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테레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연회장의 장식 중 하나인 양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라앉아 있던 릭이 슬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테레지아는 이쪽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테이블 가까이에 섰다. 양손으로 잔을 들어 입 모양을 반쯤 가린 그녀가 물었다.
“아까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그런데 소용없게 되어서요.>
릭은 혹시나 하데스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에 저택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하데스는 정말로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곧 릭이 여전히 연회장 구석에서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음울한 물결을 그리며 일렁였다.
릭은 저도 모르게 한숨 같은 중얼거림을 흘렸다.
<……아쉽네요.>
“뭐가?”
<그냥…….>
“그냥 뭐?”
릭은 얼버무리려 했으나 테레지아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그의 태도가 묘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소였다면 릭은 익숙하게 실망감을 갈무리하고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을 것이다.
하지만 테레지아의 생일이라는, 평소와 같지 않은 상황 탓일까. 마음속에 있는 말을 눌러 담기가 어려웠다.
결국 릭은 참았던 숨을 토하듯 진심을 뱉었다.
<그냥, 좀 더 좋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거든요.>
혹시 릭이 어떤 유령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한 건가, 싶어 테이블 아래로 몰래 허공에 주먹 날리는 연습을 하던 테레지아가 멈칫했다.
릭은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액자라든가, 장갑이라든가. 구두, 만년필, 향수……. 금세 시들어 버리는 꽃다발보다는 그런 선물들이 낫지 않겠습니까.>
“…….”
<잠깐 스쳐 지나갈 무언가보다는, 곁에 두고 오래 기억될…… 그런 걸 당신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능력이 되지 않네요. 미안합니다, 테리.>
그리 말하는 릭의 시선은 연회장 저편, 테레지아의 친구들에게 닿아 있었다. 그가 늘어놓은 선물들은 전부 그들이 테레지아에게 준 선물이기도 했다.
“…….”
그 옆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테레지아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청록색 눈을 반짝이며 릭을 덥석 안아 올렸다.
“릭, 춤추자!”
<……예?>
릭은 그녀의 말에 너무 당황해 반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제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다시 한번 말했다.
“춤추자고. 꽃다발만 준 게 아쉬우면 이걸 추가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해.”
<아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요? 오늘이 에버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하는 날인 건 둘째 치고, 당신 생일입니다. 그런데 곰 인형과 춤을 췄다간…….>
릭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뻔하다. 테레지아가 자신을, 곰 인형을 들고 춤을 추었다가는 미치거나 유령에 홀린 것이 아니냐는 숙덕거림이 필시 뒤따를 것이다.
지금은 에버딘 저택 내에 있으니 말을 삼갈지 몰라도, 과연 사람들이 파티가 끝난 후에도 얌전히 입을 다물까? 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정한 사람.’
그는 테레지아의 눈에서 자신을 염려하는 기색을 발견하고는 소리 없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녀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것도 속상한데, 이렇듯 징징거리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무리하지 말아요, 테리. 저는 괜찮습니다.>
릭은 진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평판이 조금이라도 훼손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레지아는 꿋꿋했다.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말대로 내 생일이라서 내 맘대로, 내가 기분 좋은 일 좀 하겠다는데 뭐 어때?”
<그래도 이건…….>
“정말로 내가 너랑 춤추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가자!”
테레지아는 릭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달랑 들어 올린 채 척척 발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다시 그녀에게 쏠렸다.
이쯤 되니 말릴 수도 없고. 릭이 복잡한 심경으로 테레지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테레지아는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댄스 플로어 위에 올라섰다. 릭과 마주 보고 손을 잡듯이 곰 인형의 양손을 꼭 쥔 그녀가 입술을 뗐다.
“릭, 있지.”
다행히 테레지아가 고용한 악단은 눈치가 있었다. 그들은 공녀가 파트너 하나 없이 곰 인형만 달랑 들고 댄스 플로어 위에 올랐어도 차분히 연주를 시작했다.
테레지아는 릭과 양손을 맞잡은 채 플로어 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 탓에 릭의 시야에는 테레지아만이 선명하고, 그녀를 제외한 세상은 흐릿하게 뭉그러지는 듯 보였다.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테레지아의 얼굴은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잔잔한, 그러나 힘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꽃이 하루 이틀이면 시들어 버리는 예쁜 쓰레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인생이 삭막하다 못해 바스라져 없어질 만큼 메마른 사람일걸.”
<…….>
“어떤 기억은 한 조각만으로도 인생을 헤쳐 나갈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잖아.”
테레지아가 어머니인 이피아 오블렌과의 추억에 힘입어 오블렌 자작의 응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것도 그런 이치였다.
테레지아의 입꼬리가 조금 더 길게 휘었다. 그녀가 다정한 웃음을 띤 채 또렷이 말했다.
“나한테는 네 선물이 그랬어.”
크지 않은 목소리였건만 선명히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릭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내가 저택에서 피는 꽃 중에 어떤 것에 더 자주 눈길을 주는지, 내가 좋아하는 향기는 뭘지, 나랑 닮은 꽃은 어떤 걸지. 전부 다 네가 기억하고 고민해서 고르고 고른 것들이잖아.”
<…….>
“그 마음은, 쓰면 언젠가는 닳아 없어질 물건들보다 훨씬 더 오래 마음에 남을 거야.”
테레지아의 말 한 글자 한 글자가 릭의 속을 강하게 울렸다. 그녀가 건넨 말들이 텅 비어 있던 곰 인형의 속을 솜처럼 차곡차곡 채워 주었다.
돌이켜 보아도 여전히 감동인지, 테레지아가 활짝 웃으며 선언했다.
“네가 준 꽃다발은 내 인생 최고의 생일 축하 선물이었어. 고마워, 릭.”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아.’
릭은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그는 눈시울이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감각에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가, 끝내 바람 빠지듯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때마침 곡이 끝났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들은 테레지아의 행동이 자신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연회장의 정경, 요정처럼 깜찍한 소녀와 곰 인형의 춤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쳤다.
짝짝짝.
테레지아는 릭을 품에 안은 채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방긋 웃는 것으로 화답하고 플로어에서 내려왔다.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릭은 아까보다 확연히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테레지아가 빙긋이 웃었다.
‘약속 못 지켰던 것도 신경 쓰였는데. 기분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릭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번듯한 생일 선물을 해 줄 수 없음에 속상해했지만. 테레지아에게는 외려 릭이 인간이 아니기에 그가 내민 꽃다발이 더 의미 있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 전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휴, 그럼 이제 슬슬…….’
테레지아는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티는 슬슬 마무리 분위기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준비했던 음식도 기분 좋게 비어 있었고, 몇몇 어린 영애와 영식들의 눈에는 졸음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블렌 자작령을 사 달라고 말하러 가자!’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테레지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곧 주먹을 불끈 쥐는 것으로 긴장을 떨쳐낸 그녀가 연회장 한쪽에 있던 발레리안에게 도도도 다가갔다.
“공작님!”
「테리?」
발레리안이 곧장 돌아보았다. 그는 아이가 아파하는 곳은 없는지 티 나지 않게 살피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니?」
테레지아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셨다.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아니고, 제 생일 선물 말인데요.”
「아, 그래. 파티가 끝나면 말하겠다고 했었지.」
“네. 이제 슬슬 파티가 끝나 가니까 말해도 될 것 같아서요.”
생일 파티는 단연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곰 인형과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딱히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람들이 에버딘을 좋게 인식했다는 소리였다.
지금만큼 좋은 타이밍은 없었다.
테레지아는 입 안으로 몇 번이고 말을 고르다가, 그토록 고대했던 말을 꺼냈다.
“저, 생일 선물로 오블렌 자작령을…….”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의 방문으로 인해 끝맺어지지 못했다.
“……안……!”
“돌아……!”
연회장 바깥에서 부자연스러운 소란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기민하게 그것을 눈치챈 발레리안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본 테레지아도 반사적으로 말을 멈췄다.
“무슨…….”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연회장의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흠칫한 사람들의 시선이 파도처럼 한 곳을 향했다. 그들은 사용인들의 어깨를 밀치며 연회장 가운데로 걸어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놀라 더듬거렸다.
“이게 무슨…….”
“사용인들이 막고 있던 걸 보면 뒤늦게 도착한 손님 같지는 않은데요. 누구죠?”
“……저 사람들.”
그때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 입술을 열었다. 다급한 속삭임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오블렌 자작 부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