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92) (92/124)

<92화>

“흐으으음.”

침대에 거꾸로 누운 채 이 이유 모를 찝찝함을 파악하려 고민하던 때였다. 유달리 조용히 앉아 있던 릭이 불현듯 말문을 뗐다.

<테리…….>

“응?”

나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시무룩했으니까. 처음 만난 이래로 이렇게까지 기운 빠진 목소리는 처음이었기에 덜컥 걱정이 앞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안 그래도 최근에 이상하게 말이 없던데. 설마…… 어디 아파?”

아무리 유령은 아플 일이 없다지만, 릭은 유령 중에서도 독특한 상황이니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

급히 그를 들어 올려 상태를 살피려는데 릭이 나를 막았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말했다.

<사람은 겉모습이 다가 아닙니다.>

“응?”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상관없는 건가. 아무튼,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면을 봐야 합니다. 당신은 영리하니까 잘 알겠지만…….>

뭔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리고는, 뜬금없이 사람은 내면이 가장 중요하다는 잔소리를 줄줄 늘어놓는다. 다소 흐느적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어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한순간에 바람 빠지듯 긴장이 픽 풀려 버렸다. 뭔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그냥 새로운 방법으로 잔소리에 시동을 건 것뿐이었군…… 괜히 놀랐네, 떼잉.

릭이 평소와 다름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그의 잔소리를 익숙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데미안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갔다.

‘데미안 카펜디어……. 카펜디어 백작가는 에버딘의 가신이 아니다 보니 잘 모르는데. 서고에는 뭐라도 있으려나?’

그래. 진짜로 초대해 줄지까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초대해 달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는 공부하고 가는 편이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카디건을 걸치자 그때까지도 잔소리를 이어 가던 릭이 불퉁하게 말했다.

<지금 도망가는 겁니까? 저는 진심입니다만.>

“……아니? 도망이라니? 난 그냥 카펜디어 백작가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하는 건데?”

<그럼 왜 저랑 시선을 못 마주치는데요.>

“……쳇.”

들켰나. 그런 의도도 없지 않았건만…….

결국 전보다 더 열성적으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릭을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서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해진다. 혀를 차며 릭의 잔소리를 일축하려던 차였다.

“이러다 귀에서 피 나겠다. 네가 말한 대로 난 바보가 아니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으니까 조용히 좀…… 응?”

시야에 이질적인 색이 비친 것은 그때였다.

에버딘 저택의 내부는 가문의 상징인 짙은 녹색의 벽지, 호두나무 가구 등 전체적으로 진중한 색감을 띠고 있었다.

내 방과 이어지는 복도에 깔린 카펫도 분명 짙은 녹색인데…… 복도 한가운데에 저 하얗고 빨간 건 뭐지?

<테리, 저거…… 케이크 아닙니까?>

릭도 당황했는지 잔소리를 그치고 물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복도 한가운데에, 딱 한입 크기로 만들어진 앙증맞은 딸기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오잉……?’

뜬금없이 웬 케이크냐. 혹시 모형이나 장식이려나 싶어 가까이에 쪼그려 앉고 살펴보았다. 하지만 딸기향이 확 풍기는 걸 보면 가짜는 아닌 것 같고.

망설이다가 케이크를 집어 입에 쏙 넣어 보았다. 그러자 익숙한 단맛이 입안에 가득히 퍼졌다.

‘이 맛은 분명 우리 주방장 솜씨인데.’

주방장 케이크가 대체 왜 여기 있지? 헉, 설마 누가 먹으려고 가져가다가 잠깐 내려놓은 건데 내가 먹어 버렸나!?

퍼뜩 든 생각에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다시 뭔가를 발견했다. 보아하니 이번에는 마카롱이었다.

뭐지 싶어 다가갔더니 또다시 근처에서 에클레어 한 조각 발견. 그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더니 이번엔 가나슈 한 조각.

마카롱부터 시작해 복도를 따라 놓인 디저트 접시를 하나둘 주워 모으며 전진했다. 디저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점차 손이 부족해져서, 어쩔 수 없이 손에 든 디저트를 하나둘 먹기 시작했다.

<……테리, 볼 터질 것 같은데요.>

“나오 아아.”(나도 알아.)

그렇게 볼이 빵빵해질 무렵. 앞이 가로막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공작의 집무실 앞이었다. 집무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

머리 위로 물음표를 가득 단 채 집무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파라락-

머리 위로 색색의 종이 가루가 쏟아졌다. 놀라 고개를 드니 세바스찬과 미나가 환히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손에 종이를 현수막처럼 들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아가씨!」

「주방장의 신작 디저트 시식회에 잘 오셨습니다!」

무…… 뭐요? 신작 디저트 시식회?

어안이 벙벙해 입을 떡 벌리고 있자니, 세바스찬과 미나 사이에 서 있던 공작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 테리. 괜찮으면 주방장이 새로 만들었다는 케이크도 맛볼 겸 잠시 쉬었다 가겠니? 네가 좋아하는 꿀 우유도 준비했단다.」

공작의 한 손에는 먹음직스러운 케이크 조각이 담긴 접시가, 다른 한 손에는 꿀 우유가 담긴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반사적으로 미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재빨리 웃으며 글을 썼다.

「오늘은 저거 다 드셔도 괜찮습니다, 아가씨.」

언제나 내 건강을 엄격히 챙기던 미나답지 않은 말이었다. 고개가 절로 갸우뚱 기울었다.

이 사람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 * *

테레지아가 발레리안의 집무실에 발을 들이기 몇 시간 전.

“방금, 뭐라고……?”

우지끈.

멍하니 되묻던 발레리안의 손에서 만년필이 반죽처럼 으스러졌다. 세바스찬은 잉크투성이가 되어 버린 흰 장갑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하긴, 주인님께는 깃펜이나 만년필이나 다를 바 없는데…….’

세바스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레리안이 아이와 관련해 뭔가 일이 생길 때마다 필기구를 부수길래, 깃펜보다는 조금 더 단단한 만년필로 바꾸어 본 것인데. 발레리안의 괴력 앞에서는 깃펜이나 만년필이나 바위 앞의 계란이나 다름없는 듯했다.

“주인님, 장갑을 제게…….”

“지금 그게 중요해? 이메그 백작가의 다과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세바스찬은 충직한 집사답게 엉망이 된 주인의 장갑을 수거하려 했으나, 발레리안의 관심은 온통 그가 꺼낸 이야기에 쏠려 있었다. 금색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크게 부릅떠졌다.

세바스찬 역시 그것을 깨닫고는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가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며 마저 보고했다.

“데미안 카펜디어 백작 영식이 아가씨께 의미심장한 발언을 다수 건넸답니다. 본인은 아직 그날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다시 만난 것이 기쁘고 운명인 것 같다……. 손등에 입도 맞추었다는군요.”

“카펜디어, 카펜디어…….”

발레리안이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충격 반, 분노 반인 머릿속에서 카펜디어라는 이름을 찾아내려 애썼다.

동부의 귀족 명단을 훑어볼 때 몇 번 본 기억은 있었다. 하지만 영향력이 웬만한 남작가나 다름없는 가문인지라 크게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는데…….

‘……없앨까.’

철썩!

“주, 주인님!”

발레리안은 저도 모르게 살의를 품었다가 제 뺨을 스스로 내리쳤다. 세바스찬이 주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난 괜찮아.”

하지만 그런 것치고, 이어진 발레리안의 목소리는 굉장히 침착했다. 한쪽 뺨이 살짝 부어 있지 않았다면 조금 전 그가 제 뺨을 스스로 내리쳤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

‘아무리 거슬린다고 해도 죽이는 건 안 되지. 정신 차려라, 발레리안 에버딘.’

발레리안은 심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이성을 다잡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충동적이며 비이성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불쾌감이 가슴을 스멀스멀 뒤덮었다.

테레지아와 관련한 일에는 이상하리만치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아이가 위험을 자처할 때, 아이에게 불순한 마음을 가진 놈들이 수작을 부릴 때면 그런 경향이 더 커졌다.

없애는 건 안 된다, 안 된…….

‘……정말 안 되나?’

발레리안은 또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살의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잉크 범벅이 된 장갑을 벗고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이런 자신의 상태가 정상적인 게 맞는 건지, 조만간 아메트리스 후작에게 연락이라도 한번 넣어 봐야 할 듯싶었다.

생각을 정리한 발레리안이 책상 위로 팔꿈치를 대고 양손을 깍지 꼈다. 그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세바스찬.”

“예, 주인님.”

“일단 미나를 불러와. 그리고 주방장도.”

“예? 아가씨가 아니라요?”

“다짜고짜 불러들여서 다과회에서 누구와 무슨 대화를 했냐고 캐묻는 건 부담스러울 테니까. 아이가 자연스럽게 털어놓도록 하는 편이 좋겠지.”

사실 대놓고 묻는 것이나, 은근슬쩍 답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나. 어쨌거나 캐물어 보겠다는 본질은 같았다. 치사함 수치를 따지면 후자가 압도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바스찬 역시 발레리안에 버금가리만치 테레지아를 아끼는 이였다. 그가 눈을 빛내며 순순히 동조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미나는 아가씨께서 좋아하는 디저트들을 알 테니 그걸로…….”

이것이 작전명 ‘과자 집 마녀’의 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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