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93) (93/124)

<93화>

* * *

‘뜬금없이 웬 시식회?’

조금 떨떠름하긴 하지만 우선 앉으래서 앉았다.

그러자 세바스찬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포크를 내밀고, 미나는 케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건네주었다. 공작은 세상에서 가장 신중한 표정으로 우유에 꿀을 타기 시작했다.

일련의 행동이 잘 짜인 연극처럼 물 흐르듯 흘러갔다. 요상하게 구는 이들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살펴보며 습관적으로 포크를 움직였다.

‘헉, 맛있다.’

하지만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시선을 휙 내리자 접시 위에 놓인 케이크 조각에서 조금 전과 달리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보였다.

이 정도 맛이면…… 시식회 열 만하네!

‘그러고 보니 밀레시아 제과점 쪽에도 슬슬 신상품을 내야 하는데. 이리트 염료는 식용으로 써도 괜찮다고 했던가?’

바쁘게 포크를 움직여 케이크를 마저 해치우며 머리를 굴렸다.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 보고 있는데 공작이 꽤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저, 테리.」

“넹?”

「이메그 백작가에서의 다과회는 어땠니? 일이 많아 묻는 게 늦어졌구나.」

앗, 맞다. 공작이 바빠지는 바람에 다과회에 다녀온 뒤로 식사도 함께 못 하고, 따로 이야기도 안 나눴지.

내가 하리엔, 리벨, 멀린을 제외한 이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한 건 처음이니 궁금할 만도 하군. 입안에 가득한 케이크를 꿀꺽 삼키고 답했다.

“움…… 그냥 평범했죠. 아! 신제품 홍보는 확실하게 하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너를 아는데, 그런 부분으로 걱정할 리가.」

공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 얼굴을 보자 묘한 쑥스러움과 뿌듯함이 차올라 헤헤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이런 믿음은 기분 좋구먼.

「에버딘의 가신이 아닌 이의 초대에 직접적으로 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 괜찮았니?」

공작이 어느새 능숙해진 동작으로 머들러를 휘저어 꿀과 우유를 섞었다. 나는 다과회 때의 기억을 짧게 되짚어 보고 말했다.

“네. 다들 친절하던데요?”

「……달리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고?」

그 물음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경직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착각인가?

하지만 세바스찬과 미나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우리의 시중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물음을 던진 공작의 시선도 꿀 우유 잔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큰 의미가 담긴 물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눈에 띄는 친구라.’

그래서 나도 부담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으음. 한 명 있긴 하죠? 너무 눈에 띄어서 머리를 어지럽히기까지 하던 애가.

“한 명 정도……?”

「그래? 어떤 아이기에?」

……어떤 아이냐고?

그 물음이 문득 심장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충격, 혹은 놀람으로 인해 나도 모르는 새에 움직임이 멎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체 왜 이렇게 그 ‘소년’을 신경 쓰는 거지?

지금까지 수차례 들었던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소년, 그러니까, 데미안 카펜디어는 내게 어떤 의미일까.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오블렌 자작저에서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당시의 나는 도서관의 책들을 모두 떼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유령들과 함께 이런저런 책을 들추어 보던 중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을 발견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문장. 그래서 토미에게 물어보았다.

‘토미, 이게 무슨 뜻이야?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으음, 말 그대로야. 첫사랑은 보통 평생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 금세 좋지 않게 끝난다고 해서 그런 말이 생겼대.>

‘첫사랑은 뭐가 특별해? 그냥 첫 번째 사랑이라는 뜻 아니야?’

<특별하다기보다는 서투르다는 거지. 네 말대로 첫 번째로 겪어 보는 사랑의 감정이니까, 그걸 표현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러서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만다는 뜻이야.>

‘그으렇구나아…….’

도통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들렸기에 말꼬리를 늘이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었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 세상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멈췄고, 에버딘에 오고 나서야 간신히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이해도 못 하는 말에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금세 관심을 껐다.

하지만 토미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는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오. 역시 글로만 설명하려니 애가 영혼 없이 대꾸만 하네.>

‘그러는 너도 나랑 나이 차이 얼마 안 날 때 죽었다면서? 그래서 아이 모습이라고 했잖아.’

<몇 년 선배는 선배가 아니냐? 어쨌든 내가 너보다는 몇백 년 인생 선배야, 인마. 아무튼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토미는 허공에서 책상다리를 하더니 팔짱을 꼈다. 그가 전에 없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테리, 사랑은 말이야.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 너한테도 첫사랑이 생기면, 누구보다 네가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었더라? 생각해 보자.

‘……너.’

<하, 내가 생각해도 방금 나 좀 멋있었다. 오빠라고 불러도 좋아.>

‘방금 되게 사기꾼 같았어.’

<야! 이게 어디서 안 좋은 말만 배워서!>

‘뭐! 왜! 뭐! 너한테 배웠거든!’

……그만 생각하자.

그 뒤로 서로 볼 꼬집고 싸웠던 건 잊어버리자, 토미. 우리에겐 아름다운 추억과 우정만 남은 거야, 응.

아무튼 얘기가 좀 멀리 돌아왔는데. 하필 이 순간에, 하필 이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라면 명백하지 않은가.

‘내가 누군지 찾아내 줘요.’

‘저는 당신이 조금 더 저한테 집착해 줬으면 좋겠거든요.’

그린 듯 선명하진 않지만, 아직 내게는 그날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어색하게나마 발을 움직이던 감각,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던 온기. 그에 대비되게 조금은 쌀쌀했던 가을의 밤바람.

알 수 없이 사람을 간지럽게 만들던 보랏빛 눈.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하던 웃음.

‘……첫사랑.’

그래, 그런 이유였구나.

왠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한번 이게 어떤 감정인지 자각하고 나니 이걸 지금까지 왜 모르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기꾼이라고 한 건 취소해 줄게, 토미.’

정말 모를 수가 없는 감정이구나, 이거. 누군가 깃털로 마음속을 간질이는 듯하다.

짧게 헛웃음을 흘리니 맞은편에 앉은 공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제야 그가 아직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포크를 다시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내내 의문이던 걸 해소해서 그런가, 대답은 홀가분하게 튀어나왔다.

“으음. 굳이 생각해 보자면…… 첫사랑 같은?”

쨍그랑!

답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공작이 열심히 젓던 꿀 우유 잔을 떨어트린 것이었다. 그는 눈축제에 세워진 눈 동상처럼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꽝꽝 언 모습이었다.

“……주,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제가, 제가 치울게요!”

한 박자 늦게 세바스찬과 미나에게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바스찬은 공작의 안위를 살피고, 미나는 재빠르게 깨진 유리잔과 바닥에 흐르는 꿀 우유를 치웠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 잔과 우유, 그리고 머들러를 공작에게 건넸다.

분명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하건만, 어째서인지 공작의 얼굴에서 혈색이 싹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가까스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가 잔에 다시 우유를 담고, 꿀을 탔다.

「그, 그, 그렇, 그렇구나. 첫, 첫사랑이란 말……이지…….」

달각달각달각달각달각.

공작이 한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유리잔이 시끄럽게 달각거리는 소음이 그 위를 덮어 버렸다.

머들러를 쥔 손을 넘어, 공작의 몸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 듯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진동이 어찌나 심한지 금빛 눈이 네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왜 저러지? 첫사랑이 생겼다는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토미가 첫사랑은 누구나 생기는 거랬는데……?

<첫사랑…… 첫사랑이라고……? 좋은 건가? 아니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 아니. 좋은 게 맞나?>

넌 또 왜 그러냐.

공작의 반응도 이해하기 힘든데, 한술 더 떠 릭도 이상해졌다.

내 무릎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그는 미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말이 너무 빠른 탓에 8할은 못 알아들은 듯하다.

“끄흡, 끕, 끅…….”

“허어……. 허어어…….”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어 봤다. 그랬더니 미나는 공작의 왼편에서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었고, 세바스찬은 저러다 호흡곤란이 오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뭐, 뭔데, 이 분위기.’

대체 나 뭘 실수한 거냐……?

급속도로 어수선해진 시식회가 끝날 때까지 열심히 고민해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머리를 너무 과하게 굴린 탓인지 결국 체했다.

……내가 다시는 아무거나 주워 먹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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