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 *
<이것 좀 풀어 달라니까요!>
테레지아를 말리다가 끝내 이불에 돌돌 말려 버린 릭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저택의 유령 전부가 테레지아를 따라가 버리는 탓에 그의 목소리는 텅 빈 방을 울릴 뿐이었다.
릭은 울컥하는 마음에 침대에 뒤통수를 쿵 박았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를 내리치고 싶었으나 팔이 묶여 도리가 없었으므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데……!’
에버딘 저택에는 조금 전부터 숨 막힐 만큼 짙은 악령의 기운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한데, 그는 고작 이 이불조차 마음대로 젖히지 못하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이미 십몇 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릭은 테레지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해서 버둥거렸다. 덕분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불은 조금씩이나마 느슨해졌다.
<됐다!>
긴 사투 끝에 릭은 자신을 짓누르던 이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다급한 몸짓으로 침대에서 뛰어내리려던 순간. 저택 전체에 깔려 있던 악령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릭은 놀라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만.>
<으아악!>
혼란스럽게 방문을 응시하던 릭은 부지불식간에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기겁하며 나동그라졌다.
그 바람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얼굴을 박았으나 곰 인형인지라 통증은 없었다.
릭이 고개를 들자 침대 위에 앉아 희한한 것을 보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하데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하…… 아니, 거지 유령? 지금 돌아온 겁니까?>
릭의 말에, 거지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던 하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런데 여기…… 유령의 기운이 왜 이렇게 줄어든 거지? 꼬맹이의 기운도 그렇고. 나 없는 동안 무리해서 성불시키기라도 한 건가?>
하데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릭은 전신의 피가 모조리 식어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테리.’
찰나 얼었던 릭이 곧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택에 악령이 들어왔습니다!>
<……뭐?>
<당신께서 자리를 비운 동안 악령이 저택 사람들을 습격하고 다녀서, 테리가 조금 전 자신이 막겠다고 갔는데……. 어째서인지 조금 전에 악령의 기운이 사라졌습니다. 확인해 봐야 해요.>
<제힘으로 악령을 막아? 뭐 그런 무모한 꼬맹이가……!>
하데스는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빛이 일며 릭과 하데스의 시야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직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굳어졌다.
“흐윽, 아가씨, 아가씨……!”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여기! 뜨거운 물을 더 가져와!”
하데스는 분명 ‘테레지아의 근처’로 자신과 릭을 이동시켰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광경 중 어떠한 것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맞물리지 않았다.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그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이게 무슨…….>
하데스와 릭이 도착한 곳은 에버딘 저택의 의무실이었다.
의무실 안에서는 사용인들이 쉰 목소리로 고함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용인들 사이로, 이 소란함 속에서 이질적으로 정적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몸 곳곳에 피가 배어난 붕대를 감고 있는 발레리안은 핏발이 선 눈으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제 앞에 놓인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침대에, 마치 잠든 듯한 모습의 테레지아가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침대 시트와 비슷할 정도로 창백했고, 복부에 감긴 붕대 틈으로 피가 스멀스멀 새어 나와 침대를 물들였다.
<……테리?>
릭은 무의식중에 숨을 멈추고 있다가, 실낱같은 부름을 흘렸다. 그의 목소리를 포함해 전신이 덜덜 떨려 왔다.
하데스는 유령이라 에버딘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릭은 인형이므로 그들의 눈에 보이는 상태였다.
하지만 에버딘 사람들은 하나같이 테레지아의 상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문간에 곰 인형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님, 우리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그때, 하데스와 릭의 근처로 미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찬장 쪽에서 정신없는 손길로 약재를 찾고 있던 주치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치의가 그녀의 물음에 멈칫했다. 그러고는 곧 어두운 얼굴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는 애초에 그리 튼튼한 몸이 아니셨지. 그런 상태에서 최근에 열병까지 앓으셨으니 회복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네, 미나.”
결국 미나는 이를 악물고 의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녀의 발에 차여 나동그라진 릭의 귓가에, 복도 저편에서부터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괜찮으냐?>
하데스가 릭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릭은 나동그라진 자세 그대로 미동도, 대답도 없었다.
하데스가 난처하게 눈썹을 구겼다.
‘……낭패로군.’
하데스가 자리를 비웠던 것은 ‘죽은 자들의 땅’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모르티아 일족을 학살한 에버딘 공작가의 몰락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망령들의 왕이었다. 죽은 자들의 땅을 찾아온 유령들을 관리해서 새로운 생을 찾아 주고, 맹세를 어긴 유령을 벌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지럽히는 유령이 있다면 사자(使者)들과 함께 처치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더는 안 됩니다. 당분간만이라도 돌아가셔야 합니다.>
하데스가 에버딘 저택에 머무는 동안, 그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쓰던 사자들이 끝내 두 손 두 발을 들며 그를 찾아왔다.
그들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하데스가 죽은 자들의 땅에 머물며 일을 할 때와, 에버딘 저택에서 머물며 일을 할 때의 효율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근 남부에서 웬 악령 하나가 날뛰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그들의 부담에 한몫했다.
악령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번번이 사자들의 눈을 피해 달아났다. 그 악령을 붙잡기 위해서는 하데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알았다. 돌아가지.>
하여 하데스는 잠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죽은 자들의 땅에서의 일을 처리하고, 남부로 떠나기 전 잠시 이곳에 들린 것이었다.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던 릭이 테레지아의 생일에 어떤 행동을 보였을지 궁금해서.
그런데, 정작 그가 찾던 악령이 노리던 것이 에버딘 공작이었을 줄이야.
<쯧.>
하데스는 소리 내어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불안감이 물처럼 스멀스멀 차올라 목을 죄었다.
<당신께서는…… 죽은 자들의 왕이라 하셨죠.>
<…….>
<테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데스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의 답이었다. 릭은 심장이 없음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테레지아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머리를, 몸을 지배했다. 그는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내기하죠, 저랑.>
<……내기?>
하데스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릭은 주먹을 꾹 말아쥐고,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또렷한 발음을 내려 애썼다.
<당신께서는 일전에 테리가 ‘저’를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 판을 키우죠.>
평소라면 그를 집어삼켰을 무력감조차 ‘테레지아를 살려야 한다’라는 절대적인 명제에 밀려 모조리 사라졌다.
말을 이을수록 오히려 떨림이 사라졌다. 기이한 고양감마저 찾아들었다. 릭은 홀린 듯 힘주어 목소리를 냈다.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죽은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살아 있는 제 ‘원래’ 몸으로.>
<…….>
<그럼 테리가 ‘저’라는 걸 모르는 채로도 다시 저를 사랑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하데스는 본래 ‘테리가 릭을 알아볼 수 있을지’가 궁금하여 잠시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테레지아의 목숨이라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안이 걸려 있었다.
자칫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사안이니, 하데스를 확실히 설득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단순히 ‘알아보기’만 하는 것보다 더한 흥미를 끌 대가가 필요할 터.
‘내가 테리를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테리가 인간인 나를 마음에 담고 있다는 걸 알고, 그걸 주시하는 것 같았으니…….’
이것이 릭이 생각해 낸, 가장 확실히 하데스를 내기에 응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었다.
<……흠.>
하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머릿속으로 잠시 릭의 제안을 가늠해보았다.
‘확실히…… 이런 내기라면 내가 개입해도 큰 문제는 없겠군.’
하데스는 ‘신’이었다.
하지만 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호하는 이인 만큼, 그 경계를 넘어 인세에 개입할 때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했다.
릭을 잠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을 때처럼 눈속임에 가까운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깊이, 크게 개입할수록 대가 역시 커진다.
하나의 영혼을 돌려주고, 다른 하나의 영혼을 심판대에 올린다면 얼추 균형이 맞았다. 그 김에 내내 거슬렸던, ‘릭’의 영혼에 관한 문제도 처리할 수 있을 테고.
‘……저 아이들의 관계는 이상할 정도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릭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들었다.
하데스는 긴 고민 끝에 한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달싹였다.
<……좋다.>
릭은 그 답에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담긴 탄식을 흘렸다. 하데스가 혼잣말하듯 작게 덧붙였다.
<어차피 네 영혼이 이곳에 있는 건 내게 수치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마침 잘됐다고 해야 할지.>
<예?>
<아니, 알 것 없다. 그래서 네가 이 내기의 대가로 바라는 건 뭐지?>
릭에게는 고민조차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그가 단호한 태도로 대꾸했다.
<테리를 살려 주십시오. 후유증 하나 남지 않게, 완벽히 낫게 해 주세요.>
<그것뿐이냐?>
<네.>
<좋아. 대신…….>
말꼬리를 흐린 하데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테레지아가 누운 쪽을 일별한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가 성인식을 치르고 1년 안에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지 못하면, 너는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죽는다.>
<…….>
<그래도 상관없느냐?>
완전한 죽음.
릭은 이미 산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임에도, 우습게도 하데스의 말을 듣자 일순 두려움에 말문이 막혔다.
‘네가 준 꽃다발은 내 인생 최고의 생일 축하 선물이었어. 고마워, 릭.’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한여름 햇빛보다도 찬란하게 웃던 테레지아의 얼굴을 떠올리니 숨이 쉬어졌다.
그녀의 웃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그에게도 의미가 없었다.
<……좋습니다.>
<인사는 하지 않을 테냐?>
릭은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 테레지아의 얼굴을 봤다가는, 그녀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남고 싶은 마음에 제 결심이 흔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
하데스는 잠시간 묘한 눈길로 릭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가 나지막한 음성을 흘리며 릭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라, 미련한 영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