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커다란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은 현수막에 적힌 글에 한 번, 연회장 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번 놀랐다. 낮은 술렁거림이 번져 갔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다고?”
황제가 에버딘 공작가를, 정확히는 발레리안 에버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크렘위든 제국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이 기묘한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보았다.
한편, 테레지아 역시 칼리오스의 방문에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녀는 공작과 함께 서둘러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췄다.
“위대하신 크렘위든 제국의 작은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인지라 깍듯한 태도였다. 칼리오스 또한 사석에서 곧잘 짓곤 하던 편한 표정이 아닌, 잘 다듬어진 황태자의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편지로는 못 올 것 같다고 했는데?’
테레지아는 자세를 바로 하며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물론 그녀는 칼리오스를 친구로서 생일 파티에 초대했다. 하지만 황제가 에버딘의 경사를 축하하는 일을 허락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아들인 칼리오스조차 이야기는 꺼내 보겠으나 생일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회의적인 태도를 내비쳤었다.
그래서 아쉬워도 다음을 기약하기로 이야기를 대강 정리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생일 축하하오, 공녀. 무척이나 아름답고 독특한 파티로군. 저건 공녀에게 주는 내 선물이고…….”
칼리오스는 점잖은 태도로 등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황실의 시종이 작지만 질이 좋아 보이는 상자를 선물의 산 위로 옮기고 있었다.
고개를 원위치한 칼리오스가 발레리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에버딘 공작가의 칩거가 끝났음을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전하셨소. 이토록 영민한 후계자가 생긴 것도.”
“……!”
그 말에 찰나 연회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몇몇 사람의 얼굴은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 너무하시네요.’
에버딘 공작가에서 외부의 후계자를 구하게 된 이유는 칩거로 인해 공작의 운신이나 결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칩거해야만 했던 이유는 모르티아 일족의 저주이고, 모르티아 일족의 저주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사실상 황제의 잘못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간신히 에버딘이 몰락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날에, 뻔뻔하게 ‘축하’를 입에 담다니. 이는 아무리 황제 파에 가까운 이들이라도 헛기침 몇 번은 하게 만들 정도로 무례한 일이었다.
불경이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발레리안이 당장에라도 폭발해서 검을 뽑아 들어도 이해하리라 생각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
발레리안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곁에서 저와 마찬가지로, 아니, 저보다 더 분노한 듯 주먹을 파르르 떠는 테레지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숨처럼 웃어 버렸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데 성공했다.
「폐하의 성심에 감사드립니다.」
발레리안이 선선히 답하자 긴장되어 있던 칼리오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풀렸다. 행여 칼바람이 일까 봐 염려하던 사람들도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끝나고 나자 테레지아가 눈을 부릅뜬 채로 소리 죽여 외쳤다.
“뭐야, 못 올 거 같다며!”
“나도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아바마마가 시키셔서…….”
칼리오스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변명은 오히려 악수였다. 테레지아의 눈초리가 두 배는 사나워졌다.
“……미안.”
그래도 눈치를 보다가 시무룩하게 사과하는 걸 보니 화낼 마음이 푹 꺼진 빵처럼 가라앉았다. 테레지아는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황명에 대고 칼리오스가 뭐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저 사과는 황제에게 받아야 하는 거지, 애꿎게 그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에게 받을 것이 아니었다.
‘좋은 면만 보자, 좋은 면만.’
그래, 어차피 황제가 에버딘에 시비 거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테레지아는 고개를 푸르르 털어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고,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여 그에게 복수하겠다는 장대한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한다면 그녀의 손해였다.
테레지아는 황제가 전한 말을 없던 것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어쨌든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칼리오스가 제 생일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칼리오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튼 와 줘서 고마워. 기왕 온 거 원 없이 놀다 가야 공부할 때 덜 억울할 테니까 맘껏 즐겨.”
“당연하지. 마침 저쪽 댄스 플로어를 좀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같이 가 줄 거지?”
칼리오스가 눈을 휘어 웃으며 상체를 살짝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동행을 청할 때 보이는 신사의 태도였다.
하필이면 댄스 플로어를?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테레지아가 보기에도 눈 내린 숲처럼 꾸며 둔 댄스 플로어는 제법 예뻤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납득하고 칼리오스가 내민 손에 제 손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제르비스가 테레지아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빨랐다. 그는 나붓이 웃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싸늘했다.
“서운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래도 짧게나마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데 이렇듯 모른 척하셔서야.”
어조는 공손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이 공손하지 않았다. 칼리오스의 입꼬리가 조금 더 위로 치솟았다.
겉보기에는 썩 화기애애한 풍경이었다.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일전에 칼리오스가 에버딘 영지에 잠시 머물렀을 때 꽤 친분을 쌓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지척에 있던 테레지아와 친구들은 이곳의 분위기가 화기애애와는 멀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멀린은 소름이 돋아난 팔을 옷 위로 문지르며 리벨에게 속닥거렸다.
“저 두 사람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안 말려도 돼?”
하지만 그의 약혼녀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출 생각도 안 하고 제르비스와 칼리오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걸 왜 말려! 재밌잖아!”
“남의 싸움을 재밌어하면 안 돼, 리벨.”
“그러는 하리 너도 엄청 기대되는 눈이거든.”
“흠, 흠.”
리벨의 말에 하리엔이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테레지아는 조금 애잔한 표정으로 제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잘 보면 이 중에선 내가 가장 착한 것 같다니까.’
테레지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릭이나 셀레나가 들었다면 ‘할 말이 많지만 차마 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을 법한 생각이었다.
한편, 대치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칼리오스의 사람 좋은 낯이 찰나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파티의 주인공께 합당한 예를 갖추려 하다 보니 그만. 잘 지냈나, 영식?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도 같은데.”
“작은 태양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지극히 건강하답니다. 그러는 전하께서는 어쩐지 작아지신 것 같은데…… 아, 제 키가 큰 거군요.”
“신발이 좀 불편해 보이는데.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편한 신발을 신어야지. 굽 높은 신발이 아니라.”
“첫눈에 신발이 불편할지 아닐지 가늠이 될 정도라니. 굽 높은 신발에 대해 꽤 잘 알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랜만에 봐 놓고 왜 사이가 더 나빠진 것 같냐고…….’
테레지아는 잠시 막막한 기분으로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의 말싸움을 지켜보았다.
……내 친구들의 인성,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테레지아는 천장을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뒤로 발을 뺐다. 마침 슬슬 첫 곡이 시작될 때였다.
“공작님!”
「왔니, 테리.」
후다닥 친구들 곁에서 벗어난 테레지아는 발레리안을 찾아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하얗게 웃으며 아이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곧 플로어 위로 올라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췄다.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한데 뒤섞여 추는 춤은 절로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었다.
테레지아와 발레리안은 꼭 닮은 몸치였지만, 함께 연습한 기간이 있어 어느 정도는 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곡이 끝나자 두 사람은 꾸벅 인사했다.
“멋진 춤이었습니다, 신사분.”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다 큰 어른처럼 너스레를 떨며 예를 갖추자 공작도 맞추어 응대했다. 테레지아가 키득거리며 웃고는 플로어를 내려왔다.
공작과의 춤이 끝나고, 연회장 한쪽에 쌓인 선물 중 가까운 이들의 것을 몇 개 뜯어보다 보니 목이 말랐다.
테레지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린 듯 춤추는 리벨과 멀린, 그리고 그 근처에서 영애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에게 쏠린 틈을 타 조용히 테이블 앞으로 움직였다.
사용인들에게 미리 지시해 놓은 꿀 우유가 분명히 이 주변에 있을 텐데 말이지. 청록색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잔 사이를 빠르게 훑었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당신을 따라서 몇 번 봤지만, 확실히 사람들이 주변에 어우러지니까 더 예쁘네요. 연회장.>
“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