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 *
“램, 그건 뭐야?”
“아, 손님께서 맡기신 거. 돌아갈 때 찾아가시겠대.”
“아하.”
램이라 불린 카펜디어 백작저의 하녀가 한 말에, 현관을 지키던 하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램은 현관 안쪽의 작은 테이블 위에 조금 으스스하게 생긴 곰 인형을 놓고 바쁘게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현관을 지키던 하인은 곰 인형을 힐끗 일별하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이 찢어질 듯 하품했다.
그렇게 주변이 조용해진 후.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릭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천과 솜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조심했기 때문인지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단추로 된 눈이 스산한 빛을 머금었다.
‘슬슬 움직여도 되겠지.’
사실 릭이 테리에게 자신을 두고 가라 하며 말한 이유는 거짓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좋아하는 사람을 웬 사기꾼과 단둘이 놔두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릭이 테리를 데미안에게 등 떠밀어 보낸 이유는…….
‘……확인해 봐야겠어.’
‘릭’인 척하는 데미안이 도대체 누구인지, 대체 왜 테리에게 접근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릭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인간 모습은 데미안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보랏빛 눈, 흰 피부, 이마 위로 단정히 내려앉은 머리카락까지.
그조차 처음 데미안을 본 순간 경악했으니 테레지아야 오죽하겠는가. 그것도 저렇게 작정하고 속이려 드는 것을.
그러니 사람들이 전혀 경계하지 않을 릭 자신이 직접 나서서 데미안을 파헤쳐 볼 수밖에 없었다.
저번 일로 힘을 어느 정도 잃은 셀레나, 그리고 에버딘 저택의 유령들은 이렇듯 저택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움직였다가는 자칫 소멸할 테고, 카펜디어 백작저에는 유령이 없는 듯 보였으니까.
‘운 좋게 뭔갈 알아낸다 해도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릭은 테이블 다리를 주르륵 타고 내려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지 유령…… 그러니까 ‘죽음의 신’ 하데스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는 릭에게 ‘내가 테리가 만난 바로 그 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제약을 걸어 두었다고 했었다.
실제로 지난번 데미안이 자신인 척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욱해서 진실을 외치려 하자 말소리가 이상하게 변형되어 들리지 않았던가.
릭은 그 제약이, 자신이 테리에게 ‘데미안은 당신이 찾던 그 아이가 아니다’라는 증거를 찾아 전달하는 것까지 영향을 미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하데스의 심술궂은 제약이 거기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데미안이 음습한 의도를 가졌다는 걸 알아낸다 한들 크게 소용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정을 다 알게 되었는데도 곁에서 테리를 지켜봐야 하니 가슴을 서너 번 더 쳤으면 쳤지.
게다가 테레지아는 지금 데미안의 연기 때문에 그가 자신이 보았던 건국제의 그 소년, 첫사랑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 테레지아에게 모든 것이 당신의 착각이었노라 말한다면 그녀는 과연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오히려 철저히 기만당한 마음 때문에 아파하며 울지 않을까?
‘만약 데미안 카펜디어가 테리에게 달리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면.’
정말로 데미안이 그저 테레지아를 마음에 들어 해서, 조금 비겁한 수단을 써서라도 가까워지고 싶어 했을 뿐이라면.
그렇다면…… 굳이 테레지아의 ‘오해’를 풀어 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상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자신의 인간 모습조차 데미안 카펜디어를 본뜬 ‘가짜’일지도 모르는데…….
릭은 가슴이 멍든 사과처럼 욱신거려 잠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곧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곰 인형을 이루는 천이 보들보들한 탓에 벽을 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목에서 풀어 낸 리본으로 지탱하여 움직이다 보니 어찌어찌 카펜디어 백작의 집무실 창가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백작과 장남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보였으니 여기부터 확인하는 게 맞겠지.’
릭은 아까 식사 자리에서 데미안에게 어색하게 굴던 카펜디어 백작과 백작 영식의 모습을 기억했다.
테레지아가 미심쩍은 기색을 내비친 후로부터는 해명과 더불어 훈훈한 대화만이 오갔다지만.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릭은 테이블 아래로 백작과 장남의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 켕기는 구석이 있기에 나온 행동일 것이다.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릭은 행여 테리가 자신의 행동을 눈치챌까 싶어 건물의 외벽을 타고 오르느라 묻은 먼지를 최대한 열심히 털어 내고, 밧줄로 써먹었던 리본을 다시 맸다.
리본은 전체적으로 주름이 살짝 져 있고 엉성한 모양이었으나 그럭저럭 예전과 비슷하다고 봐줄 만했다.
매무새를 얼추 가다듬은 릭이 까치발을 들고 창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직후 그가 놀라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백작 영식이 왜 여기에……?’
분명 아까 만찬이 끝난 후, 백작은 업무, 장남은 검술 수업을 이유로 들어 모습을 감췄다.
그런데 그는 지금 숨 한번 고르지 않는 말끔한 모습으로 백작의 집무실에 서 있었다. 검술 수업을 빠르게 끝내고 달려왔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시간인데…….
‘설마 거짓말이었나?’
그렇다면 왜?
릭은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창틀 사이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집무실 안의 대화가 희미하게나마 들렸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씀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공작님께서 계속 공자님을 찾고 계신다던데, 이러다가 저희가 공자님을 감춰드리고 있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아버지!”
장남은 소파에 앉아 양손을 깍지 낀 채 아무런 말도 없는 백작을 향해 울컥해 목소리를 높였다.
릭이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 한참 동안 침묵하던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식당에서는 꽤 유약한 인상이던 그의 눈은 탐욕, 그리고 기묘한 희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니. 공자님께서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면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이대로라면 네가 백작위를 물려받기도 전에 카펜디어의 이름이 귀족 명부에서 지워질 거다. 너는 그것을 바라는 것이냐?”
“…….”
장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 역시 백작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는 점을 안다는 태도였다.
백작이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양손을 꾹 모아 쥐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공자님은 차기 랑바드 공작이시다. 그런 분께 잘 보이는 건 성공이 확실한 투자나 다름없어.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이런 기회나마 온 것이 기적이다.”
“…….”
“공자님께서 만약 들키더라도 공작님께 잘 말씀드려 주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공자님을 도와드리고 가신 자리를 꿰차면 된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이야. 알겠느냐?”
“……예.”
장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또다시 한숨을 뱉고는 아들의 머리카락을 투박한 손길로 몇 번 쓰다듬었다. 이것도 다 널 위한 일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사이, 릭은 ‘랑바드’라는 말을 알아듣고 급하게 창틀에서 손을 떼고 몸을 낮췄다. 없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듯한 기분이었다.
‘랑바드 공작가라면.’
클라센 후작가와 더불어 에버딘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가문 아니던가. 그런데 데미안이 그런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게다가 이야기를 듣자 하니, 지금 데미안은 카펜디어 백작의 뒤에 숨어 랑바드 공작을 피하는 중인 듯싶었다. 제 친부를 피해 이곳에 와 있는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역시 말이라도 해 봐야 하나? 데미안은 카펜디어가 아니라 랑바드라고?’
데미안의 꿍꿍이속이 무엇이든 간에, 테레지아라면 에버딘의 적이나 다름없는 랑바드 공작가의 일원을 제 옆자리에 두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블렌 자작령을 사들이는 것만큼이나 ‘에버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에버딘의 적은 곧 그녀의 적이었다.
하지만 릭이 우여곡절 끝에 온실에 도착했을 때, 데미안은 가면을 쓴 채 테리를 보고 웃고 있었다. 테리는 그런 그에게 완전히 마음을 뺏긴 듯이 가만히 눈만 깜박이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두려움이 가슴을 물씬 적셨다.
‘이 상황에서…….’
별다른 증거 없이 단순히 ‘데미안은 당신의 적입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사랑에 빠진 테레지아가 과연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줄까?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근거도 없이 헐뜯는다며 그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테레지아’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릭은 허황한 불안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그가 테레지아를 좋아하고 믿는 만큼 불안이 그 마음 밑으로 그늘을 드리웠다.
‘랑바드라고 해도, 그가 정말 테리를 좋아하는 거면…… 해를 끼치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릭은 속으로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어렵사리 발길을 돌렸다. 데미안이 테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우선은 곁에서 지켜보자고 생각하며.
하지만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비겁한 합리화일 뿐이라는 걸.
결국 릭은 좋아하는 이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 * *
그날 밤, 테레지아가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난 시각.
“흐음.”
잘그락-
작은 자갈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흥미로움이 담긴 콧소리가 어둑한 방을 울렸다.
창턱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은 검은 머리의 소년이 손을 들어 달빛에 손에 든 것을 비춰 보았다.
그의 손안에 들린 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투명한 수정이었다. 그의 발치에는 군데군데가 흉하게 움푹 파인 가면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리트 수정을 바라보는 소년, 데미안의 보랏빛 눈이 장난으로 나비의 날개를 뜯어냈을 때처럼 반짝였다.
“‘이리트 염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