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저 사과받을래요!’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후. 나는 공작을 비롯한 에버딘 사람들에게도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이제 걔가 가짜라는 것도, 랑바드 공자라는 것도, 인성 파탄 싸가지라는 것도 알겠다. 화병으로 –주치의도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고 하니 아마도- 앓아누웠던 것도 회복됐겠다.
남은 건 응징뿐이다!
「와, 뭐 그리 영악한 새끼가 다 있대요? 욕보셨네요, 아가씨.」
「그 미친 새끼가…….」
「아, 아이고! 여기 벌레가 앉았네!」
에버딘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나와 함께 분노해 주었다.
미나는 조금 무서울 정도로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중간에 레딘이 당황하며 그녀의 종이를 낚아채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못 봤다만.
공작은 진즉 랑바드 공작가에 항의 서신을 보내 두었다고 한다.
「랑바드 공작에게는 이미 공자를 보내 직접 사과하게 하라고 이야기해 두었다. 공작이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조차 거절한다면 이쪽에서 직접 쳐들어갈 명분이 생길 테니 그도 나쁘지 않지.」
‘물론 사과 안 하러 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했지.’
랑바드는 원래도 에버딘과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다. 사과해서 얻을 게 없기에 공작의 서신을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공작은 차라리 그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 자신이 직접 손을 쓸 수도 있다고.
그것도 좋지만, 나는 역시 내 손으로 직접 데미안을 조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를 확실히 작살 낼 수 있을지, 유령들과 함께 열심히 논의 중이었는데…….
「랑바드 공자께서 정문 앞에 계십니다. 사과……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에에엥?
* * *
‘대체 무슨 꿍꿍이지?’
놀랍게도 세바스찬이 전해 준 말은 사실이었다. 그 또한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세바스찬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랑바드 가문 문양이 찍힌 마차 앞에 데미안이 내려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쭈, 표정 봐라?’
사과하러 왔다면서 저렇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누가 봐도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겠죠? 바보죠? 멍청이죠?
「어떻게 하고 싶니, 테리.」
내 곁에 서 있던 공작이 서느렇게 가라앉은 눈으로 데미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하겠다는, 제법 든든한 태도였다.
그에게 씨익 웃어 주고 보란 듯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비틀거렸다. 오블렌 저택에서부터 갈고닦아 온 연기력을 뽐낼 시간이었다.
“직접 사과하러 왔다니 기쁘지만, 아직 열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건지 어지러워요. 좀 기다려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처량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세바스찬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가 곧장 내 뜻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설마 사과를 하러 오셨다는 분이 그조차 기다리지 못하실 리는 없으니까요.」
세바스찬은 곧장 밖으로 나가, 철창을 사이에 둔 채 데미안에게 내가 한 말을 전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마차에 올라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랑바드 공작이 시켰나 보네.’
가출했었던 일 때문에 밉보여서, 나한테 사과하고 오라고 한 말을 꼭 지켜야 하는 상황인가 보지.
‘그런데 내 알 바는 아니다, 뭐. 헹.’
저 태도로, 사과하러 온 것에 본인 의지는 한 톨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확실해졌으니 나도 거리낄 게 없지.
“피크닉 갈까요, 미나? 햇빛을 받으며 쉬면 좀 나아질 것 같기도 하고.”
「좋죠, 아가씨. 바로 준비해 올게요.」
미나는 번개가 울고 갈 속도로 정원에 자리를 마련했다. 데미안이 우리를 훤히 볼 수 있는, 그러나 목소리가 닿기에는 부족한 거리의 완벽한 위치 선정이었다.
“아이고, 좋다.”
두툼한 담요를 두르고, 곁에는 미나가 가져다준 화로를 두고 있자니 겨울임에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따듯한 코코아를 호로록 마시며 데미안 쪽을 일별했다. 그가 부들거리며 뭐라고 외치는 게 보였으나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도 못 견디고 환자한테 소리를 질러? 응, 쓰러져 줄게.
“아아, 미나. 저 갑자기 현기증이…….”
「세상에, 아가씨!」
극적으로 쓰러지는 나를 미나가 완벽하게 받아 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보란 듯 데미안에게 혀를 쭉 내밀어 보였다.
헹, 약 오르지, 인마? 그런데 네가 약 오르면 뭐 어쩔 건데?
나는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데미안을 약 올렸다. 기침을 콜록콜록 내뱉으며 정원을 산책하고, 화로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으면서 손도 흔들어 주고…….
쿠르릉-
그사이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데미안의 시종들이 허둥지둥 우산을 그의 머리 위로 펼쳐 주긴 했으나 흙탕물이 튀는 것까지 막아 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데미안의 얄팍한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 이제야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바락 지르려던 데미안은, 내 곁에서 우산을 들고 선 공작을 발견하고는 흠칫 굳어졌다.
한발 늦게 본인이 소리 지를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자각했는지 입을 꾹 닫는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그 얼굴 참 볼만하네. 웃겨서.”
“……!”
데미안이 가짜라는 걸 확신했을 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도 그것을 기억하는지 움찔 표정을 굳혔다.
호오. 그 정도 기억력은 있나 보지?
나는 보란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아직 이렇게나 아픈 저를 찾아오신 걸까요, 랑바드 공자?”
열이 올랐던 것도 벌써 며칠 전이다. 누가 봐도 아픈 기색은 아닌 내 말에, 데미안은 화를 삭이려는 듯 양 주먹을 움켜쥐고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사과하러 왔습니다.”
“사과요?”
“그대를 속였던 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저 장난을 치고 싶었던 건데 그렇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네요. 사과드리죠.”
와. 역시 끝까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구나, 저놈은.
‘사과를 이렇게 하는 것도 능력이다, 참.’
속으로 짧게 감탄하는 사이. 데미안은 이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곧장 몸을 돌리려 했다.
“어쨌든 저는 사과드렸으니, 나중에 이 일로…….”
“안 받을 건데?”
“예?”
“사과, 안 받을 거라고요.”
응, 싫어. 돌아가. 안 받아 줘.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데미안은 몸을 돌리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작게 입을 벌린 채 굳어진 그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철창을 사이에 둔 채로 해사하게 웃어 주었다.
“공자께서 안타깝게도 멍청하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사과는 상대가 받아 줘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랍니다? 혼자 사과했으니 됐다고 하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인데, 설마 공자께서 멍청이는 아니실 테니까.”
옛다, 네가 나한테 했던 멍청이 발언.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제야 당황에서 벗어났는지 데미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그리고 이리트 염료가 탐난다고 했었죠? 나처럼 멍청한 애 손에 독점 유통권이 있는 게 안타깝다고.”
그리고 네가 나한테 멍청이라고 했던 만큼만 돌려줄 생각이라고는 안 했다. 나는 원한은 두 배로 갚아 줘야 하는 사람이거든.
데미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응어리졌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보란 듯 입꼬리를 더 말아 올리며 선언했다.
“바로 그 멍청한 애 때문에, 랑바드 공작가는 앞으로 영영 이리트 염료 구경할 일 없을 거야.”
“뭐……!”
“그리고 그건 전부 너 때문이고.”
목소리를 낮춰 덧붙이며 철창 가까이 바짝 다가갔다. 로렌스가 그러했듯이 데미안 역시 내 기에 눌린 것인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마 끝끝내 발을 움직이지 않고 버틴 건 자존심 때문이겠지.
그 알량한 자존심, 내가 부숴 주지.
“고작 너 하나 때문에 이리트 염료 사업 전부를 놓쳤다고 하면, 랑바드 공작님이 뭐라고 생각하실까? 잘 기억해 둬,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보랏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으로 내가 의도했던 반응은 충분히 끌어냈기에 더 상대하지 않고 돌아서려 했다. 그게 더 기분 나쁠 테니까.
하지만 내 말이 데미안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이게……!”
데미안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그가 내 머리채를 잡으려 철창 사이로 손을 뻗었다.
「감히 어디에 손을 대려고……!」
공작이 대번에 격노하며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의 검이 뽑힐 일은 없었다.
뻐억!
“컥!”
……반사적으로 주먹이 먼저 나가 버렸으니까.
그간 유령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특훈을 거친 결과인가?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 주먹은 데미안의 얼굴 정중앙을 정확히 가격했다.
비틀대던 데미안이 중심을 잃고 털썩 주저앉았다. 직후 발개진 그의 코에서 핏방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데미안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코, 코…….”
“흥.”
영혼이 울리는 느낌일 거다, 이 자식아! 내 주먹은 진짜로 영혼을 울리는 주먹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