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에이, 약혼은 무슨. 그냥…… 친구야. 응.”
애써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하리엔과 리벨이 힐끔 시선을 교환했다가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본 거야?”
평소의 하리엔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 말을 놓고 친구가 된 후, 사석에서도 만나면 인사부터 하고 보는 아이였는데…….
‘조금 전에는 무도회장 한복판인데도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지.’
그것이 뒤늦게 마음에 걸려 되물었다.
하리엔은 내 손을 양손으로 꼭 감싸 쥔 채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 테리.”
“응?”
“나도 속아 놓고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카펜디어 백작 영식을 볼 때면 뭔가 느낌이 그때랑 비슷해.”
“그때?”
하리엔이 언제를 말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녀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내가 숙부…… 그러니까, 전 라이넬 남작을 볼 때 들었던 느낌 말이야.”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호흡이 멈췄다. 애석하게도 하리엔의 말은…….
“믿고 싶은데, 이 사람이 나를 속일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계속 마음에 돌조각 하나가 박힌 듯한 느낌.”
“…….”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을 더 빠르게 받아들인 걸지도 몰라.”
데미안을 볼 때마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 혹시 이 인형의 주인이신가요?’
‘이 가면을 보니 공녀님과 함께했던 축제 때가 떠오르는군요.’
웃는 얼굴을 보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분명 내가 찾던 그 애가 맞는 것 같은데.
‘……역시 아버지와 형님께서는 제가 아직 불편하신가 보네요.’
문득문득 드는 위화감이 자꾸만 마음을 휘젓는다.
그때마다 애써 착각이라고 넘기려 했던 건…… 어쩌면 내가 만났던 그 애가 신기루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정말 유령이나 요정 같은 거라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정말 데미안이 나를 속인 걸까?’
하지만 어떻게? 분명 공작과 기사들도 내가 축제 때 뭘 했고, 누굴 만났는지 모르는데.
데미안은 그걸 다 어떻게 안 거지?
시선을 내리깐 채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각기 다른 눈동자 세 쌍이 나를 걱정스레 응시하고 있었다. 색도,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하는 마음만은 같아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뭔가 상황이 묘하네. 전에는 내가 라이넬 남작으로부터 하리엔을 떼어 냈는데. 지금은 뭔가 반대 같잖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리.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어.”
“괜찮은 거지?”
“응. 그런데 생각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잠깐 발코니에 나가 있을게.”
“그래, 알았어. 이따가 우리랑 같이 정원에 호수 구경 갈래? 거기 물고기들이 꽤 많더라.”
“좋아.”
친구들과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한 뒤 몸을 돌렸다.
힐끔 살피니 데미안은 아직 이마그 백작 영애를 비롯해, 그 다과회에서 보았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듯했다. 그럼 당장 나를 찾지는 않겠지.
“공작님.”
「테리?」
몇몇 이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공작이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함께 있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빠져나왔다.
상체를 낮춘 공작이 나와 시선을 맞춘 채 물었다.
「왜 그러니. 카펜디어 백작 영식은 저쪽에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발코니에 다녀오려고요.”
「……괜찮은 거니?」
묘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훑던 공작이 불쑥 다른 말을 내놓았다.
처음엔 놀라서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곧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물었는지 깨달아서 푸스스 웃어 버렸다. 내 표정이 데미안 생각 때문에 좀 안 좋았나 보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그럼 꿀 우유 한 잔을 가지고 갈 테니 먼저 나가 있을래?」
“앗. 꿀 우유를…… 여기서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춰 소근댔다.
그도 그럴 게 무도회 아닌가. 아예 아이들 위주로 돌아가는 파티도 아닌지라, 음료 대부분은 과일 주스 아니면 술이었다.
여기서 우유랑 꿀을 따로 준비해 달라고 하면 좀…… 민폐 아닐까?
‘스읍, 먹고 싶긴 한데. 어쩐다.’
보통은 꿀 우유 한 잔이 고민이고 뭐고 싸악 내려 주는데……. 데미안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탓인지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그런 갈등이 얼굴에 다 드러난 걸까.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않게 잘 부탁해 보마. 먼저 가 있으렴.」
“헤헤. 네!”
그 손길에 어쩐지 마음이 간지러워지며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래, 이마그 백작 부부한테도 딸이 있는데 이 정도는 양해해 주시겠지, 아암.
‘기분 좀 나아졌다.’
공작 덕분에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적당한 발코니를 찾아 들어왔다.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커튼을 내리고, 난간 가까이 다가갔다.
“호. 저게 아까 애들이 말한 호수인가?”
난간 너머로 백작저의 정문과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얘기해 주었던, 물고기가 헤엄친다는 호수와 정원을 구경하며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이러니까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맑아진 정신으로 데미안한테 물어볼 말을 고민했다.
‘뭘…… 물어봐야 하지? 스무고개 하듯이 물어보면 의심하고 있다는 게 너무 티 나나?’
고심하고 있던 차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좀 이르긴 하지만, 당연히 공작일 줄 알고 몸을 돌렸는데.
“공작…… 어?”
“여기 계셨습니까, 공녀님.”
나타난 것은 데미안이었다.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등 뒤로 발코니의 문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 추궁할지 나를 고민하게 만들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반사적으로 뒤로 한발 물러날 뻔했으나 가까스로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입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그려 냈다.
“어서 와요, 영식.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듯해서 부르지 않았는데…….”
“친우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파트너이신 공녀님 곁으로 돌아와야지요. 춥지 않으십니까?”
데미안은 그렇게 묻고는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재킷을 벗어 어깨에 덮어 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만지작거렸다.
“고,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데미안은 무도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빙긋 웃어 보였다.
‘소년’과 같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닮은 얼굴. 그 얼굴을 보니 또다시 혼란스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가 덮어 준 재킷을 꾹 움켜쥐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마음을 굳히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영식…….”
건국제 때, 나랑 헤어진 게 정확히 몇 시였는지 기억해요?
그 물음을 시작으로 그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더 캐물을 생각이었다. 내 혼란과 의심이 가실 때까지.
하지만 미처 물음을 잇지 못한 건, 그의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데미안의 얼굴이 점차 시야를 가득 메워 갔다. 눈꺼풀 아래로 보랏빛 눈이 스르르 감춰지는…….
“……?!”
오메, 이게 뭐여!
나는 데미안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지기 직전, 급하게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아 냈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이 내 손바닥에 도장을 찍듯 꾹 내려앉았다. 그 감촉에 간지럽기보다는 묘하게 소름이 끼쳤다.
쟤 방금, 뭐 하려 한 거야?
“왜 그렇게 놀라세요, 공녀님.”
그러거나 말거나. 데미안은 눈썹을 슬쩍 찌푸리긴 했지만, 여전히 태연한 낯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서 내 손을 치워 냈다. 버티려 했으나 힘 차이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당황한 탓에 말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으나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니. 영식이야말로.”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시네요. 그날도 이렇게 인사드렸는데…….”
보랏빛 눈이 사르르 접혔다. 은근한 속삭임과 숨결이 귓가를 스쳐 갔다.
데미안은 그리 말하고는 재차 내게 입 맞추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자 확실해졌다.
이 새끼, 가짜야.
“아악!”
퍽-!
데미안이 가짜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있는 힘껏 다리를 치켜올렸다.
레딘과 미하일이 열성적으로 가르쳐 준 힘, 속도, 방향으로 올려 찬 결과. 내 다리는 정확하게 데미안의 가랑이 사이를 가격했다.
나이스 슛!
“끄, 으윽!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데미안은 대번에 비명을 지르며 발코니 바닥을 굴렀다. 몸을 웅크리고 괴로워하던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홱 돌아보았다.
그렇게 본다고 무서울 것 같냐? 넌 뒤졌어.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 가짜 자식아.”
“그게 무슨…….”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 너 대체 뭐야? 뭔데 내 첫사랑인 척해? 데미안 카펜디어라는 이름도 진짜 아니지?”
“…….”
내 말에 일그러져 있던 데미안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동시에 등 뒤 멀리, 저택의 정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