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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06) (106/124)

<106화>

에버딘 저택에는 수없이 많은 유령이 머물고 있어서, 처음에는 착각이려니 했다. 하지만 좀 지켜보다 보니 착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 때는 말이다, 이 오리우스 1세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다!>

<대체 몇 세기 전 얘기를 하는 거람.>

<꼰대! 꼰대 영감!>

<뭣이! 거기 안 서느냐!>

<시이이잃어!>

<그렇게 대접받고 싶으면 네가 뒤진 데로 가던가! 왜 우리 영역에서 행패야!>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기존 유령들이 새로 나타난 유령들과 시비가 붙어 정신없이 추격전을 벌여 댔으니까. 사실 지금도 하늘을 배경으로 추격전을 펼치는 유령이 하나, 둘, 셋…… 네 쌍이군.

‘유령은 살던 데를 떠나면 힘이 약해질 텐데……?’

지금 에버딘 저택에 머무는 유령들도, 대부분 공작가 사람들이 저주에 걸리자 그 기운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이만한 수의 유령들이 소멸의 위험도 각오하고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날 이유가…… 있나?

<아, 쟤들 말이구나. 그, 어디더라? 제국 남부 어디에서 악령이 나타났다더라고.>

그때 셀레나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무래도 에버딘 저택에서 가장 강한 유령이 셀레나이다 보니, 그녀가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놀라운 건 말에 담긴 내용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 악령?”

<응. 그래서 잡아먹힐까 봐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 왔다나? 쟤네 다 남부 출신이야.>

“호옹…….”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반응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악령을 피해서 도망 왔다는 건, 악령이 쟤네를 노렸다는 말 아녀?

악령이 완전 바보가 아니라면 도망치는 유령들을…… 쫓았겠지?

그리고 도망친 유령들은 지금…… 우리 집에 있지?

‘스읍.’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물론 악령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 굳이 도망친 애들을 잡겠다고 제국의 사 분의 일 정도를 가로질러 힘을 낭비하려 하지는 않을 듯하다만. 으으음.

<미나가 옵니다.>

그때 릭의 말에 생각이 끊겼다. 그의 말대로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 미나가 종이를 내밀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괜찮다면 잠깐 들러 달라 하셨어요.」

“잉? 무슨 일로요?”

「따로 전해 들은 건 없어서요. 직접 여쭤보시는 건 어때요? 보니까 조금 전에 세바스찬 님이 꿀 우유 재료를 들고 집무실로…….」

“집무실이라고요? 알았어요!”

‘꿀 우유’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벌떡 일어나 릭의 손을 잡은 채 후다닥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 뒤에서 미나가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곧 공작의 집무실 문이 가까워졌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다.

‘공작님!’

“꿀 우유!”

“…….”

“……핫.”

생각이랑 말이랑 반대로 됐잖아. 이런 수치가.

한발 늦게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쩡 굳어졌다.

머들러를 젓던 공작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져 눈을 깜박이다가, 곧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들어 본 공작의 웃음소리 중에 가장 크고 길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웃음소리를 모른 체했다. 난 지금 공작님 목소리를 못 듣는 상태니까, 티 내면 안 된다. 티 내면 안 된…… 크윽.

양 주먹을 움켜쥐며 수치스러움을 견디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턱을 치켜들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꿀 우유가 아니라, 공작님이 타 준 꿀 우유가 그만큼 좋다는 거예요.”

“…….”

“아…… 아셨죠? 그런 거라구요.”

공작의 대답이 두려워 후다닥 말을 마무리하고 소파에 올라가 앉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방금 얘기 더 꺼내면 물어 버릴 것이다.’

……라는 강한 의지를 담아서.

“흠.”

다행히 그 뜻이 잘 전해졌는지, 공작은 곧 웃음을 그치고 머들러를 마저 휘저었다. 그가 꿀과 따끈한 우유를 충분히 섞은 후 잔을 내게 내밀며 웃었다.

「맛있게 마셔 줘서 기쁘구나.」

“헤헤, 저야말로 매번 맛있게 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활짝 웃으며 냉큼 잔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크으으, 하고 걸쭉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제야 꿀 우유에 밀려났던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이곳에 온 목적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다른 건 아니고…… 곧 네 생일이잖니. 슬슬 축하 파티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

“아.”

정말 뜻밖의 말이었던지라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러네, 나 곧 생일이네? 에버딘에 온 후로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공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최근 몇 년간의 내 생일은 늘 오블렌 저택의 유령들과 함께였던지라, 다른 누군가가 내 생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뭐야, 진짜 기분 이상해.

「물론 필수적인 건 아니니, 피곤하다면 못 들은 걸로 해도 괜찮단다. 아무래도 더 쉬는 편이…….」

“아뇨! 아니에요.”

공작은 아무래도 내 침묵이 길어지는 이유가 ‘파티가 싫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바꾸는 걸 보면.

그게 아니라 그냥 잠깐 감상에 빠진 것뿐입니다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제 다 나았어요.”

「하지만…….」

“파티를 안 열면 사람들이 오히려 저를 더 약골로 보지 않을까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거기에 에버딘의 건재함도 보여 줘야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섰다. 허리에 손을 얹고 목을 쭉 빼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덧붙였다.

“아! 랑바드 공작가에도 초대장 보내면 안 돼요? 어차피 안 오겠지만.”

최근에 데미안 랑바드가 내게 한 짓이 있는데, 사람들 눈초리를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파티에 올 생각은 못 하겠지.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약 올림이자 조롱이었다.

헹, 느이 집에는 이리트 염료 팍팍 쓴 파티 없지? 오고 싶지? 못 올 텐데 어쩌나, 가엾어라.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러자 공작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네 생일이니까.」

“헤헤, 네! 베스랑도 상의해 봐야겠다.”

「그래. 달리 가지고 싶은 선물은 없고?」

“흠.”

그의 말에 잠시 고민에 잠겼다. 가지고 싶은 거…… 아!

“하나 있긴 한데…….”

「뭔데 그러니?」

공작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무슨 선물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던 모양이다.

“으음, 당장은 조금 그렇고.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해서 그런데, 파티 끝나고 말씀드리면 안 돼요?”

「……? 그래, 알았다.」

의아해하던 공작은 곧 신뢰 가득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손길을 즐기며 속으로 씩 웃었다.

‘후후, 때가 됐다.’

오블렌 자작 일가를 내쫓고 엄마의 유품을 되찾을 때가!

‘생일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까, 그동안 벌어들일 여유 자금까지 생각하면 충분해.’

내가 에버딘 공녀로서 열심히 돈을 벌고,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던 건 분명 에버딘 사람들이 좋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오블렌 자작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파티가 끝나면 공작님한테 오블렌 자작령을 사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이리트 염료를 사용한 파티를 한껏 즐기고 나면, 사람들은 에버딘이 완전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모은 돈과 에버딘이 되찾은 위세를 이용해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일 수 있다.

‘이제 정말 조금이다!’

지금까지 망할 자작에게 붙잡혀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엄마, 제가 곧 구해드릴게요!

* * *

「데미안 랑바드가 너를 속이려 했다는 것은 전해 들었어.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이 입단속을 하고는 있다지만, 황궁에는 워낙 많은 이야기가 흘러들어 오다 보니…….

랑바드 공자는 원래도 수도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악명이 높았어. 그래서 나랑 클라센 소후작도 어릴 적에는 그와 잠시 어울리다가 워낙 예의가 없어서 멀리했고.

하도 영애들을 울리고 다녀서 랑바드 공작이 영지로 끌고 내려간 후로는 잠잠한 줄 알았더니, 설마 그렇게 큰 사고를 칠 줄이야. 이제 몸도 마음도 괜찮은 거지, 테리?

어지간하면 싸워서 이기라고 하고 싶지만, 걔도 어지간히 독한 놈이라서.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라는 말도 있잖아. 너도 그냥 무시하는 편이 덜 귀찮을 거야.

추신. 보내 준 <투명 신사 이야기> 애장판은 잘 받았어. 친구를 잘 둔 덕분에 이리트 염료를 이렇게나마 구경하게 되네, 고마워. 아버지에게 빼앗기지 않게 조심히 볼게.

-칼리오스 드 램바드 마인하르트 」

하여간, 그 자식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구나. 그때 싹을 잘라 버렸어야 여러 사람이 피해를 안 보는 건데…… 떼잉, 쯧.

아쉬움에 혀를 끌끌 차며 칼리오스의 편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미나가 들어왔다.

「아가씨. 아메트리스 후작가 분들이 도착하셨어요.」

“지금 갈게요!”

제리다! 제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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