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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100) (100/124)

<100화>

“……짜증나게, 진짜.”

뭔가 싶어 돌아보려던 찰나 사나운 중얼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순간 모르는 누군가가 발코니에 뛰어들기라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낯선 음성이었다.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긴 데미안이 이마를 단정히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반쯤 쓸어 넘겼다.

그러자 산이 도드라진 눈썹이 완전히 드러나며 순식간에 인상이 달라졌다. 고작 머리 스타일과 표정, 자세만으로도 사람이 저렇게 바뀌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변화였다.

“기껏 머리까지 내리고 얌전한 척한 보람도 없이 너무 빨리 찾았잖아, 젠장.”

작게 욕설을 지껄인 데미안이 몸을 일으키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분명 행동 자체는 우아했으나 동시에 험악한 기색이 묻어났다.

나는 놀라움에 굳어진 와중에도 이것이 ‘데미안’의 본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문득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삐딱한 비소를 흘렸다.

“……뭐, 중간에 어그러지긴 했다만 그 얼굴은 볼만하네. 웃겨서.”

아니 저 새끼가?

잘못했다는 기색은커녕 역으로 조롱을 들으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토미와 단련한 욕이라도 바가지로 쏟아 주려고 입을 여는데 그가 한발 빨랐다.

“궁금하지? 내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아니?”

“그래, 당연히 그러겠…… 뭐?”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던 데미안이 다음 순간 멈칫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뭐 그리 대단한 말을 하려나 싶더니,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콧방귀를 흥 끼고 어깨를 휘휘 돌렸다. 곧 벌어질 폭력 사태를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네 사정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중요한 건 네가 날 속였다는 거고, 들킨 이상 처절한 응징만이 남았다는 거지.”

사실 궁금한 점은 많았다. 왜 나를 속인 건지, 어떻게 내 비밀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는지 등등.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일단 좀 때리고 생각하려고. 그러고 나서 에버딘 저택으로 데려가도 캐물을 시간은 충분할 테지.

그러니까, 넌, 일단 좀 맞자.

“뭐…… 뭐야! 주먹 쥐는 꼴이 왜 그렇게 자연스러운 건데!”

내 반응이 완전히 예상 밖이었는지 데미안의 여유가 완전히 무너졌다. 당황한 그 얼굴을 보며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고 헹 웃어 주었다.

“당연히 익숙하니까 그렇지. 내 주먹 한 방이면 죽은 자의 땅이 코앞이야, 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

“진짠데.”

본인이 안 믿겠다는데 뭐 어째. 알아서 하라지. 나는 칠 거니까!

적잖은 수의 유령들을 성불시켰던 경험을 살려 옴팡지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데미안의 키가 나보다 크긴 하지만, 아직 둘 다 어려서 그런지 체구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더 때리기 힘들어질 테니까 지금이라도 응징한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번뜩이며 막 데미안의 복부를 가격하려던 순간. 그의 어깨너머 무도회장에서 소란스러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엥?”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데미안 역시 소란을 감지했는지 고개를 돌려 문 너머로 무도회장 안을 확인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무례……!”

“무례에 대한 보상은 추후 하겠습니다. ……은 어디 있습니까?”

낯선 차림의 기사들이 무도회장에 난입했다. 손님들은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으며, 주최자인 이마그 백작 부부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일절 개의치 않고 행동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부하들에게 무도회장 곳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를 지시했다.

기사들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드는 걸 보고 의아해하는데, 데미안이 돌연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가 발코니의 문에 손을 올리며 샐쭉 웃었다.

“내 손에 이리트 염료 독점 유통권이 있었으면 얼음고래족한테도 훨씬 이득이었을 텐데. 너처럼 제 손으로 단서를 가져다 바치는 멍청이 손에 과분한 게 쥐여 있다니 아깝네. 아, 물론 내가 똑똑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뭔 개소…….”

“부디 다음에도 나 같은 가짜 첫사랑한테 멍청이처럼 속아 넘어가길 빈다, 멍청아.”

데미안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제 할 말만 늘어놓고는 발코니의 문을 벌컥 열었다. 유리 한 겹에 막혀 있던 말소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와…….’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움직일 수조차 없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쟤 지금 세 번이나 나를 멍청이라고 불렀어. 진짜 머리가 띵하다…….

데미안이 쏟아 놓은 조롱과 모욕에 어처구니가 사라져 제자리에서 숨만 쌕쌕대는 사이, 그가 무도회장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그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련님!”

“찾았습니다, 단장님!”

“카펜디어 백작 영식……?”

“이게 무슨…….”

기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려 지시를 내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마그 백작 영애 쪽에서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들도 언뜻 들렸다.

단장이라 불린 남자가 성큼성큼 발을 옮겨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나지막하고 정중한, 그러나 경고 또한 담긴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외유는 여기까지 하시고 이만 돌아가시죠. 공작님께서 지금 바로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데미안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가 도망가리라고 생각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탁!

얼굴을 구긴 데미안이 제 어깨를 잡으려던 기사의 팔을 사납게 쳐 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어차피 흥도 다 깨져서 도망칠 생각 없으니까.”

혀를 쯧 찬 데미안이 나를 한번 일별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쫓아가려 발을 뗐다가, 근처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멈춰섰다.

“앗.”

나를 찾아오고 있던 건지, 발코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공작이 손에 꿀 우유 잔을 든 채 굳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멀어지는 데미안 쪽…… 정확히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르는 단장을 응시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문양은…… 랑바드?”

공작의 시선 끝에는 단장의 망토를 고정하고 있는 검은 브로치가 있었다. 소란한 와중에도 그 중얼거림만은 더없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랑바드…… 잠깐, 랑바드?

‘그럼 쟤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갑작스레 머리가 핑 돌았다. 눈을 한번 깜박이자 시야가 급변했다.

아, 어쩐지 아까부터 머리가 심상찮게 띵하더라니.

‘사람이 너무 화가 나도 기절하는구나…….’

썩 달갑지만은 않은 깨달음이었다. 기울어진 무도회장의 전경,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공작의 얼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꿀 우유 잔 등이 기이하리만치 느리게 시야를 메웠다.

“테리!”

공작의 다급한 목소리를 끝으로, 기억과 생각이 모두 뚝 끊기고 어둠이 찾아왔다.

* * *

이마그 백작가의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동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세상에나. 랑바드 공자께서 카펜디어 백작가의 차남인 척하며 숨어 지내셨다고요?”

“저는 카펜디어 백작이 이해 가지 않아요. 랑바드 공작님의 분노를 살 게 뻔한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공자님께 따로 약속받은 게 있을지도 모르죠. 워낙에 영특하다고 소문나신 분이 아닙니까?”

“그보다 랑바드 공자님께서 기사들과 함께 돌아가시기 직전에, 에버딘 공녀님과 함께 계시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던데…….”

누군가 은근하게 꺼낸 말에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에버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부 근처의 영주들이었다. 동부의 주인, 최근 들어 황가의 위엄마저 위협할 정도로 비상하고 있는 에버딘의 일원에 대해서 떠들기는…….

“……이마그 백작 영애와 절친하다는 지인에게 들었는데, 두 분께서는 다과회에서부터 심상찮은 분위기셨대요.”

“랑바드 공자께서 떠나시자마자 공녀님께서 쓰러지셨다면서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무래도 에버딘과 랑바드의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사실은 가문이 정적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받아서 쓰러지신 건 아닐까요?”

“어머, 어머. 혹 두 분께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면……. 맞네, 맞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조금 전보다 더 바삐 입술을 놀렸다. 근거 없는 말들이 모여 그럴싸한 가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흥분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쯤. 누군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

그 소리에 사람들이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약속한 듯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그만들 하시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이는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친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이었다.

그녀가 싸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이 뒤늦게나마 민망하게 헛기침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들 모두 흥분이 가시고 나니 자신이 뒷감당하기 어려운 말까지 내뱉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긴 달라진 게 없네, 달라진 게 없어.’

아메트리스 후작 부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녀가 사람들의 대화를 끊은 것은 낭설 자체를 싫어하는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미안해, 여보. 자세히는 못 말해. 약속했거든. 하지만 에버딘 공녀가 우리 아들을 살려 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씹어 대는 대상 때문이었다.

남편의 말에 따르자면, ‘테레지아 에버딘’은 그녀의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은인이었으니까.

‘제리의 감기가 다 나아 가서 슬슬 한번 찾아가 뵈려 했는데, 하필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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