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 *
결국 그날의 시식회는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공작, 세바스찬, 미나가 갑자기 10년은 늙어 버린 사람들처럼 고단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뭐지?’
그게 신경 쓰여서 내가 뭘 잘못했는가에 대해 하루를 꼬박 더 고민해 보다가 포기했다.
난 모르겠다. 정 실수한 게 있으면 사과받고 싶어서라도 말해 주겠지, 뭐.
그렇게 시식회 때의 기묘함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사실 시식회에서 맛본 케이크에 이리트 염료를 적용하는 사업을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턱없이 부족했다.
공작을 비롯한 어른들, 셀레나와 같은 유령들의 도움까지 받아도 여전히 사업이라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커서 많은 걸 경험하게 되면 좀 달라질까?
……아냐, 그때가 되어도 머리 아픈 건 똑같을 것 같아. 오히려 지금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까지 내가 일일이 살펴야 할 테니 두 배로 머리 아프겠지. 으!
‘일 좋은데 싫어…….’
그렇게 극심한 내적 갈등 속에서 며칠이 지나가고,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아가씨. 카펜디어 백작가에서 온 초대장이에요.」
“오!”
혹시 안 보내면 어쩌지 싶어서 걱정했는데, 보냈구먼. 미나의 말에 반색하며 소파에서 뛰어내려 달려갔다.
꽈아악.
“응?”
손을 뻗어 미나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를 가져오려 했는데, 편지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놀라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편지지를 꾹 붙들고 있는 미나의 손이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에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나의 얼굴이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다시 한번 슬쩍 편지를 당겨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 미나가 힘이 이렇게 셌던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자니 미나가 곧 손에 힘을 풀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우울한 얼굴로 수첩에 글을 끼적였다.
「아가씨…….」
“네?”
「사랑은 관에 같이 누울 때까진 모르는 거예요. 아셨죠?」
뜨, 뜬금없이?
그렇게 되묻고 싶었으나 미나의 눈이 기묘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기세에 눌려 얼결에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어, 어어. 알죠, 그럼.”
「역시 영특하신 우리 아가씨. 꿀 우유 한잔 드시겠어요?」
“헉? 진짜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가 알겠다고 대답한 덕분일까. 미나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손을 팔랑팔랑 흔들다가 문득 든 생각에 픽 웃었다.
‘그 말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 걸요, 미나.’
오블렌 자작이라는 아주 생생한 예시와 한 지붕 아래서 살았으니 말이다.
근데 축제 때 걔는, 그러니까 데미안은 이상하게 믿음이 간단 말이지. 나를 절대 저버리지 않을 것 같다는…….
‘헉, 이게 토미가 말한 콩깍지인가?’
그가 첫사랑인 걸 인정하고 난 후로는 뭔가 부끄러울 만한 생각을 좀 더 거리낌 없이 하게 된 듯하다. 이래서 자각이 무섭다는 거로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데미안이 보낸 초대장을 뜯었다. 직후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왜 그럽니까, 테리?>
“이것 좀 봐. 글씨가 엄청…… 일정해.”
릭의 물음에 그쪽으로 편지지를 기울여 보여 주었다.
데미안의 글씨체는, 뭐랄까. 마도구라도 써서 일정하게 찍어 낸 것 같았다.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규칙적인 글씨를 적을 수 있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연습 엄청 많이 했나 본데?
「테레지아 에버딘 공녀님께.
데미안 카펜디어입니다. 손님맞이를 위해 부친을 설득해 저택을 단장하느라 연락이 늦었네요.
괜찮으시다면 카펜디어 백작가에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편지의 내용을 간단히 간추리자면 그것이었다. 애초에 내가 초대해 달라고 했던 것이었으므로 큰 거리낌 없이 알겠다는 답장을 썼다.
에버딘 가문의 상징, 흰가지나무 인장을 꾹 눌러 봉투를 봉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저택을 뜯어고치기까지 했다는데, 선물 하나쯤은 챙겨 가는 게 예의겠지?”
<……선물, 이요.>
“응. 뭘 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가면을 선물로 주면 자연스럽게 가면 쓴 얼굴도 확인할 수 있겠네?’
데미안이 꼭 ‘소년’처럼 굴었다고는 하나, 아직 확인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가면 쓴 얼굴이라든가, 축제 때 나와 정확히 뭘 했는지 기억하는지 라든가.
그런 것들을 확인해 봐야 비로소 마음 놓고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이 정도로 닮았고, 행동까지 저런데 계속 확인하는 나도 나군.’
그 밤의 일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기에, 소년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난 걸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나 보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상념을 털어 내고, 미나에게 선물 준비를 위해 베스를 불러 달라고 말하는 내 곁을 릭이 묵묵히 지켰다.
최근 들어 늘 보아 오던 모습이지만, 그날따라 진짜 인형처럼 말 한마디 없이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것이 유달리 신경 쓰였다.
* * *
다행히도 방문 날짜에 맞추어 선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완성된 가면을 상자에 예쁘게 포장하고, 그걸 든 채 카펜디어 백작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동안 창밖을 구경했다. 같은 동부이긴 하지만 에버딘령을 벗어난 곳이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굉장히 달랐다.
“흠, 한적한 곳이네.”
……사실 좋게 말해 한적한 거지,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황량함에 가까웠다.
지난 며칠, 시식회인지 뭔지 모를 기묘한 일 때문에 예기치 않게 중단되었던 카펜디어 백작가 조사도 마쳤다.
카펜디어는 백작가지만 영향력은 자작가 수준이었는데, 몇 년간 흉작이 계속된 후로는 완전히 남작가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동부는 추위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부유하기가 힘들다지만…….’
그걸 알고 나니 내가 방문한다는 사실 때문에 백작 일가가 괜히 무리한 건 아닌가 싶어 양심이 조금 찔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백작이랑 장남한테 줄 선물도 따로 챙길 걸 그랬나? 하지만 마차는 이미 출발해 버렸는걸……. 미안합니다.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전하는 사이 카펜디어 백작저가 가까워졌다.
「이건 제가 챙길게요, 아가씨.」
마차가 정문 앞에 멈춰 서니 미나가 상자를 챙기기에 먼저 내리려 했다. 하지만 막 마차 밖으로 한 발을 내디디려던 차에 눈앞에 불쑥 손이 나타났다.
“공녀님.”
달큰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음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미소 짓는 데미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정중한 웃음을 띤 채 장갑 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잡으시죠.”
“앗, 그. 넵.”
어색함으로 인해 조금 뻣뻣하게 대답하고 그의 손을 잡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손목을…….”
‘응?’
언뜻 스산한 중얼거림이 들리는 듯해 뒤를 돌아보았으나 미나는 자애롭게 웃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환영합니다, 공녀님. 이쪽은 제 아버지와 형님이세요.”
때마침 데미안의 목소리가 다시 주의를 끌었다.
그가 이끄는 방향을 바라보자 조금 긴장한 듯한 기색을 내비치는 어른 한 명, 그리고 데미안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듯한 소년 한 명이 서 있었다. 백작과 장남이었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누추한 곳에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습니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갑자기 방문하겠다고 했는데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지나치리만큼 깍듯한 그들의 태도에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나더러 상냥하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건 상냥하다기보다는, 그냥 나를 무슨 황제 대하듯 대하니까 어색해서 그런 건데.
멋쩍어서 볼을 긁적이는 사이, 데미안이 백작과 장남을 번갈아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인사도 나누었으니, 이제 식당으로 갈까요? 주방장이 기껏 준비한 음식들이 이러다가 다 식겠습니다.”
“아, 그, 그러…… 자꾸나.”
“이, 이쪽입니다.”
데미안의 말에 백작과 장남이 파드득 놀라며 답했다. 그 분위기가 조금 묘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음……?’
뭔가…… 아주 친밀해 보이는 가족은 아니네. 데미안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백작과 장남이 데미안을 어려워하는 느낌?
‘에이, 착각이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잠깐 덮어 두었던 의구심은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점차 크게 부풀었다.
‘……자기 아들을 저렇게까지 불편해할 이유가 있나?’
백작과 장남은 데미안을 불편해한다.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들은 식사 내내 데미안을 흘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듯 행동했고, 그때마다 데미안이 웃으며 말을 걸면 짧게 어깨를 굳혔다. 도저히 ‘가족’의 식사 자리로 보이지는 않는 광경이었다.
‘데미안이 두 사람이랑 안 닮긴 했지.’
카펜디어 백작과 장남은 수수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 반해 데미안은 화려하고 예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고.
하지만 카펜디어 백작은 오블렌 자작처럼 정부를 두거나 한 적도 없다고 들었다.
나랑 로렌스처럼 이복 남매인 것도 아니고, 생김새가 좀 다르다지만 엄연히 친아들이자 친동생일 텐데.
저렇게까지 껄끄러워할 이유가 있나?
‘뭔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