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 *
미나의 말을 듣고 헐레벌떡 정문으로 나가 보았더니 공작은 이미 나와 있었다.
가볍게 숨을 고르며 공작 옆에 서는 순간, 아메트리스 후작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제르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리! 오랜만이야!”
조금은 수척해진 듯한 얼굴을 보니 걱정도 들었지만 반가움이 더 컸다.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그를 반겼다.
“안녕, 테리.”
제르비스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뜻 메마르게도 보였던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제르비스가 빠른 걸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비스듬히 살짝 숙여 공작에게 간단히 인사한 그의 얼굴이 금세 염려로 물들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인사하자마자 걱정부터 하는군. 큰 병도 아니고, 그냥 잠깐 화딱지가 나서 쓰러졌던 것뿐인데. 그것도 잘 복수했고.
내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듯 구는 그의 태도에 조금 멋쩍어져서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가 떠오른 기억에 표정을 바꾸어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그러는 너야말로 감기 심하게 걸렸었다며. 이제는 괜찮은 거야?”
“어떻…… 게 알았어?”
붉은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제르비스는 누가 봐도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내가 알아서 놀랐냐? 이 누님의 정보력이 이 정도란다. 엣헴.
속으로 한번 우쭐거린 후 팔짱을 꼈다. 턱을 치켜들고 나름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멀린이 말해 줬어. 소꿉친구들이랑 나 차별해? 왜 나한테는 아프다고 말 안 한 거야. 그 바람에 걱정도 못 했잖아.”
“그, 네가 그때 한창 바빠 보여서.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그보다 멀린이란 말이지…….”
제르비스가 난처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러면서 끝에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는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나한테 아픈 걸 숨겼단 말이지. 이놈 시키.
한숨을 푹 내쉬고, 제르비스와 눈을 맞춘 채 타이르듯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친구가 먼저지.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꼭 말해야 해, 알았지?”
“알았어. 너도 그러기야.”
제르비스가 작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참나, 귀여워서 봐준다. 그런 마음으로 피식 웃고 마주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걸었다.
그 상태로 제르비스와 마주 본 채 헤헤 웃고 있으려니, 마차에서 두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 내려섰다.
한쪽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메트리스 후작이 제르비스의 뒤통수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하여간 녀석. 나랑 놀 때랑 반응이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아빠 섭섭하다.”
그때 후작의 곁에 서 있던, 부드럽게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여인이 태연히 입술을 뗐다.
“나 같아도 당신보다는 공녀님이랑 노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여보, 진심이야? 나 방금 좀 상처받았어.”
“그럼 당연히 진심이죠. 내가 빈말하는 거 봤어요?”
“아니…….”
후작이 여인의 말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우물거렸다. 여인은 잘게 웃고는 후작의 어깨를 토닥이고 고개를 돌렸다.
앗, 눈 마주쳤다.
먼저 인사하려던 차에 여인이 한발 먼저 몸을 낮췄다. 그녀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처음 인사드려요, 에버딘 공녀님. 샤를리즈 아메트리스라고 합니다. 제르비스의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으앗, 코앞에서 미인의 미소가! 왠지 눈이 부신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가, 황급히 무릎을 굽혔다 펴며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후작 부인. 에버딘에 오신 걸 환영해요.”
순간 후작 부인의 눈빛에 날카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 눈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는데, 그녀가 곧 싱긋 웃었다.
“자세가 아주 훌륭하시네요. 아, 죄송합니다. 예법을 살피는 게 버릇이라서요. 소싯적에는 예법 하나로 먹고살았다 보니.”
후작 부인이 말을 잇다가 말고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황급히 덧붙였다. 정말 미안해하는 기색이었기에 괜찮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곁에 서 있던 제르비스가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댔다.
“엄마 젊었을 때 별명이 사교의 교본이었대. 나도 그래서 예법 배울 때 맨날 혼났어.”
“호오.”
교본이라고 불릴 정도면 정말 대단한 능력자이신가 본데? 새삼스럽게 후작 부인을 올려다보다가 불현듯 머릿속에 생각이 번뜩였다.
핫. 그럼 혹시?
“저, 부인.”
“말씀하세요, 공녀님.”
후작 부인이 상냥히 답했다. 그 태도에 조금 전 든 생각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조금 더 마음이 기울었다.
양손을 공손히 배꼽 위로 모아 올리고 –내가 아는 가장 공손한 자세였다 – 조심조심 입술을 뗐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 생일파티 준비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다들 연회를 전문적으로 준비해 본 경험은 적다 보니 이래저래 어설퍼서요.”
이분이다! 이분을 나의 고문으로!
초면에 너무 탐내는 티를 내면 부담스러울까 봐, 애써 가벼운 투로 물었다. 하지만 심장은 벌써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물론 나도 기본적인 예법이나 처세 등은 라바디에 부인, 세바스찬을 통해 배우긴 했다.
하지만 라바디에 부인은 집안 사정이 썩 좋지 않아 큰 파티를 열어 본 경험이 없었고, 선대 에버딘 공작이 일찍 부인을 잃은 후에 에버딘 공작가에서는 따로 연회를 주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내 생일 파티가, 에버딘 공작가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주최하는 행사라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오블렌 자작령이 달린 중요한 파티인데, 물 샐 틈 없이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은 도움을 청하기에 적격이었다.
‘그래도 아들 친구인데. 좀 좋게 봐주지 않으셨으…… 려나?’
배꼽 위에 얹은 손을 꼼지락대다가 간지러워서 그만뒀다.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답을 기다렸는데, 의외로 후작 부인은 곧장 반색했다.
“당연히 괜찮죠. 오히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니 기쁜걸요? 영광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오잉. 생각보다 너무 순순히 부탁이 받아들여진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냉큼 감사 인사를 하며 헤헤 웃었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떨자 공작이 상체를 숙여 내 목도리를 더 단단히 매 주고는 다시 몸을 바로 했다.
「날이 추운데, 아이들이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군. 이만 들어가지, 다들.」
“그래, 그래. 파티도 다 건강해야 즐길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들어갑시다!”
아메트리스 후작은 오랜 친우인 발레리안과 나, 그리고 제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게 꽤 기쁜 모양이었다.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팔을 넓게 벌려 사람들의 등을 감싸며 저택 쪽으로 발을 옮겼다. 우리는 동토 어딘가에 서식한다는 동물처럼 옹기종기 몸을 붙이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 * *
후작 부인이 내 생일 파티 준비를 돕기로 했고, 아메트리스 후작 일가도 참석할 예정이었기에 그들은 파티 당일까지 에버딘 저택에 묵기로 했다.
나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과 함께 생일 파티 준비에 열중했다.
「무리하면 안 된다, 테리. 알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게 맡기고…….」
공작은 돕고 싶은지 종종 내 곁으로 다가왔지만, 공작이 고른 무지개색 땡땡이 원단을 본 후작 부인이 단호히 그를 쫓아냈다.
……공작님, 처음엔 난감해하더니 내가 사 준 저 깃펜도 사실 엄청 마음에 드셨던 걸까? 아니면 쓰다 보니 물든 걸까?
거참 사람의 취향이란. 알 수 없는 일이로다.
그렇게 공작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는 사이, 후작 부인은 제르비스의 약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곳들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주었다. 그녀가 워낙 생생하게 상황을 묘사해 준 덕에 눈에 파묻힌 저택 안에 앉아 대륙을 한 바퀴 돈 느낌이었다.
“우와아하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괴상했는지 후작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공녀님께서는 말하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능을 지니셨네요. 사교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랍니다.”
“아니에요. 다 후작 부인께서 재밌게 얘기해 주셔서 그래요.”
“거기에 겸양까지. 정말 훌륭하시네요. 지금까지 몇몇 영애들을 가르쳐 봤지만, 공녀님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었답니다.”
“헤, 헤…… 크흠.”
토미가 칭찬은 악령도 춤추게 한다고 했었지. 후작 부인이 자꾸만 칭찬해 주는 통에 입꼬리가 또 슬금슬금 올라가려 했다.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다잡긴 했지만.
그때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 둔 창문에서 찬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후작 부인이 손짓해 사용인에게 창문을 닫게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에 남편을 따라 몇 번 오간 적이 있다지만…… 에버딘의 이 추위는 정말 적응이 되지 않네요. 얼마 전까지 따듯하고 습한 남부에서 머물렀더니 더 그런 것 같아요.”
‘남부…….’
‘남부’라는 단어가 유난히 귀에 콕 박혀 드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얼마 전에 셀레나가 해 주었던 악령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