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 *
-테리.
온몸이 따듯한 물에 잠긴 듯 몽롱한 가운데.
누군가 익숙하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엄마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엄마 목소리야.
만족스러움에 입술 새로 골골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엄마가 설핏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일어나야지, 아가.
잉, 싫은데…….
-충분히 잤잖니.
그래도 엄마 목소리 엄청 오랜만에 듣는 건데, 조금만 더 이대로…….
‘……오랜만?’
무의식중에 칭얼거리다가 스스로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느끼고 멈칫했다.
……엄마 목소리를 듣는 게 왜 오랜만이지? 엄마는 늘 나랑 같이 있었는데.
머리를 굴려 보려 해도 온몸을 휘감은 노곤한 기운 때문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골몰하던 중 엄마가 내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런데 조금 전과 달리 손에 굳은살이라도 박인 것처럼 감촉이 거칠었다.
-테리.
엄마의 목소리 위로 낯선,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겹쳐졌다. 일순 머리가 지끈거려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목이 울리는 느낌.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온몸을 둘러싸고 있던 노곤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차이에 정신이 번쩍 들며 눈에 떠졌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두컴컴한 천장이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고개를 돌려 창 쪽을 확인했다.
‘달……. 밤인가?’
창문의 위치와 형태를 보니 내 방이 맞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막 몸을 일으키는데, 바싹 마른 나뭇잎 같은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테리?”
“흐익.”
방금까지는 인기척 하나 없었는데! 놀라 어깨가 파드득 튀어 올랐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익숙한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공작…… 헉?”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그를 부르는 순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맞다! 악령! 나 악령 막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이걸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속으로 내 멍청함을 한탄하며 공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고, 공작님? 괜찮으세요? 다친 데는……! 엥.”
악령이 공작의 목을 조르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의 목을 확인하던 중 나도 모르게 얼떨떨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상처가…… 없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의 목은 마치 처음부터 다친 적도 없었다는 듯 깨끗했다. 생채기 같은 것도 없고, 오히려 평소보다 말끔해 보이기까지.
‘맞다, 내 배!’
당황하다가 나 역시 악령에게 상처를 입었던 것이 기억나 손으로 배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어디 하나 걸리는 부분 없이 몰랑몰랑하고 매끄럽기만 했다.
이, 이게 뭐람. 유령을 보는 건 난데, 정작 내가 유령에 홀린 기분이었다.
‘헉. 설마 정신을 잃고 나서 시간이 오래 지난 건가? 그래서 상처가 다 나아 버린 건가?’
그제야 가까스로 합리적인 사고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져 문득 고개를 들었다.
“…….”
공작은 그동안 기이한 표정으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다정하고 단단하게만 보이던 눈이, 지금은 어째서인지 금이 간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죽을 뻔했다더구나.」
“……넹?”
뭐, 뭐야. 목소리 무서워.
공작의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낮은 편이었지만, 내게 말을 건넬 때면 늘 포근히 쌓인 눈 같은 느낌이었다. 에버딘 저택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부터 늘 그랬다.
하지만 지금 공작의 목소리는 꼭…… 무겁게 얼어붙은 동토의 땅 같아서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가끔 기사들을 대할 때나 보이던 위압감이 느껴졌다.
공작은 내가 악령을 상대했다는 걸 모를 테니까, 딱히 드러나게 잘못한 건……. 아, 아닌가? 있나?
‘……역시 밤에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다친 거 때문에 화났나?’
불안함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공작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우연인진 몰라도 그에게서 느껴지던, 숨이 막히는 위압감은 조금 줄어들었다. 하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무거웠다.
공작은 버석한 음성으로, 담담히 재차 읊조렸다.
「네가, 죽을 뻔했어.」
“…….”
「배를 관통당한 상처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 떨림이 파문처럼 번지기라도 한 것인지 마음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한차례 호흡을 고른 공작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테리.」
“……네, 네?”
「그 밤에,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니?」
“어…….”
큰일 났다. 아직 변명 생각 안 해 놨는데!
마음이 급해서 일단 저지르고 봤더니, 뒷수습이 문제였다.
생각해라, 테레지아 에버딘! 생각! 그 밤에 내가 공작의 침실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때 머릿속으로 그럴싸한 핑계 하나가 떠올랐다. 재빠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발랄하게 외쳤다.
“그, 그게. 밤에 잠이 안 와서! 곰돌이랑 같이 공작님 방에 찾아갔는데, 침대 밑에서 이상한 그림자 같은 게 꿈틀대길래……. 공작님을 깨우려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생각한 후로 기억이 없어요! 아하하.”
“…….”
“하, 하…….”
최선을 다해 웃어 보았으나 공작은 내 변명을 가만히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던 깃펜이 다시 그의 셔츠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흑, 화가 난 거면 차라리 소리를 질러 주시면 안 될까요. 차라리 그편이 익숙하고 덜 무서울 것 같은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웃고 있을 때였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공작이 입술을 달싹였다.
“테리.”
반사적으로 답하려다가 깃펜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입술을 합 말아 물었다.
대신 그가 뒤늦게라도 반지를 누르지 않았음을 깨닫길 바라며 다른 말들을 늘어놓았다.
“어…… 근데 왜 하나도 안 아픈 거죠? 상처도 없고. 저 쓰러진 후로 시간이 엄청 많이 흐른 거예요?”
“테리.”
그런데도 공작은 여전히 깃펜을 쓰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를 따름이었다. 결국 답답함에 약간의 의심을 감수할 생각으로 말을 건넸다.
“그, 저. 공작님?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깃펜…….”
하지만 직후 내뱉어진 그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게 없어도 알아들을 수 있잖니.”
“……!”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순간이지만 온몸의 피가 식어 내렸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공작의 시선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은 무언가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무수한 질문들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당장 내가 뱉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차마 공작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기가 버거워 고개를 떨구고 양손을 모아 쥐었다.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열어 말했다.
“죄, 죄송해요.”
“…….”
“계속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주를 풀어 드리고 나면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툭-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던 때,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추어 시트 위에 동그란 물 자국 같은 게 생겨났다.
천장에 구멍이라도 났나? 웬 빗방울? 그런 생각을 하며 의아하게 고개를 드는데 눈이 굴러떨어질 뻔했다.
“고, 공작님? 우세요!?”
* * *
‘……테리?’
발레리안이 테레지아의 요청으로 5년 만에 아메트리스 후작저에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아직 에버딘 저택에도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을 테레지아가 또다시 낯선 곳에서 불안에 떨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직전, 조심조심 아이의 방을 찾아가 보았으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해 이불을 젖혀 보니 곰 인형이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굴러갈 뿐이었다.
아이가 사라졌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발레리안은 미친 듯 저택을 뛰어다니며 아이를 찾았다. 그 소란에 후작도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작과 기사들이 수색하는 것보다 발레리안이 발로 뛰는 것이 빨랐다. 그는 인간이라고 보기 어려울 속도로 저택을 뒤지고 다녔고, 마침내 후작의 어린 아들 제르비스 아메트리스의 방에까지 이르렀다.
다른 곳에서 찾지 못했고, 저택을 빠져나간 흔적은 없다고 했으니 남은 건 여기뿐이었다. 발레리안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막 문고리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야, 그치? 살아 있는 사람이 유령을 본다니 말도 안 되지. 그런데 그거 알아?’
‘나는 너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어.’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소멸시킬 수도 있지. 영원히, 다시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방 안에서 자그맣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음성의 주인은 분명 얼마 전부터 그의 삶에 스며들어 오기 시작한 아이였으나 말뜻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령을…… 본다고?’
직후 뒤늦게 달려온 아메트리스 후작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당황한 얼굴의 테레지아가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본 발레리안은 깨달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묻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지만, 테레지아가 힐끔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걸 보고 있자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테레지아가 유령을 볼 수 있든, 없든, 그녀가 앞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테리, 방에 없어서 걱정했잖니.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래서 발레리안은 불안해하는 아이를 붙들고 캐묻는 대신, 잠자코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언젠가, 테레지아가 마음의 문을 열고, 스스로 유령을 본다는 사실을 말해 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