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하여 이후 아이가 어설프게 굴 때마다 애써 못 본 척 넘어갔다.
아무리 영리하다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테레지아는 종종 안경을 쓰지 않은 사용인들과도 무의식중에 눈을 맞추었고, 사용인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발레리안 밑에서 일하는 이들답게, 그가 별다른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테레지아의 비밀을 기꺼이 모른 척해 주었다. 그리고 그처럼 기다렸다.
‘……언제쯤 말해 주려나.’
그러나 테레지아는 끝끝내 마음을 열지도, 기대려 하지도 않았다.
더 정확히는 기대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어른에게 기대는 법을 잊어버린 아이처럼.
그런 테레지아가 가여워서, 그리고 아이가 홀로 서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고 믿게 만들고 끝내 벼랑까지 몰아간 모든 이가 사무치게 원망스러워서.
그래서 발레리안은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 * *
뭐, 뭐야!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댁이 울어요?!
공작의 눈에서 갑자기, 정말이지 갑자기 둑이 터지듯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다가 공작을 달래야 할지, 아니면 그를 두고 휴지를 가져와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때 공작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가 반은 일그러진, 반은 웃는 듯 서러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원래는 네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
“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져서.”
그렇게 말한 공작이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그의 품에 완전히 파묻혔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끔벅였다. 귓가로 눈물 섞인 더운 숨과 말이 흩어졌다.
“테리, 제발.”
“…….”
“혼자 애쓰지 마.”
혼자 애쓴 적…… 없는데.
그렇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입술을 달싹였으나 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공작이 숫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치지 않을게. 속이지도 않을 거야.”
“…….”
“기대도 괜찮아. 네가 너를 지키지 않아도 널 지켜 주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러니까 이제 조금만…….”
“…….”
“아주 조금만 네 짐을 나눠 주면 안 될까.”
나한테 짐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던가.
이 정도면 충분히 행운인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엄마를 너무 빨리 잃긴 했지만, 그래도 유령들 덕에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주저앉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거지?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이렇게까지 말문이 막힌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오블렌 자작이 처음 카를로타와 로렌스를 내 앞에 데려온 날에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이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아니, 저는…… 이미 충분히 기대고 있었…….”
그러나 그 순간, 불현듯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당황해 눈을 깜박이는데 눈물이 툭 흐르는 바람에 다급하게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공작의 말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냥 이 사람 어깨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으…….”
하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코가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은 계속해서 몸집을 불릴 뿐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허어엉, 흐, 허어어엉.”
결국 나는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도 모른 채 공작의 목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나조차 모르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양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거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엄마, 엄마…….’
‘나 무서워…….’
그제야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걸 깨달은 순간 한없이 서러워졌다.
‘이쪽은 오늘부터 네 어머니가 될 카를로타다. 이쪽은 네 이복 오빠인 로렌스고. 함부로 대했다가는 크게 혼이 날 줄 알아.’
사실은 무서웠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나는 너무도 작고 힘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고, 나 좀 숨겨 달라고 꼴사납게 매달리고 싶었다.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러지 않았던 것은 어차피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뻗어 봤자 잡아 줄 사람이 없으니까.
울어 봤자 들어 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살아왔다. 손을 뻗었을 때 아무도 잡아 주지 않으면 정말 주저앉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냥 손을 뻗지 않고 버티는 걸 택했다.
‘혼자 애쓰지 마.’
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고.
씩씩하지 않아도 살고 싶었고.
그냥 다 내려놓고 안겨서 울고도 싶었다.
“괜찮아, 테리. 괜찮아…….”
우느라 말 한마디 하지 못했음에도 공작은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 온기와 안정감에 눈물이 더 거세게 쏟아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 * *
“헉……!”
하데스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순간.
찰나 머리가 아찔해지는 감각에 릭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기에 눈을 떴다고 해서 당장 큰 차이는 없었다.
릭은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눈을 깜박이다가, 생소한 감각과 함께 물밀 듯 밀려 들어오는 기억에 그대로 굳어졌다.
‘아.’
그토록 염원하던 인간의 몸을, 기억을 되찾았으나 그는 차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외려 암담한 심정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내가 인간이 되고 싶었던 건, 반쯤은 당신 옆에 당당히 서기 위해서였는데.’
하필이면 ‘클라센’이라니.
정말이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수 있는 걸까.
“……형?”
그때 지척에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릭이 시선을 옆으로 움직이자 눈을 크게 뜬 채 굳어진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혀, 형아? 일어…… 난 거야?”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점차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낯설면서도 한없이 익숙한 그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릭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반.”
“형……!”
그 부름에 비로소 혈육이 깨어났음을 받아들인 아이반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이반은 당장에라도 릭에게 안기려는 것처럼 달려들다가, 최소한의 이성을 부여잡고 방을 뛰쳐나가며 외쳤다.
“지, 집사! 아버지, 어머니! 거기 아무도 없어요? 형이 깨어났어요!”
아이반의 외침으로 인해 고요 속에 잠겨 있던 저택 곳곳에서 소란이 번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바깥에 귀를 기울이던 릭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시야 한구석에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빛의 정체는 방 한쪽에 놓여 있던 거울에 흐리게 반사된 달빛이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릭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나지막이 실소했다.
“……빌어먹을 하데스.”
새하얗고 가지런한 은색 머리카락, 보랏빛 눈, 단정한 생김새까지.
모두 건국제에서 테레지아와 춤을 췄을 때와 얄미울 만큼 똑같은 모습이었다.
* * *
나는 공작에게 안겨 펑펑 운 다음 날부터 며칠 동안 쭉 잠만 잤다.
나조차도 모르게 쌓이던 감정이 터진 후유증 때문이기도 했고, 주치의가 강력하게 휴식을 주장하며 약을 왕창 쓴 탓도 있었다.
내내 약에 취해 비몽사몽 하다가, 중간에 잠깐 잠에서 깨었을 때 공작에게 상처에 관해서 물어봤다. 분명 악령 때문에 손쓸 도리가 없이 큰 상처를 입었는데, 흉터조차 없다는 게 이상해서.
하지만 공작과 에버딘 사람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너와 내 외상은 그날 밤이 지나자 모조리 나아 있더구나.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내 상처가 너무도 심각해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다며 모두가 절망하던 밤.
공작을 포함한 에버딘 사람 전체가 어느 순간 동시에 잠에 빠져들었고, 눈을 뜨자마자 사색이 되어 나를 살폈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 흉 하나 없이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고.
‘그러니까 저희가! 말씀! 드렸잖습니까! 거짓말이 아니라니까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건국제 때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잠들어 나를 놓쳤던 일이 떠올랐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억울하다며 공작에게 징징거렸다.
공작은 악령의 기운 때문에 목이 졸리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일을 직접 겪어 본 덕인지 그들의 억울함을 묵묵히 들어…… 주지는 않았고. 좀 들어 주다가 다시 훈련 시키러 갔다더라.
아무튼 외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씻은 듯 나았고, 며칠 내내 잠을 자고 푹 쉬었더니 주치의가 걱정하던 후유증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움직이셔도 됩니다.”
그렇게 약 일주일 후. 몇 시간 동안이나 진찰을 이어 가던 주치의의 입에서 마침내 완치 판정이 떨어졌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공작과 미나가 당황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테리?”
“아가씨, 어디 가세요?”
“잠깐만요! 찾을 유령들이 있어서요!”
이제 깃펜이나 종이 없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생소한 동시에 후련했다. 그렇게 소리쳐 대답해 주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침대 신세를 지던 기간 동안, 셀레나와 릭을 비롯한 에버딘 저택의 유령들은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오래 잠들어 있긴 했지만, 중간중간 약을 먹으러 깨어날 때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