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남부는 어떤 곳이에요?”
악령을 생각하니 괜히 신경이 쓰여서 되물었다. 후작 부인은 선선히 답해 주었다.
“항구와 바다가 가까워서 정보도, 희귀한 약재도 많은 곳이에요. 그리고…….”
물 흐르듯 말을 잇던 후작 부인이 돌연 멈칫했다. 그것이 의아해 눈을 깜박이는데, 그녀가 재빠르게 웃음 지었다.
“아니에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엥?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기울었다.
‘……뭔가 숨기는 거 같은데.’
나는 그 상태로 후작 부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때는 상대를 추궁하는 것보다 무구한 눈길로 지켜만 보는 것이 더 큰 압박이 된다고 책에서 그랬으니까!
역시나 책이 옳았는지 후작 부인은 웃는 얼굴로 애써 내 눈을 피하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시선을 맞춰왔다.
“……어차피 공녀님께서도 언젠간 알게 되실 테니,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 보이긴 하네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현 크렘위든 제국의 남부는 원래 그러젠트라는 이름의 왕국이었어요.”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에버딘 저택에 와서 세바스찬에게 얼마나 열심히 수업을 들었는데! 그쯤은 당연히 알고 있지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쭉 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후작 부인이 나지막한 물음을 뱉은 건 그때였다.
“그럼 그러젠트를 멸망시킨 게 현 에버딘 공작님이시라는 것도 아시나요?”
“옉?”
으, 으악. 혀 씹을 뻔했어.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한 소리가 튀어 나갔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혓바닥이 멀쩡한지 확인한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후작 부인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에버딘 공작께서 저주에 걸리기 전까지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정복 전쟁을 벌였다는 건 아시죠?”
“……네.”
“그러젠트는 공작님께서 정복한 곳 중에서는 작은 편이었지만, 막내 왕자의 저항이 특히 거셌어요. 그 바람에 공작님께서도 유일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하죠.”
“…….”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 공작님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니. 그렇게 강해 보이는 사람이 위험했다니.
순간이지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새삼 공작의 존재가 내 안에서 그만큼의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후작 부인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조심조심 토닥였다. 그녀가 엷게 웃음 띤 얼굴로,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결국엔 승리하셨고, 그러젠트는 제국의 남부가 되었죠. 처음에는 이래저래 자잘한 사건 사고가 많았다지만, 지금은 적잖은 세월이 흐른 덕에 다들 화합해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렇구나…….”
“네, 제가 하려던 말은 그게 전부예요. 아무래도 에버딘의 사람에게…… 그리 듣기 좋은 이야기만은 아닐 듯해서 고민한 거랍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여전히 심란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과 ‘에버딘의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 * *
테레지아가 샤를리즈 아메트리스와 함께 있는 사이.
릭은 에버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키득거리며 자신을 뒤따르는 자루 모양 유령들을 돌아보며 손을 휘저었다.
<따라오지 말라니까요.>
<싫은데!>
<싫거든!>
<그럼 뭐 해 줄 건데?>
그러나 자루 모양 유령들은 한층 더 깐족거리기만 했다.
처음 릭이 곰 인형 안에서 움직인다는 걸 알고는 놀랐지만, 이제는 두려워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장난을 걸어 대곤 했다.
릭은 도저히 사라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유령들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고 갈 길을 가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제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들은 자연히 쫓겨나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에 자루 모양 유령들이 장난스레 등을 떠미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용인들에게 들킬 뻔한 적도 있었고. 혹시 지금 저택에 없는 걸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릭은 끝내 자신이 찾던 이를 발견했다. 상대는 에버딘 저택의 동쪽 별채, 가장 구석진 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왜 이런 곳에 계십니까.>
<으으응? 뭐야……. 아, 너로군.>
빈 술병을 눈 위에 얹어 두고, 낡다 못해 곧 부서질 것 같은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거지 유령이 앓는 소리를 냈다.
술병을 슬쩍 들어 릭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다시 눈을 감으며 혀를 찼다.
<남의 잠 방해하지 말고 가라.>
<유령은 잠이 없죠.>
<…….>
릭이 가볍게 내뱉은 말에 거지 유령의 하관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두 유령 사이의 공기가 소리 없이 경직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자루 모양 유령들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까르륵댈 뿐이었다.
<맞아, 맞아! 우리는 잠 안 자도 돼!>
<잘 시간에 놀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아!>
그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거지 유령이 한숨을 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자루 모양 유령들이 별안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산 채로 돌이 된 듯한 모습의 그들이 방 밖으로 둥실둥실 움직였다.
철컥.
자루 모양 유령들이 모두 방문을 나서자 거지 유령이 손가락을 한 번 더 까딱였다. 그러자 방문이 닫히며 잠금쇠가 돌아갔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거지 유령의 모습도 달라졌다. 눈 깜박할 새에 ‘하데스’의 모습이 된 그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릭을 노려보았다.
<영악한 놈. 금제를 교묘히도 피해 가는군.>
<영악하다기보다는 영리하다고 해주시겠습니까?>
하데스는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방자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릭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발설할 수 없는 금제를 걸어 두었다. 하지만 릭은 ‘하데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되, 그가 유령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내뱉음으로써 은근히 그를 압박했다.
조금 전에 릭을 따라온 유령들은 힘도 약하고 바보 같아서 망정이지. 만일 인간형쯤 되는 유령이었다면 릭의 말에서 기묘함을 감지하고 하데스의 정체를 의심할 수도 있었다.
릭이 제 금제를 파훼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하데스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릭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감히 내 잠을 방해할 만큼 중요한 일이냐?>
<예.>
릭이 진중한 태도로 답했다. 하데스의 얼굴이 약간 가라앉았다. 금빛 눈에 엷은 긴장감이 스몄다.
‘설마…….’
하데스는 최근 자신이 염려하던 일이 벌써 현실로 나타난 것일까 싶어 어깨를 굳혔다. 하지만 그 긴장은 곧 쩡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곧 테리의 생일이잖습니까.>
<……?>
하데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날 때부터 ‘신’이라는 존재였던 그의 청력이 이상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큼 릭이 내놓은 게 예상 밖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혹시…… 저번처럼 저를 잠깐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수는 없을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최근의 일도 그렇고, 되도록 그 모습으로 선물을 전해 주고 싶어서요.>
그러거나 말거나 릭은 침착한 태도로 말을 맺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하데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허.>
하데스는 난생처음 ‘황당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발칙하게도 신의 휴식을 방해하기에, 뭔가 굉장히 심각하고 대단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는데. 고작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생일에 멋지게 등장하고 싶다는 이유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데스는 황당함을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대꾸했다.
<너도 안 될 걸 가정하고 날 찾아온 거겠지.>
<…….>
릭은 말없이 주먹을 –그래 봤자 쥐기 전과 큰 차이가 없긴 하지만- 쥐었다.
릭은 하데스를 찾아오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고심했다.
하데스에게 인간의 이해관계나 감정 등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건국제 날 그의 본성을 엿보았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못하고 하데스를 찾아온 건.
테레지아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그녀에게 자신이 신기루나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리고 그녀가 데미안 랑바드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에 대한 호감까지 접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데스는 곧 당황을 갈무리했다. 릭 역시 본인의 부탁이 주제 넘는다는 걸 아는 듯했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데 쓸 힘 없다. 안 그래도 여기서 숨 돌리고 바로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데 그 잠깐도 못 참고 방해하는군.>
<자리를 비우십니까?>
<그래. 네가 좋아하는 그 아이의 생일파티가 끝나고도 며칠은 더 있어야 돌아올 테니 꿈 깨라. 돌아오고서도 할 일이 넘쳐나니까.>
하데스의 눈이 찰나 날카롭게 어딘가를 향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릭은 그에게서 일순 느껴진 섬뜩함에 놀라 저도 모르게 하데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쪽?’
하지만 고개를 돌려 보아도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단지 하데스가 바라보던 방향이 남쪽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하데스는 곧 혀를 쯧 차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릭은 그가 저승으로 가려 하는 것을 깨닫고 잠자코 뒤로 물러섰다.
릭의 예상처럼 곧 하데스의 주위로 희뿌연 빛이 일기 시작했다.
희뿌연 빛이 하데스의 몸을 반쯤 삼켰을 때. 무언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데스가 고개를 휙 돌려 릭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기묘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껍데기에 집착하지 마라. 그 아이는 네가 지금 모습으로 목에 리본을 묶고 너 자신을 선물로 주겠다고 해도 마냥 좋아할 거다.>
<리본은 이미 묶여 있습니다만.>
<아.>
<…….>
<…….>
하데스는 말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