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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15) (115/124)

<115화>

“……테리?”

이어서 희미한 부름이 허공을 울렸다. 테레지아는 제 이름에 반사적으로 멈칫했고, 악령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레리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들었다.

‘안 돼.’

테레지아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악령을 막아서려 했으나 손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세상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이 일며 공작을 향해 달려드는 악령의 모습이 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푹-!

테레지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발레리안을 감쌌다. 직후 섬뜩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복부를 중심으로 서서히 통증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테리!”

‘어라…… 어떻게 깬 거지? 기운이 뭔가 영향을 미친 건가……?’

그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눈앞의 광경이 변해 있었다. 공작의 경악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가 다 갈라진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귓가가 온통 웅웅 울리는 탓에 그의 목소리가 뭉개진 것처럼 들렸다. 흐려진 청록색 눈이 느릿느릿 끔벅였다.

‘아파…….’

테레지아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빛이 위태롭게 깜박이더니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끄으윽!>

악령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몸을 관통하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작은 몸이 휘청이며 발레리안의 위로 풀썩 엎어졌다.

“테리, 테리! 이게 무슨……! 정신 차려!”

발레리안이 한 손으로는 테레지아의 복부에 난 상처를 지혈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볼을 감싼 채 미친 사람처럼 같은 부름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테레지아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아이는 잘게 숨을 헐떡였다. 몸이 불타는 듯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달싹였다.

‘엄마, 엄마, 엄마…….’

나 무서워…….

언뜻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것도 같았다. 그 홧홧한 감각을 마지막으로 테레지아의 정신이 까무룩 암전되었다.

* * *

한발 늦게 테레지아를 뒤따라온 에버딘 저택의 유령들은 발레리안의 침실 밖에서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역시 지금이라도 들어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 꼬맹이한테 뭔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만약에 우리가 섣불리 들어갔다가 그 악령 놈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요!>

<맞아! 방해만 될 수도 있단 말이야!>

유령들은 소란을 피우면서도 섣불리 침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테레지아가 저 안에서 홀로 분투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쳐들어감이 마땅했다.

하지만 같은 존재이니만큼, 그들에게는 악령의 기운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살의와 악의가 어찌나 짙은지, 셀레나를 포함한 에버딘 저택의 유령 전부가 달려들어도 상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무작정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악령에게 먹혀 힘을 흡수당한다면 방해가 될 뿐이었다. 유령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악령의 기운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소란에 발만 동동 굴렀다.

셀레나는 날뛰는 유령들 사이에서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녀는 원망과 걱정이 어지럽게 뒤섞인 눈으로 침실 문을,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을 테레지아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최근 보이는 태도가 불안했는데, 이렇게 무작정……!’

가까스로 이곳에 정을 붙이고, 조금씩이나마 믿을 수 있는 이들을 만들어 가던 테레지아에게 데미안 랑바드와 랑바드 공작의 존재는 독과도 같았다.

본디 단단히 경계심을 세우고 있을 때보다, 이제 좀 괜찮으려나 싶어서 슬그머니 경계심을 내려놓을 때 당한 공격이 더 아픈 법이다.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이런 일도 자기 힘으로 해결 못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데미안과 랑바드 공작을 겪은 테레지아는 과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듯 굴고 있었기에 릭도, 자신도 섣불리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던 것인데.

결국 이렇게, 테레지아가 혈혈단신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홀로 악령 앞에 뛰어드는 결과가 나타나 버렸다.

‘개새끼. 애가 얼마나 의지할 구석 하나 없이 자랐으면 그런 말을 하게 해. 미친 새끼…….’

셀레나는 잠시 오블렌 자작을 향해 이를 갈다가 필사적으로 이성을 다잡았다.

지금은, 아이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거기 너희! 빨리 가서 산 사람을 찾아 불러와. 물건을 부수든 뭘 하든 무조건 이쪽으로 데려와야 해!>

<아, 알았다!>

셀레나가 버럭 소리치자 허둥대던 유령들 일부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갔다. 그녀가 희번득 눈을 빛내며 나머지 유령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너희! 너희는 나랑 같이 들어간다! 먹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여차하면 방향 겹치지 않게 흩어지는 거야!>

<으, 으으, 응……!>

<간다!>

셀레나는 심호흡을 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뒤를 유령들이 군대라도 되는 듯 우르르 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온몸이 진득한 살기에 짓눌리는 듯 섬뜩한 감각이 일었다. 그들은 드디어 목격하게 된 방 안의 상황에 대번에 경악했다.

<테리!>

<꼬, 꼬맹아!>

침대 발치 부근의 악령은 고통을 느끼는지 손을 퍼덕였다. 몸의 절반이 피로 물든 채 의식을 잃은 테레지아를 발레리안이 절박하게 부르고 있었다.

“테리, 테리! 정신 차려!”

발레리안은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아이의 복부에 난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으나 피가 멎지 않았다.

익숙한 공포가 스멀스멀 뒷덜미를 타고 올랐다. 전장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을 잃을 때와 정확히 같은 감각이, 제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작은 아이에게서 느껴졌다.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테……!”

그가 다시 한번 아이를 깨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급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 바람에 그를 물어뜯으려던 악령이 아슬아슬하게 볼을 스치며 벽을 뚫고 튕겨 나갔다.

주륵-

발레리안의 볼에 펜으로 그은 것 같은 상처가 생겼다. 상처에서 금세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발레리안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섬뜩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더니, 상처가 생겼다.

“……유령인가?”

발레리안은 테레지아를 가까이 끌어당겨 감싸듯 어깨를 수그렸다. 금빛 눈이 맹수처럼 형형히 빛나며 주위를 살폈다.

마침 몸을 돌려 돌아오던 악령이 그 중얼거림을 듣고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곧 발악하듯 다시 발레리안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걸 안다고 해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발레리안은 또다시 살기를 피해 몸을 움직였으나 품 안의 테레지아 때문에 큰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심장을 비껴간 발톱이 그의 어깨를 깊이 베었다.

서걱-

“크윽……!”

발레리안은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으며 베개 아래 둔 검을 빼 들고 휘둘렀다. 하지만 온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의 검도 유령은 베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발레리안의 몸에 상처가 늘어 갔다. 본능만으로 악령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방 안에 들어와 있던 몇몇 유령이 악령을 막아서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악령은 발레리안에게 정신이 팔려 잔챙이 유령들을 그저 튕겨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악령이 발레리안을 해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안 돼!>

<제발, 제발. 뭐라도 해야……!>

유령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양손을 맞잡은 채 처참한 심정으로 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를 향해 빌었다. 반투명한 눈물방울들이 별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테레지아의 존재는 유령들에게 더없이 특별했다.

유령을 보고 듣고 성불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제외하고도, 아이는 늘 유령들에게 친절했다. ……물론 이따금 부려 먹으려 할 때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조금 자주 사악해 보였지만.

고작 망령일 뿐인 그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챙기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그런 아이가, 창백한 얼굴로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하며 지키려던 공작마저 죽기 일보 직전이다.

‘젠장……!’

셀레나가 무력감에 울컥해 양손을 맞잡은 그 순간.

<……어?>

<어, 어?>

그녀의 손에서부터 희미하게나마 푸른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른 유령들도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손을 퍼덕거렸다.

셀레나는 테레지아가 유령을 성불시킬 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몇 번 보았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다들 빨리! 빨리 검날 잡아!>

셀레나는 끝이 아래로 처진 발레리안의 검날을 양손으로 감싸며 외쳤다.

유령들은 푸른 빛이 강해질수록 제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망설임 없이 검날 위로 손을 모았다. 물처럼 일렁이는 푸른 기운이 서서히 검날 위로 몸집을 부풀렸다.

“……!”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무겁게 눈꺼풀을 끔벅이던 발레리안이 움찔하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졌다. 무언가 달라졌다.

본능적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은 발레리안이 남은 힘을 짜내어 기감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허공 한 곳에서 질척한 살의가 느껴졌다.

발레리안은 그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수천 수백 번 휘둘러졌음을 증명하듯, 그의 검은 빠르고 정확하게 악령을 반으로 베었다.

서걱-!

<키에에에에엑!>

악령 역시 푸른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보았기에 발레리안의 검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테레지아와 발레리안 때문에 이미 많이 깎여 나간 힘이 발목을 잡았다.

잠시간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던 악령이 푸른 불길에 잡아먹히듯 사라졌다. 동시에 힘을 쏟아 내던 몇몇 유령들이 자그마한 빛의 구로 모습을 바꾸어 사라졌다.

챙그랑-

발레리안은 섬뜩하던 살의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고서야 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는 당장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상태에서도 테레지아를 안고 주치의에게 가려 했다.

“주, 주인님!”

“세상에, 아가씨!”

그러나 때마침 악령 때문에 정신을 잃었던 사용인들이 유령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에 정신을 차리고 사색이 되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차마 안도할 수가 없었다.

“테…… 리.”

품 안의 자그마한 몸이, 지나치리만큼 서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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