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제르비스와 함께 찾아가면 기운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가뜩이나 에버딘 저택 내는 테레지아의 간호로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문병하겠노라 방문하는 건 오히려 민폐가 아닐까. 안 그래도 데미안 랑바드라는, 아주 몹쓸 것에게 걸려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데.
‘약은…… 에버딘에서 구하는 약보다 나은 걸 구할 수 있을 리가 없고. 위문품은 진즉 보냈고. 찾아가는 건 정신없을 테고…….’
싸늘한 눈길이 조금 전까지 테레지아에 대해서 떠들던 이들을 뱀처럼 훑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쓸데없는 입들을 단속하는 건가.’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은 잠시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구원받은 처지인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뿐이라니.
‘부디 별일 없이 털고 일어나시길. 그저 지나가는 감기와 같은 일이길.’
그래야 은혜도 갚을 수 있을 테니까.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은 그리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운 입술에 칼날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소싯적 사교계를 제 손바닥 위에 놓고 휘두르던 이의 여유가 묻어나는 미소였다.
* * *
콰아앙!
세바스찬이 집무실의 문을 닫자마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발레리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인님…….’
세바스찬은 놀라지 않았다. 지금 그의 주인이 어떤 심정일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여 그는 단지 조용히 부서진 책상의 잔해를 치웠다.
‘그냥…… 막는 게 답이었을까.’
평소라면 세바스찬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쓸데없는 일거리를 만들었음에 사과했을 텐데. 지금의 발레리안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던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그 백작가의 무도회장에서, 발레리안은 꿀 우유 잔을 든 채 테레지아를 찾아가다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무도회장에 난데없이 발을 들인 기사의 망토에 매달린 브로치를 알아봐서였다.
‘저들이 왜 여기에…….’
랑바드 공작가.
그건 언제나 클라센 후작가와 함께 황가의 양옆에 놓이는 이름이었다.
현 황후의 친정. 황제의 오른팔.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
동시에, 에버딘의 적.
황제가 발레리안을 경계하고 경멸하는 것만큼, 랑바드 공작 또한 발레리안을 경계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황제를 떼어 놓고도 랑바드 공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귀족이 아닌 이들은 길가의 벌레처럼 취급하는 이였으니까.
그런 랑바드 공작이 난데없이 한미한 백작가의 무도회에 제 기사들을 난입시켰다. 발레리안으로서는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의심과 경계는 테레지아가 쓰러지는 동시에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네가 하고픈 걸 해라, 리안.’
발레리안은 이미 각오했었다. 테레지아가 어떤 선택을 해도, 그 선택으로 인해 넘어지게 되어도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겠다고. 아이의 선택을, 의지를 믿어 주겠다고.
그의 아버지, 전 에버딘 공작도 그러했으므로.
하지만 막상 자식이 넘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에게도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방법만 있다면 그가 모든 상처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싶을 정도로.
‘……당신도 이런 심정이셨습니까, 아버지.’
뒷짐을 지고 한발 물러나 있으면서도, 등 뒤로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피가 나도록 참고 있으셨습니까. 이를 악물고 제게 미소를 보여 주셨던 겁니까.
더없이 모순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명백히 동시에 존재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부모’라는 말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세바스찬.”
“예, 주인님.”
테레지아가 쓰러지는 바람에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긴 했다지만, 그녀가 쓰러진 이유가 데미안 랑바드 때문임은 명확했다. 테레지아가 있던 발코니에서 걸어 나오는 데미안의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으니.
아이 대신 아파 줄 수 없다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아프게 한 원인을 철저히 뿌리 뽑는 것일 테다.
설령 그것이 황제의 최측근, 황가 다음으로 거대하다는 가문의 자제일지라도.
“랑바드 공작에게 연통을 넣어라. 귀댁의 자녀가 내 자녀에게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당사자가 직접 찾아와 사과해 주길 바란다고. ”
발레리안은 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금빛 눈이 검을 들었을 때처럼 흉흉한 기색을 띠고 번뜩였다. 그가 사납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부모끼리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히려 난 그리해 주셨으면 하니까.”
* * *
무도회에 참석하러 갔던 테레지아가 별안간 쓰러진 채 발레리안의 품에 안겨 왔다. 이후로 한바탕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에버딘 저택은 한바탕 뒤집혔다가 곧 축 가라앉았다. 한창 유령들이 기승을 부릴 때보다도 암울한 분위기였다.
“훌쩍…….”
그리고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온 지금. 주방은 저택의 그 어느 곳보다도 어두침침했다.
가장 큰 원인은 국자를 휘적이며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미나였다.
냄비에서 끓고 있는 건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묽은 스튜였다. 흰 김이 폴폴 올라오는 냄비 앞에서 울며 국자를 휘젓는 미나의 모습은 흡사 동화 속 마녀 같았다.
주방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이들은 미나가 코를 훌쩍이자 단체로 어깨를 움찔 굳혔다. 결국 숨 막히는 공기를 참다못한 하인 하나가 주방장의 팔을 쿡쿡 찔렀다.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아니,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픈 아가씨 때문에 직접 요리하는 사람을 내쫓아 그럼?!’
‘아, 그럼 이대로 밤새자고요? 제 손에 허리 부러지고 싶으세욧?!’
울컥한 하인이 눈을 번뜩이자 다른 사용인들도 합세하여 주방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다 큰 성인들이 몸을 웅크린 채 옹기종기 붙어 있으려니 전신이 아팠다. 코에 침을 찍어 바르며 쥐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다른 이들의 기에 눌린 주방장이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크흠 목을 가다듬은 그가 바들바들 떨며 미나를 불렀다.
“저, 미나.”
“큽, 흡. 네……?”
미나가 국자를 양손으로 꼭 쥔 채 주방장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쥔 게 몽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흠칫하고는 더듬더듬 말했다.
“이, 이, 이런 일은 내가 할게. 내가 주방장이잖아, 응? 자네는 가서 아가씨 간호에 더 신경 쓰는 게…….”
“우, 우리 아가씨이이.”
하지만 말을 잘못 골랐는지, ‘아가씨’라는 말을 듣자마자 미나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주방장이 뜨악해서 달래려 애썼으나 미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있는 힘껏 말아 물었다.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안 그래도 저택에 처음 왔을 때부터 상처가 많아 보이던 테레지아였다. 에버딘에서 지내며 차츰차츰 그런 기색이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번 일로…….’
간신히 아물어 가던 아가씨의 상처가 더 벌어졌으면 어떡하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울컥 치솟았다. 들고 있던 국자를 반으로 뚝 부러트린 미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방을 뛰쳐나가려 했다.
“감히 우리 아가씨를 속이려 들어? 그 새끼랑 오블렌 자작 모가지 따고 나도 죽어 버릴 거야!”
“미, 미나! 진정…… 흐아악!”
“누가 가서 기사님들 좀 불러와!”
“이거 놔! 안 놔? 확 팔다리를 ×××해서 ××해 버릴라!”
“입! 입! 주인님 들으실라! 차라리 날 물어라!”
그래, 사용인들이 미나를 피해 주방 구석에 찌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던 이유.
그건 바로 미나가 소싯적 에버딘령에서 ‘미친 돌풍’이라 불리던 이였기 때문이다.
미나는 본래 에버딘 공작가의 기사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쉽게 울컥하는 성미와 지나치게 험악한 입버릇 때문에 입단 시험에서 여러 차례 떨어진 후, 기사가 되는 걸 단념하고 공작가의 사용인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나는 제 성미를 다스리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테레지아를 모시기 시작할 즈음부터는 더없이 차분하고 유능한 하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끄아아악! 이 미친, 그렇다고 진짜 무냐!”
“기사님 모셔 왔습니다!”
“이, 이게 다 무슨 일……!”
……아무래도 그녀는 오늘부로 다시 미친 돌풍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 * *
늦은 밤. 침대 위로 불룩 솟은 이불이 들썩이며 자그마한 신음이 허공을 울렸다.
“으…….”
<테리! 정신이 듭니까?>
<헉, 테리! 깼어?>
막 물수건을 갈아 주려던 릭, 곁을 지키고 있던 셀레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내 닫혀 있던 테레지아의 눈꺼풀이 슬쩍 들렸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린 채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늘 또렷하던 청록색 눈이 열 때문에 흐릿했다.
“집……?”
<네가 무도회장에서 쓰러져서 공작이 안고 왔대. 그런 난리도 없었다, 아주.>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움직이면 상태가 나빠질지도 모르니 그대로 누워 있어요.>
릭은 상체를 일으키려는 테레지아의 어깨를 양손으로 꾹 밀었다. 릭의 힘은 하잘것없었으나, 지금의 테레지아는 속이 솜으로 채워진 곰 인형조차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비실비실했다.
“끄으응. 아이고, 머리야.”
테레지아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릭이 그녀의 이마에 놓인 물수건을 갈아 주는 사이, 그녀가 한결 선명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