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97) (97/124)

<97화>

‘이리트 염료가 드디어 제국에 들어왔다고? 그럼 당연히 보러 가야지.’

데미안 카펜디어, 아니.

데미안 랑바드는 사실 처음 에버딘령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화제의 ‘소원 나무’만 구경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랑바드 공작의 시선을 피해 가출한 입장이었으니까.

‘아버지, 저 소원 나무인지 뭔지를 보러 에버딘령에 다녀와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데미안.’

‘소원 나무’에 대한 광고를 접한 날. 졸음을 참고 밤늦게 귀가하는 부친을 기다렸다가 간신히 그를 마주하고 물었을 때.

랑바드 공작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평소처럼 지극히 무감정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데미안은 시선 한 자락 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공작은 혀를 차거나 못마땅한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그가 못마땅한 기색이나마 내보였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데미안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늘 있던 일인데도 그날따라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이 거슬렸다.

……내가 봐야겠다는데, 어쩌라고?’

결국 그는 울컥한 마음에 호위 하나만 데리고 가출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흥미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부친에 대한 반항심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가출은 충동적이었지만, 데미안은 평소에도 머리가 비상하다며 스승들로부터 곧잘 칭찬을 받는 편이었다.

그는 가출하자마자 침몰하는 배에 올라 있는 카펜디어 백작 일가를 기억해 내고는 그들을 회유했다.

‘에버딘의 눈축제 기간만 나를 숨겨 주면 아버지께 카펜디어 백작가를 가신으로 받아들여 달라 잘 이야기해 보지. 얌전히 관광만 하고 돌아갈 거니까 딱히 문책당할 일도 없을 거야.’

데미안은 처음부터 카펜디어 백작가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드높은 지위, 비상한 머리, 아름다운 외모는 언제나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한 시선 속에서 자란 데미안에게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고 휘두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데미안의 예상대로, 카펜디어 백작은 약간의 갈등 끝에 없던 둘째 아들을 만들어 냈다.

순조롭게 카펜디어의 차남이 된 데미안은 느긋하게 소원 나무를 보러 갔다.

실제로 본 ‘이리트 염료’는 글줄로 묘사되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다웠다. 누군가 그 빛에 홀려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도둑질을 시도할 정도로.

물론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기에 소란이 일 때도 데미안은 소원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드는 탓에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아챘다. 한발 늦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시선을 내려 제 손에 잡힌 것을 응시했다.

‘……뭐야, 곰 인형?’

그건 곰 인형이었다. 데미안은 누구의 손때를 탔을지 모르는 걸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불쾌해졌다.

‘쯧.’

하여 혀를 차고 곰 인형을 바닥에 떨구려던 찰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저…….’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녹색과 푸른색이 뒤섞여 독특한 청록색 눈동자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라는 의문과 동시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행색 자체는 초라해 보이나 깨끗한 모습이다. 소원 나무를 보려고 온 어느 귀족가의 아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혹시라도 눈에 띄면 곤란하다. 그리 결론을 내리는 즉시 데미안은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띄웠다. 반쯤은 주입받듯 받은 교육의 힘이었다.

‘……아. 혹시 이 인형의 주인이신가요?’

데미안은 행여 누가 저를 알아보기 전에 곰 인형을 건네주고 사라질 작정이었다. 그러나 곰 인형의 주인인 소녀는 불쾌하게도 제멋대로 돌아서는 그의 소매를 잡아챘다.

‘저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그러더니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어딘지 절박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데미안은 잠시 의아해졌다.

나랑 어디서 만난 것처럼 구는데, 내 기억에는 없고. 표정을 보아하니…… 아하. 내 얼굴을 보고 반한 흔하디흔한 여자아이 중 하나로군.

그렇다면 더더욱 곤란했다. 데미안은 소녀를 상대해 주다가 랑바드 공작이 보낸 기사들에게 붙잡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재빠르게 도망쳤다.

그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놀랍게도, 데미안은 이리트 염료를 조금 얻을 방법이 없을까 싶어 참석한 다과회에서 소녀를 다시 만났다.

게다가…….

‘어서 오세요, 공녀님.’

그 소녀는 놀랍게도 테레지아 에버딘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데미안은 곧장 태도를 바꿨다.

‘지난번에는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아……. 설마 그날의 일을 벌써 잊으신 건가요? 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지난번’, 소원 나무 앞에서 만났을 때의 테레지아는 분명 데미안 자신에게 반한 듯 굴었다.

그래서 그는 테레지아를 살살 구슬려 이리트 염료의 독점 유통권을 빼앗기로 했다. 저런 순진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는 여자아이보다는 자신의 손에 유통권이 있는 것이 얼음고래족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가면입니까?’

‘음, 네. 이제 다시 동부로 완전히 복귀하셨다니까, 가면무도회 같은 곳에 참석할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후 카펜디어 백작가에서 재회해 선물로 가면을 건네받았을 때. 데미안은 테레지아의 눈에 서린 의심 반, 기대감 반을 보고 깨달았다.

테레지아는 자신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저렇듯 반신반의하는 표정인 걸 보아하니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거나, 상대가 일방적으로 사라진 듯하고.

선물로 이렇듯 ‘축제’에서나 쓸 법한 형태의 ‘가면’을 건네주면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건, 아무래도 축제 때 가면을 쓰고 만난 인연이라는 거겠지?

데미안의 비상한 머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테레지아의 눈빛과 행동으로부터 알아낸 것들을 기반으로 은근슬쩍 그녀가 좋아하는 이인 척했다. 저쪽에서 먼저 마음을 연 상대가 되는 것이 이리트 염료를 빼앗기도 쉬울 테니까.

다행히도 테레지아는 완전히 속아 넘어간 듯 보였다. 이대로라면 아예 다음 무도회 때 이리트 염료의 유통권을 빼앗아 오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하여간 너무 쉽잖아.”

데미안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바닥을 구르는 가면을 툭 찼다. 이리트 수정을 죄다 빼내어 흉한 모양새가 된 가면이 저만치로 날아갔다.

“<투명 신사 이야기>도 그렇고 이래저래 유명하다더니 순 과장이었군. 사실은 공작이 한 일인데 후계자의 입지를 굳히려고 넘겨준 모양이네. 그냥 멍청한 계집애였잖아?”

그래도 방심은 말아야겠지.

무도회 날은 평소보다 더욱 달콤한 모습을 가장해야겠다. 그래서 테레지아가 제 손으로 이리트 염료 유통권을 넘기게 할 것이다.

뒤늦게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은 테레지아의 얼굴은 어떨까?

데미안은 발끝을 까딱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는 제 얼굴에 반한 소녀들의 마음을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그들이 끝내 저 하나 때문에 절망하고 눈물짓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즐거웠다.

수도 위덴에서는 이미 그의 악취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애석하게도 이곳, 동부는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문득 머릿속에 불쾌한 생각이 스쳤다. 데미안은 손에 힘을 콱 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손안에서 이리트 수정들이 잘그락거리며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대체 나를 누구랑 착각한 거지?”

데미안은 제 미모가 객관적으로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악취미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음에도, 위덴에서 한 해에 한 명은 또다시 제게 반하는 것만 보아도 뻔하지 않은가?

아무리 가면을 썼다지만 그런 저와 헷갈릴 정도면, 테레지아가 본 상대는 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얘기지?

“지금까지 닮았다는 얘기를 한 번이라도 들은 건 클라센 소후작뿐인데……. 소후작은 몇 년째 혼수상태라 못 돌아다닐 테니 평민인가?”

이리트 염료 유통권을 빼앗을 생각에 좋았던 기분이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데미안이 형형한 눈빛으로 이를 뿌득 갈았다.

“건방지군.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얼굴에 상처나 내 줘야지. 어딜 감히 이 몸이랑 닮아?”

무의식중에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는지 이리트 수정이 또다시 잘그락거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데미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안에 잡힌 수정들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보자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다시 느른히 창틀에 몸을 기댄 데미안이 혀를 찼다.

“……아이릭 클라센도 우리 쪽 가문만 아니었으면 손봐 주는 건데. 쯧.”

뭐, 그쪽은 몇 년째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하니 없는 거나 다름없나.

데미안의 코에서 다시 흥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릴 때까지, 이리트 수정을 던졌다가 받았다가 하며 즐거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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