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근데 뭐 이렇게…… 복작복작해?”
테레지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 땅의 모든 유령이 그녀의 방에 모여 있는 건지 싶을 정도로 방이 유령으로 가득했으니까.
<일어났네?>
<일어났네!>
<일어났대!>
자루 모양 유령들은 바로 옆에 있는 유령에게 비슷한 말을 전하며 허공을 빙글빙글 떠돌았다. 그 너머로, 인간의 형태를 한 유령들이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이럴 때는 쟤가 보통 꼬맹이가 아닌 점이 아쉽구먼.>
<그러게. 보통 꼬맹이였으면 그냥 몸을 통과해서 한번 지나가 주는 건데. 그게 물수건보다 효과 좋지 않을까?>
<근데 쟤는 못 지나가잖아. 물수건이라도 돌아가며 갈아 주고 싶은데, 우리한테 그 정도 힘은 없으니까…….>
<쯧쯧, 하나같이 무능해서들.>
<어쭈. 그러는 영감도 무능하기는 매한가지면서?>
어찌나 시끄러운지 귓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괜스레 웃음이 나와 테레지아는 누운 채로 히히 웃었다.
“그렇게 하면 더 아플걸……. 감기 걸린 사람한테 얼음물을 쏟아붓겠다는 소리 아냐?”
<앗. 꼬마, 깼냐?>
<꼬맹이 깼단다!>
저들끼리 떠드느라 한발 늦게 테레지아가 깨어났음을 눈치챈 인간형 유령들이 후다닥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 자루 모양 유령들까지 계속 테레지아가 괜찮은지 보겠다고 그녀를 툭툭 건드려 댔다. 셀레나가 결국 다 썩 꺼지라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어휴, 이제 막 깨어난 애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나가들! 테리, 시끄러웠지? 이놈들 방에 못 들어오게 앞에서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좀 쉬어! 릭, 방 안은 너한테 맡긴다.>
셀레나는 릭이 물기를 털기 위해 팔을 퍼덕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방을 쑥 빠져나갔다. 그제야 소란하던 방에 고요가 찾아왔다.
릭은 손에서 물기를 대강 털어 낸 후에야 다시 테레지아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수건, 너무 차갑지는 않습니까?>
“응? 응. 시원하고 좋은데?”
<목은요? 미나가 협탁에 물을 놔뒀는데, 가져다줄까요?>
“네 힘으로 물컵 들기는 무리 아닐까……?”
<그건 그렇군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해 줄 수 있는 건 해 줄 테니까.>
릭은 담담히 말을 맺으며 흘러내린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테레지아는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몇 번 끔벅이다가 돌연 짓궂게 웃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줘?”
<뭐가 말입니까.>
“평소 같았으면 잔소리했을 거잖아. 놀러 나가더니 왜 아픈 채로 오고 난리냐, 그러게 평소에 운동 열심히 하고 후추 대신 채소 좀 더 먹지 그랬냐…… 뭐 이런 거?”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평소 릭이 곧잘 하곤 했던 잔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어찌나 자주 들었던지 이제는 상상만으로도 릭의 목소리가 생생히 귓가를 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릭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장난기로 가득한 청록색 눈을 잠시 응시하던 그가 아직 축축한 손으로 테레지아의 코끝을 툭 쳤다.
“으엑.”
<전 언제나 잔소리만 하는 줄 압니까? 저도 걱정할 줄 알거든요.>
“그래? 기특하네, 우리 곰돌이. 걱정하다가 울지는 않았고?”
테레지아는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릭을 놀렸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툴툴거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릭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순간 멈칫한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기특하다는 겁니까. 저는…….>
“응?”
청록색 눈이 동그래졌다. 릭은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떨궈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음울한 목소리를 냈다.
<계속 당신 옆에 있었는데, 데미안 그 사람이 이상하다는 것도 못 알아채고……. 한심하기만 한데요.>
그것은 테레지아가 쓰러지고 난 후 내내 그를 괴롭히던 마음이었다. 질척한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무거웠다.
‘아가씨!’
‘세상에, 열이……!’
‘주치의를 불러와라, 빨리!’
창백한 얼굴의 발레리안이 테레지아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고함치고. 미나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다니는 아비규환 속.
<……테리?>
릭은 하마터면 사람들의 눈앞임도 잊고 협탁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로 뛰어내릴 뻔했다.
언제나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밝고 씩씩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색색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임에도 일그러진 얼굴에서 그녀의 고통이 전해지는 듯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겁니까?’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원인이 데미안 카펜디어, 아니, 데미안 랑바드 때문인 것은 확실해.’
그저 당황과 걱정으로 차 있던 마음은, 허둥지둥 달려온 주치의와 발레리안의 대화를 듣는 순간 쿵 내려앉았다.
<내가…….>
그냥 내가 미리 언질을 줬으면…… 이런 일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데미안이 ‘진짜’, 내가 ‘가짜’가 되는 게 두려워서 입을 다물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테레지아에게 미움받기 두렵다는 이기심 때문에 침묵한 것에 대한 대가가 돌아온 것 같아 더없이 괴로웠다.
“…….”
릭이 말을 멈추자 방 안은 온통 정적뿐이었다. 테레지아는 제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릭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릭.”
자그맣게 말문을 연 그녀가 손을 뻗어 흰 정수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 부름에 릭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테레지아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단호히 말을 뱉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릭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테레지아가 고개를 내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녀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데미안의 태도가 석연찮다고 느낀 적은 몇 번 있었어. 사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이미 데미안이 가짜라는 걸 알았던 거지. 그런데, 내가 그냥…….”
테레지아가 말꼬리를 흐리며 한숨처럼 웃었다. 실낱같은 속삭임이 릭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걔를 너무 보고 싶었나 봐.”
<…….>
‘걔’라는, 상당히 부정확한 지칭이었지만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릭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서…… 그냥 걔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싶었나 봐. 이상하지? 고작 한 번 본 사이인데.”
테레지아는 저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흐린 미소를 흘렸다. 릭은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 있습니다.’
내가, 내가…….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인데.
이렇게…… 지금 당신 눈앞에서,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데.
당장에라도 입을 열어 외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테레지아가 아, 하며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맞다. 축제 때 일, 따로 말 안 해서 미안해. 두 번째 춤 상대가 ‘걔’이기도 했고, 뭔가 좀 민망해서 말 못 했어. 혼자만의 비밀로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그런 느낌이었거든.”
<…….>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요정의 마법이 풀리든 말든 사방에 고래고래 외치고 찾아다닐 걸 그랬나. 웬 놈팡이가 속이려 들고 말이야, 떼잉.”
데미안을 생각하니 곧장 기분이 나빠져 테레지아가 혀를 끌끌 찼다. 화가 나서 기절하지만 않았어도 한 대 때려 주는 거라며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기도 했다.
그 재잘거림을 듣고 있자니 꽉 막혔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릭이 한숨을 삼키고 물었다.
<이제 기분은 괜찮아진 겁니까?>
“응. 뭐……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그냥 내가 부족했던 탓이지.”
테레지아가 더없이 산뜻하게 대꾸했다. 언뜻 듣기엔 그저 단순한 겸양 같았으나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릭이 멈칫해 되물었다.
<……뭐라고요?>
“최근 만난 사람들이 다 너무 착해서 잠깐 잊고 있었네.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일이 술술 풀려 가서 너무 방심했어, 휴.”
테레지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천진하게 한숨을 흘렸다. 그 태도에 릭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대체…….’
이번 일은 세상의 누가 보아도 데미안 랑바드의 잘못이다.
애초에 소란스러운 축제 때 처음, 그것도 가면을 쓴 채 아주 잠깐 본 사람을 어떻게 그리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테레지아는 유령을 볼 수 있는 탓에 조금 영특하고 어른스러울 뿐, 기억력은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게다가 데미안 랑바드는 영악했다. 테레지아로부터 교묘하게 정보를 유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인이 ‘릭’인 척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테레지아는 지금, 이 일이 ‘자신이 방심한’ 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한 태도로.
하지만 릭은 테레지아 본인이 아니었기에, 외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균열이 선명히 보였다. 문득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그녀의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무리 유령들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보호자도 없이,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 사이에 홀로 남겨져야만 했던 아이가…….
정말 ‘씩씩한’ 걸까?
“릭? 왜 그래?”
릭이 계속 침묵하는 것이 의아한 듯, 테레지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말간 얼굴을 앞에 두고, 그는 차마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