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혀, 혀 깨물 뻔했다.
너무 놀란 탓인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제자리에 굳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들불처럼 소란이 번지기 시작했다.
“……슨……!”
“정원 쪽……!”
그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나 또한 릭을 끌어안은 채 허둥지둥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내달렸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불안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게 랑바드 공작의 뒤통수 때문에 생긴 착각이 아니었던 건가?
비명은 분명 정원 쪽에서 들려왔다. 계단을 구르듯 뛰어 내려가 막 건물 모퉁이를 돌려던 차. 새까만 그림자가 눈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히익!”
나도 모르게 숨 삼키는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춰 섰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눈밭 위를 구를 뻔했다.
뭐, 뭐야? 방금 분명 뭔가 지나갔는데?
“릭, 방금 뭐였어?”
<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빨라서…….>
이번에는 다행히 릭도, 셀레나도 이질적임을 감지한 듯했다. 셀레나가 몇몇 유령을 시켜 근처를 뒤져 보게 하는 사이, 나는 발을 움직여 모퉁이를 마저 돌았다.
직후 눈에 들어온 광경에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
“어…….”
쿵, 쿵.
심장 뛰는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다. 나도 모르게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저택 뒤, 정원 한복판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분명 새하얘야 할 눈밭이 꽃이라도 피어난 것처럼 붉은색으로 얼룩덜룩했다.
‘설마…….’
죽은…… 거야?
“테리, 보지 마렴.”
그 순간 몸이 휙 끌어당겨지며 따듯한 손이 눈가를 덮었다. 약간의 숨소리가 섞인 공작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흑에 갇혔다. 하지만 외려 그것이 기이한 안도감을 주었다.
입 밖으로 탄식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랐지. 괜찮아, 괜찮아…….”
공작은 그 상태로 나를 훌쩍 안아 올려 다독였다. 눈이 가려져 있으니 그가 깃펜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닌지 몰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공작 역시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내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였다.
내가 공작에게 안겨 숨을 고르는 사이, 우리를 뒤따라 나온 사용인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레딘이 혀를 차고는 보고했다.
“오늘 야간 순찰 당번 놈이네요. 죽은 건 아니고, 어깨를 좀 뜯겼군요.”
“아이고, 나 죽네…….”
레딘의 말이 끝나자마자 부스럭 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렸다. 쓰러져 있던 기사가 깨어난 듯했다.
그 대화에 비로소 안도가 찾아왔다. 누가 죽은 게 아니구나.
공작이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뭔가 봤나?”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주군. 너무 어두워서…….”
“대략적인 형체도 못 봤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게……. 짐승이 아니었을까요? 이 잇자국도 그렇고.”
기사가 그리 말하며 제 상처를 보여 준 것인지 레딘이 으, 소리를 냈다. 공작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한숨 쉬었다.
“일단 의무실로 옮겨. 가벼운 상처라고 얕보지 말고 잘 치료하고.”
“알겠습니다. 그보다 방에서 바로 뛰어내리신 겁니까? 3층인데?”
“테리가 몹쓸 걸 보게 둘 수는 없으니까. 마침 바로 밑이었고.”
무, 뭐요? 어디서 뛰어내려?
놀라서 내내 그의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어 보았다. 그의 말대로 순찰하던 기사가 쓰러져 있던 곳은 공작의 방 창문 아래쪽이었다.
저기서 뛰어내렸는데 멀쩡하단 말이지……. 쿵 비슷한 소리도 안 들린 것 같은데.
새삼스러우나 공작의 신체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재차 확인한 느낌이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테리, 괜찮니? 다친 곳은?」
“없어요. 아까 그 기사님은 괜찮아요?”
「응. 괜찮대.」
“습격한 사람…… 아무튼 범인은요?”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일단 들어가자. 추운데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네에.”
확실히 이렇다 할 외투도 없이 뛰쳐나온 탓에 슬슬 두려움이 아니라 추위로 몸이 떨리고 있었다. 공작의 목을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되어, 다른 이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공작의 어깨 너머로 정원이 점차 멀어졌다. 그의 걸음에 맞추어 눈밭 위로 점점이 흩뿌려진 붉은 색채도 갈수록 희미해졌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게……. 짐승이 아니었을까요? 이 잇자국도 그렇고.’
‘덩어리…….’
공작에게 안긴 채 기억을 곱씹다가, 문득 아까 기사가 했던 진술이 가시처럼 불쑥 떠올랐다. 때마침 셀레나가 지시를 내렸던 유령들이 곁으로 돌아왔다.
<없어.>
<숨어 있다거나, 수상쩍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아무것도.>
자루 모양 유령들이 하나같이 끽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까 릭과 함께 보았던 검은 그림자도 그렇고, 다친 기사도 그렇고. 수상쩍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는 허공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다짐했다.
‘당분간은 경계 태세!’
뭔진 모르겠지만 감히 우리 가문 사람을 건드렸겠다. 마침 분풀이할 곳도 필요했는데, 넌 죽었다.
* * *
나는 소동의 범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 혹은 유령인지 몰라도 얼마 못 가 잡히리라 생각했다.
인간 쪽은 공작을 앞세운 사용인과 기사들이 살벌하게 감시 중이고, 장난기가 안 좋은 쪽으로 발달한 유령이라면 나와 셀레나를 비롯한 이들의 눈을 피할 수가 없을 테니까.
“으, 꺄아악!”
“크윽…….”
하지만 처음 소동이 있었던 다음날. 바로 하녀 하나가 검은 그림자에 밀쳐져 계단을 굴렀으며. 다음 날에는 연무장을 정리하던 기사가 별안간 허공에서 쏟아진 목검들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매일 밤 꼭 한 사람씩은 다치는 일이 벌어진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동안 공작과 나는 범인의 코빼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쯤 되니 슬슬 여러 정황에 더불어 의심이 되었다.
‘이거…… 악령 짓 아냐?’
아무래도 단순히 질 나쁜 유령이 아니라 악령 같은데……?
<……육십삼, 육십사.>
“…….”
<줄었어……. 어제는 분명 육십육이었는데. 그제는 육십칠이었고…….>
그 의심은 저택 감시를 맡긴 유령들이 하나둘 돌아오지 않고, 셀레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이 되었다.
“설마 정말로 남부에서 여기까지 온 건가……? 도망친 유령들을 잡아먹으려고?”
도망친 유령들을 쫓아 여기까지 왔고 기어코 그들을 잡아먹었지만,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줄어든 힘을 인간을 통해 채우려 하는 거라면…….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의 아귀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악령이라.’
토미를 포함해서, 오블렌 저택의 유령들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었었지.
제르비스에게 붙어 있던 것도 악령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오롯한 악령을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내가 직접 찾으러 다녀야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역시 그것뿐이었다. 침대 위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첫 소동 다음 날. 아메트리스 후작 일가를 반강제로 돌려보낸 후, 공작이 저택의 경계를 숨 막힐 정도로 강화한 탓에 밤에 방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유령들을 보내 살펴보게 한 것이었는데, 결국 유령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에버딘 사람들은 유령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다.
‘내가 해결해야 해.’
두려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주먹을 꼭 쥐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릭이 잠옷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초조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테리, 위험합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당신을 걱정할 때예요.>
<맞아. 이렇게까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건 힘의 격차가 엄청나다는 뜻이라고 했잖아. 너무 위험해.>
셀레나 또한 곁에서 심각한 얼굴로 릭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에게 한발 물러 줄 수가 없다.
……방금 한 생각을 릭이 들었다면 내가 언제 물러 줬냐고 할 거 같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더 잡아야지! 유령을 해치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좀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악령을 해치워 본 경험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하필…….>
“응?”
릭이 무어라 말하다가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릭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아무래도 다시 입을 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릭을 떼어 내고 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그가 다시 나를 붙들었다.
<정 그러면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움직여요. 곧 도움을 줄 만한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르잖습니까.>
릭의 말은 어딘가 묘하게 들렸다. 꼭 그가 ‘도움을 줄 만한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이 들렸달까.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테리.>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이런 일도 자기 힘으로 해결 못 하면 안 되는 거잖아.”
<…….>
주먹을 보란 듯 꽉 움켜쥐고 몇 번 흔들자 릭이 침묵했다. 그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데미안의 일을 겪으면서도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지만, 랑바드 공작이 뒤통수를 침으로써 생각이 한층 더 견고해졌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러니까, 나는. 무섭지 않아.
……정말 하나도 무섭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