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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05) (105/124)

<105화>

“도, 도련님!”

마차 주위에 서 있던 랑바드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기겁하며 데미안을 살폈다. 그들 중 몇은 당장에라도 항의할 것처럼 사나운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사과하러 온 입장인 데다가 그가 조금 전 나를 해코지하려 했음이 너무도 명백했으므로 그들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던 이들도 공작과 시선이 한번 마주치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에게 보란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손목을 돌렸다.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힘을 써서 그런가, 피곤하네요. 그럼 안녕히. 다시 보지 맙시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공작에게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주저하지 않고 나를 안아 들며 몸을 돌렸다.

“도련님, 피가 계속…….”

“젠장, 내놔!”

공작의 어깨 너머로 힐끔 보니, 데미안은 사용인이 내민 손수건을 신경질적으로 빼앗아 제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데도 피가 잘 멎지 않는 듯 오만상을 쓰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꼴을 보자니 아주 속 시원했다.

「잘했다, 테리.」

「완전 멋있었어요.」

「한 대만 때린 게 아쉽긴 하지만, 저쪽은 피를 봤으니까요! 쌤통이다.」

공작은 저택 안까지 들어온 후 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사용인들과 손뼉을 맞부딪혀 설욕을 축하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이겼다!>

<이겼어!>

<와아아아!>

방 안에서는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것인지 자루 모양 유령, 인간형 유령 할 것 없이 모두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이고, 정신없어라. 눈이 뱅글뱅글 도는 기분에 고개를 푸르르 터는 사이, 유령들 틈을 헤치고 릭이 다가왔다.

내 앞에 멈춰선 릭을 안아 올리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툭툭 쓰다듬었다. 릭이 아쉬움이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 같네요.>

“걔는 내가 랑바드랑 이리트 염료 거래 안 하겠다고 한 말만으로도 가는 길이 가시방석일걸? 애초에 이리트 염료를 가지고 싶어서 나를 속인 거랬으니까.”

후후, 아픔은 한순간이지만 욕심은 끝이 없지. 평생 고통받아라, 쓰레기야!

그리 생각하며 후후후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평소 같았다면 또 무슨 사악한 생각을 하는 거냐며 나를 놀렸을 릭은 조용했다. 그는 유령들을 관찰하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잉?’

묘하게…… 꿍꿍이가 있는 느낌인데. 아닌가? 착각인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어보려 했는데,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미나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며 나를 데리러 왔다. 그 바람에 별수 없이 릭과 유령들을 방에 두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 * *

“그 망할 계집애가……!”

데미안은 마차 좌석에 앉은 채, 아직도 피가 멎지 않은 코를 손수건으로 틀어막고 씩씩거렸다. 그의 얼굴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버딘 공녀에게 사과하고 오거라. 설마 그 정도도 못 하진 않겠지.’

랑바드 공작이 그렇게 말했을 때, 데미안은 대번에 반발하려 했으나 지은 죄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공작이 붙인, 사용인을 가장한 감시역들을 달고 에버딘 공작저에 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분했는데, 테레지아 에버딘은 한참이나 그를 농락하다가 사과를 안 받아 주겠다는 망발을 지껄이고는 그에게 주먹질까지 했다.

겉보기에는 밀치기만 해도 저만치 날아갈 것처럼 말라비틀어졌는데, 주먹만은 이상하리만치 매웠다. 데미안은 자신이 그깟 여자애의 주먹질에 아파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써 코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을 무시했다.

덜컹!

그때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갑작스레 멈춰 섰다.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있는 바람에 하마터면 창에 머리를 박을 뻔한 데미안이 울컥 소리쳤다.

“뭐야!”

사용인들이 우왕좌왕하다가 그 외침에 마차 창가로 다가왔다. 창문을 올린 그들이 난처한 기색으로 보고했다.

“도, 도련님, 그게.”

“마차 바퀴가 안 움직입니다.”

“죄송합니다. 빨리 살펴보겠습니다.”

몇몇은 잔뜩 성이 난 데미안에게 고개를 꾸벅거렸고, 나머지는 마차 바퀴를 살폈다.

마차 바퀴는 겉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애초에 에버딘 공작저로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잘 굴러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누가 접착제라도 붙인 양손으로 움직이려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당황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힘 좋은 사내들이 여럿 붙어 바퀴를 돌려 보려 했으나 바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령에라도 홀린 기분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진짜 유령들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끄으으응!>

<야, 거기 반대쪽! 설마 벌써 힘 빠지는 건 아니지?>

<다들 힘줘, 힘!>

유령들은 굳이 숨을 쉴 필요가 없는데도 호흡을 멈춘 채 안간힘을 쓰며 마차 바퀴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용인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데미안은 사용인들이 갑자기 멍청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왕좌왕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소리쳤다.

“마차 관리 똑바로 안 해? 올 때까진 멀쩡했던 마차가 왜 갑자기 안 굴러가는데!”

“죄, 죄송합니다! 우선 말이라도 구해 오겠습니다!”

사용인들은 그제야 마차 바퀴를 움직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근처 여관으로 달려가 말 몇 필을 끌고 왔다.

사용인의 우두머리 격인 이가 데미안과 함께 말에 올라탔고, 최소한의 호위들도 각각 말에 올랐다. 우두머리가 말에 타지 못한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도련님을 모시고 먼저 돌아갈 테니, 마차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고 뒤따라와라.”

“알겠습…….”

<에비!>

히이잉!

사용인들이 막 인사를 나누고 갈라서려던 그때. 한 무리의 유령들이 장난스러운 외침을 내뱉으며 말들을 지나쳤다.

찬물이 와락 쏟아지는 듯한 감각에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고 날뛰었다. 마차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으, 으악!”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가, 갑자기 말이 왜……!”

“잡아, 잡아!”

말 위에 올라 있던 이들은 낙엽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미안은 우두머리가 급하게 제 몸으로 감싸 준 덕에 다치지 않았지만, 놀라서 겅중겅중 뛰던 말들은 곧 사용인들에게서 제 고삐를 낚아채 물고 도망쳐 버렸다.

연이은 일들에 사용인들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말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 두목 건드리래?>

<쌤통이다, 멍청이들!>

그 모습을 본 유령들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조금 전 에버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이대로 보내기엔 아쉽지 않아? 여긴 우리 영역이잖아.>

테레지아가 공작과 식당에 있는 사이. 셀레나는 에버딘 저택의 유령들을 모아 두고 씨익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유령들의 입가에도 서서히 스산한 미소가 피어났다.

유령의 본질은 짓궂음, 장난기다. 테레지아가 에버딘 저택으로 온 후로는 그녀를 위해 산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지만…….

그건 테레지아의 적에게는 해당이 없는 이야기였다.

테레지아는 본인의 복수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듯했지만, 유령들이 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셀레나의 뒤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던 릭이 담담히 덧붙였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쳤다가는 악령이 될 수도 있으니…….>

<적어도 에버딘령만큼은 편하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야겠지. 그래야 다시 접근할 생각을 안 할 테니.>

겉모습은 곰 인형이었으나, 그의 분위기만큼은 더없이 섬뜩했다.

릭은 테레지아가 제 곁에 오래 머문 유령들은 대개 미약하게나마 물리력을 가지게 된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그것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게 대체…….”

랑바드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다른 말이나 탈것을 구해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동물들이 도망치거나 멀쩡하던 바퀴가 고장 나는 통에 사방에서 외면당했다.

마차에 매인 말들마저 사람을 태우거나 마차를 끌게 하려면 날뛰어 대는 통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데미안을 포함한 일행은, 말을 바로 옆에 두고도 직접 마차를 밀며 걸어서 에버딘령을 빠져나가야 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며 수군거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데미안과 사용인들은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들의 등 뒤에서 유령들이 소리 높여 깔깔댔다.

* * *

아휴, 평화롭다.

점심을 먹고 나서 소화도 시킬 겸, 검댕이와 함께 정원을 한 바퀴 뛰고 현관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모처럼 날이 맑아 햇살이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만 쏟아졌다.

공기는 서늘하고, 등 뒤는 검댕이가 쿠션처럼 받쳐 주고. 햇빛은 따듯하고, 데미안은 코피 흘리면서 꺼졌고…….

“으허으허허…….”

<으앗, 깜짝이야. 뭔 여덟 살짜리가 여든 노인 같은 소리를 내?>

모처럼 마음도 몸도 평화로워 절로 노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셀레나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기에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이제 곧 아홉 살이거든요!”

<여덟이나 아홉이나, 아직 아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네 살 곰돌이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거든.”

무릎에 앉은 릭의 코를 툭 튕기고 다시 검댕이에게 몸을 기댔다.

그렇게 한껏 겨울 낮의 엷은 햇빛을 즐기다가, 문득 위화감이 느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어째…… 못 보던 유령들이 좀 많아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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