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당신들이 왜 여기서 나와……?
입이 저절로 헤 벌어졌다. 저들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너무 뜻밖의 상황인지라 불가항력이었다.
“……저 사람들, 오블렌 자작 부부 아니에요?”
“오블렌 자작 부부라고요?”
“저 사람들이 여긴 왜…….”
“공녀님께서 초대하신 걸까요?”
“으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몇몇은 내 ‘친부모’인 오블렌 자작이 나타나자 나를 공녀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문이 드는 듯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지막이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곁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살기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그대로 베겠다.」
공작이 살벌한 얼굴로 내 앞을 막아서며 으르렁거렸다.
허공을 수놓는 섬뜩한 말에, 내내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던 오블렌 자작 부부가 처음으로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공작의 기세가 워낙 험악한 탓인지 그들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무례를 용서하는 건 여기까지야. 초대장도 없이 빈손으로 난입한 이는 객이 아니라 무뢰배지.」
“이 일은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나가 주십시오. 두 분 모두.”
공작에 이어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이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 역시 이번 파티의 주최자나 다름없었다. 공들여 준비한 파티가 불청객 탓에 소란해지자 기분이 굉장히 상한 듯 보였다.
공작과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이 단호한 태도로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오블렌 자작 부부 쪽을 향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전보다 한층 싸늘해진 것을 느꼈는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오블렌 자작의 옆구리에 바싹 붙어 있던 카를로타가 커다랗게 외쳤다.
“비, 빈손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의 고운 눈썹이 찌푸려졌다.
카를로타 덕에 잠시 찾아온 정적을 틈타, 오블렌 자작이 보란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입을 열었다.
“그, 그렇습니다. 저희는 랑바드 공작님의 가신으로서, 공사다망하신 그분을 대신하여 에버딘 공녀…… 님의 선물을 전하러 온 겁니다.”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가 머리를 한 대 세게 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오블렌 자작 부부의 말에 경악해 떠드는 소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사이, 오블렌 자작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봉투는 더없이 익숙한 모양새였다.
당연하다. 저건 내가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과 함께 며칠 내내 작성한 초대장이었으니까.
공작은 잠시 움직임이 없다가 세바스찬을 향해 작게 손짓했다. 그 뜻을 알아챈 세바스찬이 오블렌 자작에게 다가가 그에게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재빠르게 손에 든 초대장을 훑은 세바스찬이 이윽고 심각한 표정으로 공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초대장이 진짜라는 뜻이었다.
“공작님께서 전하라 하신 선물은 사용인들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워낙 커서 운반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군요.”
오블렌 자작은 랑바드 공작의 선물이 마치 자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을 한번 슥 훑어보던 그가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와 눈을 맞추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익숙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오블렌 자작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치 네가 무슨 발악을 해도 나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양.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저희는 소임을 다했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럼.”
오블렌 자작은 오만하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카를로타와 함께 몸을 돌려 유유히 사라졌다. 그들이 연회장을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소란이 배는 커졌다.
“오블렌 자작이 랑바드 공작의 가신이 되었다고요?”
“이러면 모양이 좀…… 이상해지지 않나요?”
그렇게 내 여덟 살은, 예상치 못하게 엉망이 되어 버린 파티와 함께 끝이 났다.
* * *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늦은 밤.
릭이 내 방 구석에 놓인, 상당히 커다란 놀이용 저택을 보며 신음했다. 정확히는 내가 진즉 주먹질 연습용으로 사용해 엉망이 되어 버린, 놀이용 저택‘이었던’ 것.
저 놀이용 저택은 랑바드 공작이 보낸 생일 선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저 선물조차 조롱으로 느껴졌다.
난! 저런 장난감 말고! 진짜 저택이랑 영지를 사려고 했단 말이약!
“아오, 진짜!”
다시 생각해도 열불이 뻗쳐서 베개를 팼다. 놀이용 저택은 이미 와르르 무너져서 분풀이용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엉망으로 찌그러진 베개를 내려다보며 쉭쉭 숨을 고르려 애썼다.
파티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랑바드 공작이 보낸 선물을 때려 부수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랑바드 공작은 대체 왜 오블렌 자작을 가신으로 들인 걸까?
자작이 영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한 번만 만나 봐도 알 테고, 오블렌 자작가는 그가 작위를 물려받은 후 착실히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블렌 자작을 제 가신으로 들이고, 그걸 보여 주려는 듯 내 생일 파티에 참석하게 시킨 건…….
‘공작이 내가 오블렌 영지를 사들일 계획이었다는 걸 알았을 리는 없고. 그 사람은 데미안의 일 때문에 보복당할까 봐 인질을 잡은 거겠지.’
공작이 순순히 데미안을 사과시키러 보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데미안을 보내서 우리를 방심시키고, 뒤로는 우리가 추가적인 보복을 하지 못하게 인질을 잡고 있었다, 이거지?
“흥.”
하지만 랑바드 공작이 잘못 생각한 게 있다면, 나는 오블렌 자작이 어떻게 되든 간에 한 점의 유감도 없다는 것이다.
랑바드 공작은 내가 ‘친부’를 차마 외면하지는 못할 거라고 여긴 모양인데, 전혀 아니거든요? 그따위 인간이 어떻게 되든 내가 알 게 뭐람.
하지만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일 수가 없는데…….”
원래 릭과 내 계획은 에버딘 ‘공작가’의 위세를 이용해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그 계획에는 부도 부지만, 오블렌 자작에게 가문의 차이로 압박을 주어 영지를 팔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영지를 팔지 않으려 할 테니까.
그런데 오블렌 자작이 랑바드 ‘공작가’의 이름 아래로 들어가 버리며 그 계획은 산산이 조각났다.
상대가 자작가라면 공작가의 이름으로 압박할 수 있지만, 같은 공작가라면 어려우니까.
거기에다가 그간 에버딘이 적잖은 부와 명예를 되찾았다지만, 몇십 년 전부터 흔들림 없이 부와 권력을 쌓아 온 랑바드 공작가와 대적하기에는 아직 모자란 감이 없지 않았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오블렌 자작에게서 영지를, 엄마의 유품을 빼앗으려면 필연적으로 랑바드 공작가를 눌러야 하는데. 현 황제가 끼고 도는 그 가문을 대체 무슨 수로 제친담.
‘……확 반역이라도 일으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황제랑 랑바드 공작은 싫지만, 칼리오스는 잘못이 없으니까…….
“에휴.”
심란하다, 심란해.
그간 ‘오블렌 영지를 사들이겠다’라는 하나의 목표만 보고 열심히 달렸던 만큼, 그 목표가 갑자기 사라지자 허망함이 온몸을 채웠다.
무력감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릭을 껴안은 채로 침대에 대자로 한참을 뻗어 있었다. 평소라면 피했을 릭도 내 기분이 저조한 것을 알기 때문인지 얌전히 안겨 있어 주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보니 느리게나마 졸음이 밀려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끔벅이고 있을 때였다.
“……!”
순간 섬찟한 기운이 방문 쪽에서 훅 밀려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구른 릭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테리?>
“……방금 뭐였지?”
<뭐가요?>
“왠지 엄청 소름 끼치는…… 너는 아무것도 못 느꼈어?”
아직도 팔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양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물었으나 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셀레나는요?”
<글쎄, 딱히 뭔가 느껴지진 않았는데. 왜 그래?>
셀레나 역시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기만 했다.
그쯤 되니 내가 착각한 건가 싶었지만, 뭔지 모를 불안감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숄을 찾아 두르고, 한 손으로는 릭을 끌어안은 채 조심조심 방을 나섰다.
셀레나를 비롯해 몇몇 유령을 촛불 대신으로 이용하며 어둠에 잠긴 저택을 한 바퀴 돌았다.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복도를 가로지르던 중 릭이 문득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당신이랑 처음 말을 섞었던 날이 기억나네요.>
“앗,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에버딘 저택에 막 도착했을 당시에, 망나니를 연기하다가 쫓겨나려고 숨을 곳을 찾아다녔었지. 그러다가 나를 쫓아온 릭과 마주쳤고.
“그때는 진짜 무서웠지……. 물론 지금은 하찮지만.”
<뭐라고요?>
“응? 왜? 나 아무 말도 안 했…….”
“-으아아악!”
릭을 놀리려던 그 순간, 쩌렁쩌렁한 비명이 저택 전체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