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98) (98/124)

<98화>

* * *

「카펜디어 영식이랑 파트너를…… 하기로 했다는 거지.」

“그으…… 넵.”

발레리안은 묘한 얼굴로 막 딸기 케이크를 한 포크 뜨던 손을 멈췄다.

테레지아는 그런 그의 표정을 힐끔힐끔 살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청록색 눈이 구슬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이 ‘도로록’ 소리라도 날 것 같았다.

발레리안이 잠시 말을 잃은 사이. 그의 표정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것인지, 테레지아가 우물쭈물 말을 덧붙였다.

“먼저 말씀 안 드린 건 죄송해요. 그, 그래도 약속대로 첫 춤은 공작님이랑 출 건데…….”

「…….」

“물론! 이건 그냥 희망 사항일 뿐인 거 아시죠? 저는 공작님이랑 파트너로 가는 것도 좋아요. 무도회라 보호자와 함께여야 참석할 수 있으니까…….”

「…….」

“진짜예요! 저 정말 공작님이랑 파트너 하는 것도 좋아요. 후추를 걸고 맹세합니다.”

발레리안이 계속해서 말이 없는 것이 제 말을 못 믿기 때문이라고 여긴 걸까. 테레지아는 선서하듯 한 손을 들고 비장하게 말을 뱉었다.

그 말에 발레리안은 끝내 픽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한숨처럼 웃으며 손을 뻗어 테레지아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렴.」

“……진짜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 나는 네가 무언가 경험할 기회를 빼앗고 싶지 않으니까.」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에 테레지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그 모습에 발레리안은 또 한 번 웃어 버렸다.

사실 테레지아에게 건넨 말과 발레리안의 가장 깊은 속내는 정반대였다.

그는 테레지아가 데미안과 파트너를 하지 않길 바랐다. 단순히 딸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다가오는 이에게 느끼는 못마땅함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카펜디어 백작가를 조사하며 느낀 묘한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카펜디어 백작가와 데미안 카펜디어에 대한 조사 결과는 깨끗했다. 하지만 발레리안의 감은 계속해서 그들을 주시하라고 이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걸려 테레지아를 말리고 싶었다. 행여나 나중에 딸아이가 받을 상처가 염려되어서.

‘마음 같아서는 실패라고는 겪지 않을 삶을 살았으면 좋겠지만…….’

하지만 발레리안은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안다. 이것이 단지 그의 욕심인 것 또한.

제 염려를 이유 삼아 자식에게서 실패의 경험을 무작정 빼앗아서는 안 된다. 어떤 실패는 때론 직접 겪어 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지니기도 하니까.

그러니 발레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위태위태하게나마 제힘으로 걸어 나가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할 때, 곧장 손을 뻗어 줄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 주는 일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 선대 에버딘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지키는 건 내가 하마. 너는 하고 싶은 걸 하거라.」

발레리안의 입을 타고, 언젠가 선대 에버딘 공작이 건넸던 말이 흘러나왔다.

테레지아는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고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팔을 벌렸다. 이제는 그 모양새가 꽤 자연스럽고 당당했다.

“크흠. 감사하니까 안아 드릴게요.”

「……‘안아 주는’ 거니?」

“제가 그 정도로는 컸답니다. 기특하죠?”

이번에는 발레리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움직이지 않고 눈만 몇 번 깜박이자 테레지아가 독촉하듯 눈을 부라리며 양팔을 파닥파닥 흔들었다.

발레리안은 결국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낮추고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테레지아가 헤헤 웃으며 마주 안겨 왔다.

* * *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 어느새 데미안과 함께 참석하기로 한 무도회 당일이었다.

“같이 안 갈 거야?”

<……네, 뭐. 번거로울 텐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흐음. 무슨 고민 있는 건 아니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릭을 추궁했다. 어조나 목소리나 담담하긴 하다만, 최근에 어쩐지 가라앉은 느낌이란 말이지.

하지만 릭은 솜뭉치 같은 손으로 내 고개를 꾹 밀어낼 뿐이었다.

<당신이 이러다가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걱정이긴 합니다. 얼른 가 봐요.>

“진짜지? 진짜진짜?”

<가라니까요.>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 돌아와서 셀레나한테 뭐 들은 거 없냐고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릭의 머리를 한번 토닥여 주고, 공작과 마차에 올랐다.

늦은 저녁이라서 그런가, 이마그 백작저는 지난번 다과회 때 보았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녀님.”

마차의 문이 열리자 데미안이 곧장 나를 반겼다. 그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나는 데미안이 내민 손을 잡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나를 보며 사르르 눈을 휘었다.

“오늘 정말 아름…….”

그때 데미안이 내 어깨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흠칫 말을 멈췄다.

“카펜디어 영식? 왜 그래요?”

그 반응에 나도 덩달아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막 마차에서 내려서는 공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뒤에는 공작밖에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는 찰나.

‘……어?’

잠깐이지만 데미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나고 싶을 정도로 짙은 경멸이 서린 시선.

하지만 놀라 눈을 깜박이자 그런 기색은 착각인 듯 사라졌다. 데미안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에버딘 공작님. 데미안 카펜디어입니다.”

공작의 대답은 약간의 차이를 두고 돌아왔다.

「……반갑네, 영식. 오늘 테리를 잘 부탁하지.」

“말씀대로 잘 모시겠습니다. 그럼 공녀님, 가실까요?”

데미안이 빙긋 웃으며 맞잡은 손을 살짝 당겼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뒤따르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데미안은 <투명 신사 이야기>를 읽었을까? 나름 대륙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에도 올랐는데.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유령…… 싫어하나?’

조금 전에 데미안의 날카로운 시선이 공작을 향했던 게 아닌가 싶어서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던지라 착각인가 싶기도 한데, 좀 찜찜해서.

기회를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불이 환히 밝혀진 무도회장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최자인 이마그 백작 부부와 백작 영애가 인사를 건넸다.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두 분…….”

이마그 백작 영애가 놀란 듯 데미안과 맞잡은 손을 응시했다. 데미안이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분하게도 공녀님께서 오늘 파트너 자리를 허락해 주셔서요.”

“오늘만일까요, 과연?”

“그건 제 뜻에 달린 게 아닌지라.”

이마그 백작 영애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데미안을 쿡쿡 찔렀다. 데미안은 그런 그녀의 손을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피하곤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좀 민망하구먼. 슬그머니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는데, 마침 음악이 시작되었다.

“미리 말한 대로 첫 춤은 공작님과 추고 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데미안은 선선히 손을 놓아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공작을 찾아 손을 맞잡았다.

공작과의 춤은 익숙했기 때문에, 그와의 춤이 끝날 때쯤에는 이마그 백작 영애 때문에 느꼈던 민망함이 많이 사그라든 후였다.

“이제 제 차례네요.”

덕분에 데미안이 그렇게 말했을 때 편하게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잘 추네.’

데미안은 축제 때와 다름없이 유려한 춤솜씨를 뽐냈다. 그것을 조금 감상하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묻기 위해 입술을 뗐다.

“카펜디어 백작 영식.”

“네, 공녀님.”

“혹시 <투명 신사 이야기>를 읽어 봤나요?”

“……아.”

데미안은 찰나 당황했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능숙하게 춤을 이어 가며 난처한 웃음을 띠었다.

“그 이야기가 유행했을 때는 제가 병상에 한창 누워 있었을 때라…….”

“앗…….”

“그 후로는 가문으로 돌아오고 어쩌고 준비하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못 읽었네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데미안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보자 죄책감이 마구 밀려들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사과를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지금은 건강해졌다니 다행이에요.”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미안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나도 그를 따라 마주 웃어 보이는데 여전히 마음은 찝찝했다.

‘방금 뭔가 묘하게…… 죄책감을 더 자극한 느낌이었는데?’

* * *

“테리!”

데미안과의 춤이 끝난 직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하리엔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곁에는 리벨, 멀린도 함께였다.

그들을 바라보자 데미안이 손을 놓고 옆으로 물러났다.

“잠시 다녀오시겠어요? 저도 다른 분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올게요.”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고 데미안과 헤어져 하리엔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곁에 서자마자 내 손을 꼭 그러쥐고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테리. 너, 카펜디어 백작 영식이랑 파트너야?”

“응? 응.”

“왜? 설마 약혼하려는 건 아니지?”

“쿨럭. 어, 뭐?”

순간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하리엔의 물음에 대한 당황이라기보다는…….

‘나…… 싫은가?’

그녀가 ‘약혼’을 언급했을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불쑥 일어난 거부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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