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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14) (114/124)

<114화>

긴 실랑이 끝에, 셀레나는 내내 바깥을 지키고 서 있던 미나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걸 확인해 주었다. 나는 항의하는 릭을 이불로 꽁꽁 묶어 둔 채 슬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평소에는 사용인들의 정성 어린 기름칠로 매끄럽게 열리던 문이 하필이면 지금 말썽을 부렸다. 화들짝 놀라서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다행히 누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

좋아, 방을 무사히 빠져나왔으니까 다음은 복도다! 유령들에게 경비를 서는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해 오라고 눈짓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유령들은 곧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이 전한 말이 이상했다.

<경비가 없어.>

<응, 응. 저쪽에도.>

처음에는 유령들이 뭔가를 잘못 파악했거니 싶어 셀레나를 다시 보냈다. 하지만 그녀도 정말 근처에 아무도 없다며, 당황한 얼굴로 돌아왔다.

‘뭐야? 왜…….’

분명 공작이 물샐 틈도 없이 기사들을 세워 뒀었는데. 다들 어딜 간 거지? 설마 벌써 부상자가 나오기라도 한 건…….

“……!”

그때 소동 첫날 느꼈던 것과 같은, 온몸이 얼음장에 빠진 듯 소름 끼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몸을 휙 돌려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저쪽!’

이제는 경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숨통이 턱턱 막히며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났다. 손끝이 차게 질린 것이 내게 선명히 느껴질 정도였다.

‘비교도, 안 돼……!’

저절로 깨달았다. 이게 바로 토미와 오블렌 저택의 오래된 유령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악령’이라는 존재라는 걸. 제르비스에게 붙어 있던 악마는 그저 ‘악령’의 잔재나 다름없었다는 걸.

어디지? 이번엔 누굴 해치려는 거야?

마음이 초조하기 때문일까. 내게는 늘 친숙하기만 했던, 유령의 기운으로 가득 찬 에버딘 저택의 복도가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주위를 살피며 내달리다가, 드디어 유달리 악령의 기운이 강하게 흘러나오는 방을 발견했다.

하지만 꼬리를 잡았다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한발 먼저 덜컥 내려앉았다.

그 방은 공작의 침실이었다.

* * *

“공작님!”

벌컥!

테레지아가 사색이 되어 발레리안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방 안 그득히 고여 있던 찬 기운이 폐부로 밀려들었다. 마치 얼음물에 빠져 헤엄치는 듯한 기분에 테레지아가 다급히 숨을 멈췄다.

“흡…….”

아이는 다급히 정신을 다잡으려 애쓰며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발레리안은 침대에 누운 채 죽은 듯 자고 있었다. 자세마저 그의 성품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 반듯해 언뜻 보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실현될지도 몰랐다. 거대하고 새카만, 거인 같은 형태의 악령이 발레리안의 위에 올라타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으므로.

복도를 지키고 있어야 할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기감이 무서울 정도로 예민한 공작은 악령이 제 목을 조르는데도 미동이 없었다.

저게 무슨 짓을 했구나. 테레지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칼날 같은 손톱이 그의 피부를 서서히 파고들며 붉은 피가 시트 위로 툭툭 떨어졌다. 테레지아는 죽을힘을 다해 악령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뭐 하는 짓이야!”

퍼억-!

<키에에엑!>

작은 주먹이 악령을 후려치는 순간, 테레지아의 손끝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더니 테레지아의 주변을 감싼 채 물방울처럼 잔잔히 일렁였다.

테레지아는 순간 놀란 듯 움찔했다가, 곧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양팔을 벌리고 발레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악령은 기괴한 고함을 내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푸른 빛에 닿는 순간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악령이 달려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테레지아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경계하듯 웅크린 채 그 모습을 관찰하던 악령으로부터 쇳소리를 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냐, 너는. 설마 인간이 아닌 건가?>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너 뭐야? 미쳤어? 네가 뭔데 이런 짓을 해!”

아마 유령을 다루는 모르티아 일족의 힘일, 푸른 기운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자꾸만 숨이 막히고 손이 떨렸다.

테레지아는 그것을 잊기 위해 일부러 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조금이라도 겁먹은 티를 냈다가는 얕잡아 볼 테니까.

친모를 잃은 후부터 지금까지 숨 쉬듯 해 온 일인지라 어렵지는 않았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악령은 섣불리 다시 달려들지 않고 테레지아와 거리를 둔 채 일렁거렸다. 그는 한참이나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은 소리만을 내다가 말을 짓씹어 내뱉었다.

<나는 저자의 손에 짓밟힌 왕국의 마지막 왕자다.>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에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때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에버딘 공작께서 저주에 걸리기 전까지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정복 전쟁을 벌였다는 건 아시죠?’

‘그러젠트는 공작님께서 정복한 곳 중에서는 작은 편이었지만, 막내 왕자의 저항이 특히 거셌어요. 그 바람에 공작님께서도 유일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하죠.’

아.

테레지아는 그제야 자신이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저 악령은 도망친 유령들을 쫓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게 아니다.

처음부터 공작을 노리고, 그를 해치기 위해 유령들을 잡아먹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며 힘을 기르고 있던 것이다.

그제야 테레지아의 시야에 새빨간 구멍처럼 보이는 악령의 두 눈에 들어찬 진득하고도 섬뜩한 집념이 비쳤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인 악령이 서서히 입꼬리를 양쪽으로 찢어 늘였다. 검은 그림자 가운데에 칼로 그은 것처럼 보이는 반달 모양의 입이 생겨나는 광경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군……. 저자가 휘두른 검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내 가족들이 말이야.>

한때는 그러젠트 왕국의 막내 왕자였던 악령이 살기를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기억이 불길처럼 발치에 넘실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기억 속의 왕자는 차게 식은 부모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에게도 이미 팔과 다리 곳곳에 지혈조차 못 할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상처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도 절망감이 더 아팠다. 왕자는 몸부림치듯이 외치며, 피눈물에 젖은 눈으로 발레리안을 노려보았다.

‘단순히 정복이 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잖아! 다른 방법도 있잖아! 대체 왜……!’

차라리 발레리안이 왕국에 유감이 있어 그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이렇다 할 이유조차 없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하하, 하.’

그저 단순한 학살.

그 텅 빈 검 끝에 제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모조리 잃었다는 사실.

‘나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조용한 목소리.

그것이 왕자를 죽어서도 눈감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게는 저자의 목숨을 받아 갈 권리가 있다. 본인의 입으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좋지 않은 기억을 상기한 악령의 기세가 더욱 흉흉해졌다. 그는 발레리안을 한입에 삼킬 것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검은 불길 같은 악령의 몸이 방의 절반을 채웠다.

악령은 어지간하면 테레지아와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가진 푸른 빛의 힘이 두려워 최대한 그녀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굳이 귀찮게 입을 열어 말을 섞은 것이었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힘주어 코웃음 쳤다.

“헛소리.”

<뭐?>

“당신이 죽은 게 어떻게 공작님 탓이야! 황제 탓이지! 정말로 네 원한을 갚고 싶다면 황제나 죽이러 가! 이 염병할 악령 새끼야!”

어린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센 바락거림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테레지아는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대체 왜 다 공작님한테만!’

물론 발레리안의 행동이 완벽하게 선하다고 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그건 모든 일의 원인이나 마찬가지인 황제를 징벌한 후에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내게는 이자나 그자나 똑같은 살인자야. 그러니 방해 말고 비켜라!>

“너 같으면 비키겠냐?!”

테레지아가 숫제 으르렁거리며 양 주먹을 말아쥐고 소리쳤다.

“똑같은 살인마는 무슨. 공작님도 자기 사람들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이 검을 든 거라고!”

<시끄럽다! 비키지 않을 거라면 너도 같이 죽여 주지!>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깨달은 악령이 소름 돋는 괴성을 내지르며 테레지아에게로 달려들었다.

푸른 빛에 닿을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으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는 발레리안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족했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해야 해.’

테레지아는 이를 악물고, 레일라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주먹에 힘을 집중했다. 그리고 악령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끼에에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테레지아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악령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식은땀이 맺히다 못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테레지아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공작에게 접근하는 악령을 막아 냈다.

‘이길 수 있어, 안 무서워.’

퍼억-!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점차 팔이 무거워졌다. 숨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 무서워……!’

숨이 가쁘고 토할 것 같았다.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려졌다.

푸른 빛 역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점차 희미해졌다. 이제는 테레지아의 몸 주위만을 얇은 막처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이가 헐떡이며 다시금 주먹을 휘두르려던 찰나.

“으…….”

등 뒤로부터 자그마한 신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악령의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을 법도 한데 그 신음만큼은 선명히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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