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03) (103/124)

<103화>

* * *

읏차! 힘세고 기운찬 아침!

에버딘에 온 이래로 드물게도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제 열이 다 떨어진 건지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았다.

‘때리러 가자!’

기운을 차리자마자 든 생각은 데미안을 응징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 테레지아 에버딘. 이제 방심 따윈 하지 않는다. 내가 쓰러진 건 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고!

‘몰랐을 때면 몰라, 이제는 본명도 알고 거주지도 알지롱.’

가자, 데미안을 조지러!

“아자자!”

기합으로 의지를 다지며 이불을 뻥 차고 상체를 일으켰…….

퍽!

“엑?”

난 분명 이불만 걷어찬 건데, 찰나 발바닥에서 느껴졌던 딱딱함과 이 경쾌한 타격음은 뭐지?

놀라서 눈을 끔벅이고 있는데, 내 발길질에 떠올랐던 이불이 펄럭 가라앉았다. 그 너머로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익숙한 이의 옆모습이 보였다.

“으아악! 공작님! 괜찮으세요?!”

내가 방금 공작을 발로 찼음을 인지하자마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후다닥 침대를 밟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엉, 어떡해. 죄송해요. 죄송해요!”

안절부절못하며 사과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공작은 곧 손을 내리며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렴. 그보다 열이 떨어져서 다행이구나.」

공작이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살짝 쓸었다. 깃털이 스치는 듯 간질간질한 손길이었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외려 더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몰려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의 조각 같은 얼굴에…… 도장 같은 발자국이 발갛게, 선명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발자국이 조금 전 나 때문에 생겼다는 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크기부터가 내 발 크기였으니까…….

크으윽, 수치스러워. 이걸 누가 보기라도 했다간!

‘볼에 발자국 났다고 말해 줄 수도 없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일단 나가서 미나한테 찜질용 얼음이라도 좀 구해 달라고 해 보자. 대충 얻어맞은 데 부을까 봐 걱정되니까 대고 있으시라 하면 되겠지.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어떻게든 공작의 얼굴에 난 발자국을 지워 보려 몸을 일으키던 순간.

대체 무슨 타이밍인지 미나가 노크도 없이 다급하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주인님! 방금 인기척이. 혹시 아가씨가 깨어나신……!”

어째 미나가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같은 몰골이었다. 어딘가 잔뜩 초췌해진 그녀는 절박한 표정을 지은 채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다가 말고 멈칫했다.

저를 돌아본 공작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의 갈색 눈에 지진이 일었다.

“주…… 인님?”

“…….”

“…….”

“…….”

잠시 정적이 있었다. 공작과 미나는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슬그머니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해 버린 나는 그만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뒤로하고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따흐흑.

* * *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

기사단장이 무심한 목소리를 내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데미안은 어딘지 익숙한, 그래서 더욱 짜증 나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등 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꼭 도망칠 수 없는, 작디작은 우리에 갇혀 자물쇠가 채워지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져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쿵, 쿵.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심장이 익숙하게 불안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데미안 랑바드.”

그때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숨통이 막히는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덜컥 멈추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창을 등지고 앉은 채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랑바드 공작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며 시선을 올렸다.

역광 탓에 평소보다 더욱 무감해 보이는 푸른 눈이 신경을 온통 장악했다. 그는 한 번 더 데미안의 이름을 불렀다.

“데미안 랑바드.”

“……네.”

데미안은 결국 그 고상하고도 숨 막히는 독촉에 입술을 달싹여 대답을 흘렸다.

랑바드 공작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툭 물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아느냐?”

“…….”

데미안은 순간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가슴 깊숙한 곳에서 사나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래, 뭘 기대한 거야? 어차피 저 사람이 ‘걱정했다’ 따위의 간지러운 말을 해 줄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데미안은 통증을 무시하고 턱을 치켜들었다.

“네.”

“뭘 잘못했지?”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멋대로 에버딘령에 다녀온 것이요.”

“정녕 그것뿐이냐?”

하지만 이어지는 추궁들에 데미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컥 입을 벌렸다.

“저는……!”

랑바드 공작은 데미안이 테레지아 에버딘과 접촉하고, 그들의 원한을 샀음을 이미 알고 있다. 조금 전의 물음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데미안 역시 자신이 테레지아 에버딘을 완벽하게 속이지 못한 것을 낭패스럽게 여겼다. 졸지에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셈이니까.

하지만…….

‘내가 왜 그 계집애한테서 이리트 염료 독점 유통권을 빼앗아 오려고 한 건데.’

당신의 관심 한 자락, 고작 칭찬 한마디라도 들어 보려고……!

그러나 랑바드 공작은 데미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러고 있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변명은 됐다. 당분간 방에서 나올 생각 말고 자숙하도록.”

마치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거대한 얼음 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데미안은 제 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머니께 인사는 드리게 해 주세요.”

“뛰쳐나갈 때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간 건가?”

“…….”

공작은 데미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요청을 칼같이 잘라 버렸다. 결국 데미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휙 돌려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랑바드 공작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서류를 처리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에야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듯 어깨를 돌리던 그가 주홍빛으로 물든 집무실 문을 일별하고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혀를 쯧 찼다.

“멍청한 놈.”

타고난 머리, 빼어난 얼굴, 좋은 가문, 넘치는 부.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그저 자신이 내키는 대로 휘두르기 바쁘다니. 제 감정 하나 통제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귀찮게 되었어.’

랑바드 공작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잇새로 미약한 짜증이 깃든 숨이 새어 나왔다.

하나 있는 아들이라는 놈이 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멋대로 저질러 놓은 일의 뒤처리는 그의 몫이었다.

‘에버딘이라…….’

듣기로는 발레리안이 제 수양딸을 그리도 지극히 아낀다고 했다. 그런 자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니면 그 공녀 쪽에서 사과를 요구할 수도 있고.’

테레지아 오블렌. 여덟 살에 가문에서 쫓겨나듯이 하여 에버딘에 굴러들어 간 아이.

이리트 염료 유통권도 그렇고, 여러모로 나이치곤 범상찮아 보여 주시하고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엮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원래 후작의 제안은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역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군.’

똑똑.

랑바드 공작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일전에 부르신 자들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가지.”

시계를 흘깃 확인한 랑바드 공작이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간 집사가 응접실 문을 열어 주자 안에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들인가.’

응접실에 앉아 있던 건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였다. 그중에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남자가 먼저 양손으로 모자를 꼭 쥔 채 허리를 굽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랑바드 공작님. 라이 오블렌이라고 합니다.”

“카를로타 오블렌입니다. 귀한 분께 초대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자, 오블렌 자작에 이어 그의 아내인 카를로타도 무릎을 굽혔다 폈다.

“앉지.”

랑바드 공작은 무심히 고개를 까딱이기만 하고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자작 부부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를 따라 착석했다.

‘희극이로군.’

랑바드 공작은 오블렌 자작 부부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발레리안 에버딘이 그리도 아낀다는 수양딸이 자라서, 훗날 제 양아버지에 관한 모든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데미안과 다른 듯 닮은 흥미가 공작의 눈에 깃들었다. 하지만 잠깐 차올랐던 흥미는 구멍 뚫린 그릇에 담긴 물처럼 금세 빠져나갔다.

어느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감정이라고는 깃들지 않은 벽안이 상대를 담았다.

어색한 자세로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카를로타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저, 그런데 랑바드 공작님께서 저희를 어쩐 일로…….”

“자네들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

“제안이라 하심은……?”

오블렌 자작이 두려움, 기대가 반씩 섞인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탐욕을 감추지 못하는 그 눈에 랑바드 공작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출신은 하찮지만, 그 야망과 인내심만은 썩 쓸 만할 듯하다.

에버딘이라는 검을 막아 내고 버릴 패로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