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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95) (95/124)

<95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나도 모르게 식기를 멈추고 백작과 장남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힐끔 이쪽을 일별한 데미안이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서글피 웃었다.

“……역시 아버지와 형님께서는 제가 아직 불편하신가 보네요.”

“……어?”

“그, 그게 무슨.”

데미안의 말에 장남과 백작이 화들짝 어깨를 굳혔다. 그들이 쥐고 있던 식기가 그릇에 부딪히며 쨍, 하는 소음을 만들어 냈다.

데미안은 담담한, 어찌 보면 체념에 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열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하긴. 건강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가족을 떠나 지내다가 이제야 돌아왔는데……. 당장은 제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겠죠.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보랏빛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애잔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에 백작과 장남이 반박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수긍했다. 그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 그게…… 미안하구나, 데미안. 너도 내 아들인 것을…….”

“……어색해해서 미안.”

“사과를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형님.”

데미안은 백작과 장남이 나란히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듯 스푼을 내려놓았다가, 결국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대화 이후로 경직되어 있던 식당의 분위기가 훈훈하게 바뀌었다.

백작과 장남은 조심스레 데미안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고 –주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데미안은 웃으며 답했다. 그야말로 그린 듯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납득 가는 이유이긴 한데.’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내 마음이 어쩐지 시원스럽지 않았다.

데미안의 물음도, 백작과 장남의 답도 내 의문을 들여다본 듯 이루어졌다. 이 상황이 굉장히 잘 짜인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인가……?’

하긴. 내가 백작과 장남을 몰래 관찰한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쳐다봤는데. 내가 선뜻 질문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먼저 배려해 준 걸 수도 있잖아.

“공녀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저희 가문이 그리 부유한 건 아니지만, 주방장의 솜씨가 나쁘지 않아 이 콩조림만큼은 괜찮답니다.”

“앗, 고마워요.”

마침, 이라고 해야 할지 데미안이 내 접시에 콩조림을 덜어 주며 상냥히 말을 붙였다. 그 바람에 직전까지 이 상황을 의심하고 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을 콕콕 찔렀다.

‘에이, 억측이겠지!’

애초에 다른 사람이 그날의 일을 알 리가 없잖아. 내가 축제 때 잠시 사라져서 뭐 했는지는 릭도 모르는데.

이후로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만찬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낯선 자리, 낯선 사람들 틈에서 식사한 탓인지 조금 얹힌 느낌이 들었다.

* * *

기묘한 만찬이 끝난 후, 백작과 장남은 각기 업무와 검술 수업을 이유로 물러갔다. 둘만 남게 되자 데미안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날이 추우니 티타임은 온실에서 가지는 게 어떠십니까?”

“아,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안이 사용인들을 불러 온실에 자리를 만들라 명령했다. 그때 품에 안겨 있던 릭이 내 팔을 툭 쳤다.

“왜?”

시선을 내리고 속삭이듯 묻자 릭이 말했다.

<저는 두고 다녀오십시오.>

“응? 갑자기 왜?”

<첫사랑…… 이라면서요. 자리를 비켜 줄 테니 편하게 대화하시죠. 저는 건물 안에 있을 테니까요.>

“으음.”

확실히…… 데미안에게 가면을 씌워 보고, 건국제 축제 때의 일도 물어봐야 하니까. 우리 말고 다른 사람, 혹은 유령이 없을수록 좋긴 하다만.

망설임 끝에 주변의 사용인 하나를 붙잡고 릭을 내밀었다.

“온실에서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더러워질 것 같아서요. 잠시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현관 쪽에 둘 테니 돌아가실 때 말씀해 주세요.”

사용인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릭을 건네받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긴 릭을 바라보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어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어깨를 두드리는 데미안의 손길에 몸을 돌렸다.

카펜디어 백작저의 온실은 아름다웠다. 순간적으로 오블렌 자작령을 사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공작저에도 만들어 달라고 할까……?’ 싶을 정도로.

‘핫, 아니지. 테레지아 에버딘, 정신 차려!’

이건 단순히 공작에게 필요한 마도구를 사는 것이나, 계절을 날 옷을 사는 것 등과는 다른 문제였다.

물론 온실이 있으면 저택의 조경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보통은 유령이 득시글한 에버딘 저택에 굳이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처음 에버딘 저택에 왔을 때 칼리오스가 보였던 반응만 보아도 충분히 증명되지 않는가?

그러니 지금 에버딘 저택에 온실을 짓는 것은 사치 그 자체였다. 사치는 오블렌 자작령을 사고 나서 부려도 늦지 않아!

“이쪽으로 앉으시죠.”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을 다잡는 사이, 데미안이 온실 한가운데 놓인 의자를 빼 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자 데미안이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들로부터 단 향이 확 퍼졌다.

‘조금 다네.’

평소 에버딘 저택에서 먹던 디저트들보다 조금 더 달긴 했지만, 차와 함께 먹으니 그럭저럭 입맛에 맞았다.

예의상 차 한 잔을 먼저 다 비운 후 미나에게 손짓해 미리 준비한 선물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미나는 상자를 내게 건네주고는 다시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멀어졌다.

데미안이 눈을 깜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녀님, 그건……?”

“아. 초대에 감사하는 뜻으로 준비해 본 선물이에요. 별건 아니지만…….”

사실 순수한 선물도 아니고, 데미안의 가면 쓴 모습을 확인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도 섞여 있었지만……. 양심이 찔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웃는 얼굴로 그에게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받아 든 데미안이 천천히 리본을 풀었다. 이어 상자 안에 든, 반짝거리는 반 가면을 발견한 데미안이 눈을 크게 떴다.

“가면입니까?”

“음, 네. 이제 다시 동부로 완전히 복귀하셨다니까, 가면 무도회 같은 곳에 참석할 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보통은 가면 무도회의 주최 측에서 가면을 미리 준비해 놓는다지만. 가끔 자신만의 가면을 미리 준비해 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베스가 저 정도면 선물로 부끄럽지도, 과하지도 않댔으니까.’

데미안에게 건넨 가면은 내가 축제 때 보았던 것과 유사한 형태였다. 흰 바탕에, 금색 무늬. 거기에 이리트 염료를 칠한 수정 몇 개를 추가로 장식했다.

“…….”

데미안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가면에 박힌 이리트 수정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이건…… 이리트 염료인가요?”

“네. 투명한 수정이어도 이리트 염료를 바르면 무지갯빛으로 빛나게 할 수 있거든요.”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데미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면 한번 써 보시겠어요? 얼굴에 잘 맞는지는 봐야 하니까.”

“아, 네. 기꺼이요.”

데미안이 싱긋 웃고 가면을 들어 올렸다. 나는 긴장감을 애써 다스리며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떻습니까. 잘 어울리나요?”

유려한 동작으로 가면을 쓴 데미안이 웃으며 물었다.

그가 가면을 쓴 채 웃자 이번엔 정말로, 축제 때 보았던 얼굴과 똑같아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데미안이 제 얼굴 위를 덮은 가면을 손끝으로 쓸더니 나지막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이 가면을 보니 공녀님과 함께했던 축제 때가 떠오르는군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따로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 말이 확인이나 다름없었다.

건국제 축제 때 나와 춤췄던 그 아이. 데미안 카펜디어가 바로 그 아이였다.

‘……?’

마침내 데미안이 내가 찾던 그 소년이 맞음을 깨달았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잠잠했다.

한 손을 가만히 가슴께에 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데미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 시선에 고민하다가 머뭇머뭇 입술을 뗐다.

“그러면 그때…….”

“네.”

“왜…… 나한테 뽀뽀했어요?”

으아아. 막상 입 밖으로 내놓으니 더 민망해!

그 말을 내뱉자마자 민망함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바람에 데미안이 내 물음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히, 공녀님께 첫눈에 반했으니까요.”

“콜록.”

잠시 후 생각보다도 훨씬 더 직설적인 답이 돌아왔다. 그 바람에 숨을 잘못 들이켜 콜록대며 눈을 떴다. 나와 달리 데미안은 부끄러운 말을 내뱉고도 여전히 동요 하나 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아우, 열 올라. 볼이 달아오르는 걸 숨기려고 찻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것을 꼴깍 삼켰을 때 데미안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곧 이마그 백작가에서 무도회가 열릴 거라던데, 파트너로 참석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아니, 그. 네?”

볼을 식히느라 정신이 없어서 한발 늦게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데미안은 기대감 서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거절하기가 어려워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 여쭤보고요.”

“이번에는 가면 없이 공녀님과 춤을 출 수 있겠네요.”

데미안은 공작이 당연히 허락해 줄 것이라 믿는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다시금 민망함이 차오르는 기분이라 나는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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