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09) (109/124)

<109화>

* * *

오늘은! 내! 생일!

“허잇차!”

이른 아침부터 눈이 번쩍 떠지고, 정신이 맑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자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미나가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기운차게 양손을 번쩍 치켜들고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나!”

「푹 주무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고맙습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설레는 건 엄밀히 따지면 생일 때문이라기보다는, 드디어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 때문이지만! 막상 축하받으니 기쁘다, 헤헤.

미나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저녁에 있을 파티 때문인지 온 저택이 평소와 달리 수선스러웠다.

「생일 축하드려요!」

「공녀님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주방 일동」

「~아가씨의 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드리며~」

저녁에는 손님들을 맞아야 하기 때문일까. 사용인들은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나도 고마운 마음으로 사용인 하나하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특히 기사단 사람들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보고 놀랐던,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인간 탑을 쌓아 현수막을 흔들기까지 했다. 물론 그러다가 먼지 날리면 안 된다며 세바스찬에게 금세 제지당하긴 했지만.

「좋은 아침, 테리.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테리.”

“이야. 공녀가 벌써 아홉 살이라니. 언제 이렇게 컸을까…….”

“당신이 키운 적 없잖아요, 여보.”

“커흠.”

우여곡절 끝에 식당에 들어서자 또 한바탕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가장 처음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공작이었고, 이어서 아메트리스 일가가 활짝 웃어 주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공작의 선물은 파티가 끝나고 받기로 했다. 아메트리스 일가의 선물은 이따가 파티 때 뜯어 볼 수 있게 연회장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다. 나는 후작 부인의 빈틈없는 일 처리에 감탄하며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들었다.

오후 늦게부터 파티가 있는 관계로 점심은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아침 식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든든하게 나왔다.

내 취향대로 후추가 담뿍 들어간 페이스트리수프, 크로아상과 블루베리잼, 살라미, 훈제 연어와 새우가 올라간 아보카도샌드위치, 얼그레이시럽이 올라간 판나코타 등.

평소에도 훌륭했는데 생일상이라고 주방장이 특별히 더 신경을 써 준 것인지 그야말로 감동적인 맛이었다. 베스가 아이의 옷은 특히 편해야 한다며 리본으로 허리둘레를 조절할 수 있게 드레스를 제작해 주었으므로 마음 편히 모든 음식을 깨끗이 해치울 수 있었다.

“연회장 점검은 제가 할 테니까 공녀님은 준비 마치고 쉬고 계세요. 오늘의 주인공이신데 기운이 없으시면 안 되잖아요.”

“고맙습니다, 부인.”

식사가 끝나자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의 의견대로 방으로 돌아왔다. 베스와 미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베스가 오늘을 위해서 만들어 준 드레스는 레몬색이 엷게 감도는 연한 민트색 원단에, 중간중간 채도 낮은 연보라색 리본으로 장식한 드레스였다. 목 주변과 소매, 치마 끝단에 달린 하얀 프릴이 밝은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드레스를 입고 나서 발목 부근에 레이스가 달린 양말을 신고, 굽이 없고 앞코가 동그란 메리제인 구두를 신었다. 머리카락은 양쪽으로 높이 올려 묶고 이리트 염료를 살짝 덧칠한 붉은 열매 같은 구슬로 장식했다.

“휴, 간신히 제시간에 맞췄군요.”

「다행이에요. 고생하셨습니다.」

헛, 어느새 시간이!

밥을 너무 열심히 먹은 탓일까. 따끈한 물에 들어가 씻을 때부터 나른해서 꾸벅꾸벅 졸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베스와 미나가 마지막으로 내 매무새를 점검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별안간 발코니의 문이 달칵 열리더니 릭이 쫑쫑 걸어 들어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테리.>

“어! 뭐야, 밖에는 언제 나간 거…… 응?”

아까 졸다가 확인한 바로는 분명 협탁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가 한발 늦게 그의 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들을 발견했다.

“그건 뭐야?”

<뭐긴 뭐겠습니까. 선물이죠.>

<맞아. 릭이 이거 싱싱하게 보관해야 한다면서 유령들을 냉동 창고 쓰듯이 했다고.>

셀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릭을 화장대 위로 올려 주었다.

나는 여전히 놀람이 가시지 않은 채 얼결에 그가 건넨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셀레나의 말대로, 갓 꺾은 듯한 꽃에서 푸르른 향이 코끝으로 밀려들고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시선을 내리니 희고 노란 꽃다발은 릭의 목에 매인 것과 비슷한 붉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이 리본은 또 어디서 구했어?”

<지난번에 베스라는 사람이 가져왔던 가방에서 떨어졌던 걸…….>

“정말 떨어진 거 맞아요, 셀레나?”

<……음.>

능청스럽게 말을 늘어놓던 셀레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건 절도라고 셀레나에게 잔소리했을 릭도 이번엔 찔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지 마찬가지로 은근슬쩍 꽃다발 뒤쪽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 모습을 보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버딘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몽글몽글 가슴을 채웠다.

“고마워, 정말로. 너무 예쁘다.”

솔직히 유령들에게서는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조차 못 했다. 애초에 그들은 사람조차 아닌데 선물을 구하는 게 쉬울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인사만 받아도 넘치도록 기쁘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니까요. 꽃은 제가 틈틈이 꺾었고, 셀레나와 유령들은 제 몸으로 꽃이 시들지 않게 보관해 주었습니다.>

막상 유령들이 나를 위해서 이렇듯 마음을 써 가며 선물을 준비해 줬다는 말을 들으니 코끝이 찡해졌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양팔을 활짝 벌리고 외쳤다.

“이 귀여운 사람들, 아니 유령들 같으니. 이리 와! 다들 안아 줄…… 악! 잠깐만! 너무 많아! 많다고!”

……외치지 말걸.

* * *

주황빛 하늘 끄트머리에 보랏빛이 번질 무렵, 테레지아 에버딘의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파티는 에버딘 가문이 공식적으로 5년간 해 왔던 칩거를 깨고, 후계자를 사람들 앞에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세상에, 예뻐라.”

손님들은 에버딘 저택의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마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흰가지나무에 탄성을 내질렀다. 나무에는 이리트 염료가 칠해진 작은 조각들이 매달려 있었다.

“소원 나무 때 썼던 방법을 응용했나 보네요.”

환상적인 정원을 구경하다 보니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내려설 때가 되어서야 나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직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번씩 흠칫 어깨를 굳혔다.

「환영합니다.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듯 보였던 장갑이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 에버딘의 ‘저주’ 때문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사용인의 뒤를 따라 연회장으로 이동하다가 벽에 걸린 장식들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 이건…….”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이네요?”

단순한 가랜드인 줄 알았던 것들은 투명 신사 종이 인형이었다. 투명 신사 모양의 종잇조각 사이사이에는 <투명 신사 이야기>의 내용 순서에 맞는 상징들이 앙증맞은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눈앞의 사용인을 자연스럽게 ‘투명 신사’와 겹쳐 보게 되었다. 그러자 거부감과 공포가 서서히 옅어지고 오히려 이곳의 독특한 분위기와 사용인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사람들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또다시 감탄했다.

“어머, 귀여워라.”

파티의 주인공인 테레지아 에버딘이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 이번 파티에는 어린 영식과 영애들도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것을 고려했는지 파티장 안은 웅장하다기보다는 산뜻하고 발랄한 분위기였다.

키가 작은 흰가지나무들이 댄스 플로어의 뒤쪽을 숲처럼 메우고 있었다. 댄스 플로어 중앙에는 눈꽃 모양이 그려져 겨울의 에버딘 숲을 연상시켰다.

곳곳에 쌓인 장식용 눈들은 이리트 염료를 섞은 것인지 은은한 빛을 뿜었고, 민담에 전해져 오는 눈의 요정이나 투명 신사로 분장한 사용인들이 바삐 음료와 음식 등을 나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파티’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연회장의 모습에 손님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워했다. 심미성에다가 사용인들의 영리한 일 처리와 맛있는 음식, 음료가 곁들여지니 파티는 그야말로 물 흐르듯 이어졌다.

테레지아는 손님들이 어느 정도 도착한 후, 공작의 손을 잡고 연회장에 도착했다.

“다들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레지아 에버딘이에요.”

생글 웃은 테레지아가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폈다. 눈썰미 좋은 몇몇 사람들은 테레지아의 행동거지가 상당히 우아하고 깔끔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흐음.’

‘생각보다…….’

테레지아가 요즘 급격히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오블렌 자작가 출신이기에 그녀를 은근히 깔보던 귀족들은 슬쩍 불손한 시선을 철회했다.

아이의 곁에서 매섭게 웃는 샤를리즈 아메트리스의 존재도 그들의 그런 태도 변화에 한몫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생일을 축하드려요.”

“지난번에 제 아이와 함께 다과회를 즐기셨다지요? 저는…….”

테레지아의 인사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그녀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아이답게 차려입고 생글생글 웃는 테레지아는 약간의 적의도 녹아내리게 할 만큼 앙증맞았다.

그렇게 테레지아가 순조롭게 인사를 나누던 중.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사용인들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글씨를 크게 적은 현수막을 펄럭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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