘 저택에서 지내는 며칠 내내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제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쾌함을 털어 낼 수 있었다.

마차 밖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희고 푸른 숲 사이의 꽝꽝 언 호수 때문에 마음이 들뜬 덕도 있었다.

에버딘 영지는 유달리 추운 기후로 인해 살기에 마냥 편한 곳은 아니나, 그만큼 스케이트나 썰매처럼 다른 지역에서는 쉬이 할 수 없는 활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공작이 안내한 호수는 숲을 가로지르는 강과 연결된 곳이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웃으며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음. 역시 친해지는 데는 야외 활동만 한 게 없지!’

어느 정도 자존감을 회복한 제론이 스케이트 끈을 손에 쥐고 발레리안을 찾았다.

에버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이거 신는 법은 알…… 야!”

그러나 발레리안은 알아서 스케이트를 척척 신더니 제론을 무시하고 쌩하니 저편으로 가 버렸다. 욱한 제론이 뒤따라 스케이트를 신고 그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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