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91) (91/124)

<91화>

‘리벨이 보낸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공작이 내민 다과회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봉투 겉면에 적힌 이름이 달랐다.

「아네스 이메그.」

이메그, 이메그라.

어디서 들어 본 듯해 몇 번 되뇌다가 깨달았다. 전에 리벨의 다과회에서 봤던, 에버딘의 가신 가문 중 하나의 영애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귀족 가문일수록 아는 사람끼리 소개해 주는 식으로 인맥을 넓힌다고 했었지. 안면 없는 상대한테 먼저 초대장을 보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여겨진다고 했었나…….’

그래서 리벨도 처음에는 제르비스를 통해서 은근히 나와 안면을 트고 싶다는 의사를 비친 거였지.

물론 영향력이 굉장한 사람한테는 자존심이고 뭐고 참석해 달라 애걸하는 초대장이 산처럼 쌓인다지만.

당시에는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에버딘이 위세를 막 회복하기 시작했을 무렵이니까 사실 그런 반응이 당연했다. 지금은 든든한 친구 중 한 명이니까 됐지 뭐!

「안녕하세요, 공녀님. 아네스 이메그입니다.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디프린 자작가의 다과회에서 한번 뵌 적이 있답니다.」

아무튼, 정중한 인사로 시작한 이메그 백작 영애의 편지는 꽤 길게 이어졌다. 핵심만 짚자면 이거였다.

「이번에 동토에서 크게 활약하셨다고 들었어요. 혹 괜찮으시다면 다과회에 참석하시어 그날의 무용담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또래끼리 참석하는 자리라 크게 부담스러우시지는 않을 거예요.」

‘스읍.’

사실 나는 공작이 한 일에 스푼 하나 슬쩍 올려놓은 거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공작이 내게 대외적인 공을 다 떠넘기는 바람에 소문에서는 상당히 과장된 모양이었다. 거참 민망하구먼.

「참석할 거니?」

공작에게 편지를 넘기자 그가 빠르게 글씨를 훑어내리곤 물었다. 짧게 고민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용담이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이번에 베스랑 진행 중인 일을 슬쩍 흘려서 홍보를 시작하기엔 적당할 것 같아서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메그 백작가 역시 에버딘의 가신이니 굳이 초대를 거절할 이유도 없거니와. 마침 베스가 주고 간 흰가지나무 머리 장식을 은근슬쩍 선보이기 딱 좋은 자리 같다.

별말 덧붙이지 않았지만, 공작은 <투명신사 이야기>부터 나와 손발을 맞춰 와서인지 금세 이해하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미리 운을 떼 두면 화제성과 기대감도 커지겠지. 조심히 다녀오렴.」

“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별생각 없었다. 베스와 함께 흰가지나무 머리 장식을 가장 돋보이게 할 의상이나 논의해 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내 몫의 꿀 우유를 홀짝였을 뿐.

아직 ‘소년’에 관해서는 죄다 오리무중이었지만, 우선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치우고 다시 고민해 봐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 * *

“어서 오세요, 공녀님. 아, 이쪽은 카펜디어 백작 영식이랍니다. 공녀님보다 세 살이 더 많겠네요. 카펜디어 가문의 차남이신데, 그동안은 몸이 좋지 않아 내내 휴양지에 계셨다고 하네요. 동부로 돌아온 지는 반년이 좀 안 되셨대요.”

쟤가 왜 여기서 나와……?

다과회 당일, 약속 장소인 이메그 백작저의 정원.

나는 상기된 얼굴의 이메그 백작 영애를 한 번, 그녀의 어깨 너머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메그 백작 영애와 마찬가지로 잔뜩 들뜬 얼굴의 또래 영애들 사이, 아니, 한가운데 버젓이 앉은 미소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저 검은 머리 소년은 분명, 며칠 전에 소원나무 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그 아이였다.

‘카펜디어 백작 영식이라고……?’

건국제 때부터 내가 해 왔던 고민 –누구일까, 몇 살일까, 어디 살까 등등- 이렇게 한 방에 해결되다니……?

뭔가 대단히 허무한 느낌인 건 착각인가?

‘카펜디어 백작가가 어디더라?’

<저, 저 사람이 왜 여기…….>

황급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품에 안긴 릭 역시 적잖이 놀란 듯 더듬거렸다. 이메그 백작 영애가 은근히 소년에게 눈짓했다.

“카펜디어 백작 영식? 인사 나누셔야죠?”

“……아.”

소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묘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지난번과 달리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것이 놀랍도록 그에게 어울렸다. 마치 이제야 ‘진짜’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내 앞에 멈춰선 그가 우아한 동작으로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차분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문의 에버딘 공녀셨군요. 데미안 카펜디어입니다.”

데미안 카펜디어.

그 이름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뜻밖의 일로 저 이상한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해서 그런 걸까?

입안으로 어색하게 소년의 이름을 몇 번 굴려 보는데, 그가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 엄마야. 한발 늦게 놀라 파드득 어깨를 떨자 그가 손을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어, 네?”

“아……. 설마 그날의 일을 벌써 잊으신 건가요? 저는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굉장히 의미심장한 어조의 말이었다. 그 증거로 가까이 서 있던 이메그 백작 영애의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소년, 데미안이 퍽 가련한 얼굴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았다. 검고 긴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보자 당황이 찾아들었다.

‘그날?’

쟤가 말하는 그 날이 대체 언제지. 소원 나무 앞에서 만났던 날?

아니면 설마…….

‘……건국제 날?’

생각이 점차 후자로 기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얼굴이 너무 닮았고, 상냥한 미소와 목소리도 닮았다.

게다가 소원나무 앞에서 고작 한번, 스치듯 마주친 걸 가지고 저렇게까지 애틋한 태도를 보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이래저래 평범한 상황은 아니긴 하다만. 데미안이 건국제 때 만난 애가 맞는 것 같…….

<읍! 읍읍……! 읍? 읍!>

오메, 놀래라!

돌연 릭이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그는 굉장히 억울하게 무언가를 말하려 들었는데, 꼭 입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목소리를 먹기만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해 참았다. 대신 이를 악물고 릭을 안은 팔을 꾹 조였다.

‘대체 무슨 짓이야?’

하마터면 난데없이 비명을 지른 사람이 될 뻔했다. 그것도 데미안 앞에서.

다른 유령이 입을 막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거람?

하지만 릭은 여전히 답답하게 “으읍읍” 할 뿐이었다.

얘 진짜 뭐 하는 거지? 뭐 잘못 먹었…… 을 리도 없는데?

“공녀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하.”

갑작스레 조용해진 것이 의아했는지 이메그 백작 영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그녀에게 웃어 주고 다시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랏빛 눈은 여전히 묘한 호감을 담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진짜 헷갈리네. 결국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마음에 걸리는 것을 물었다.

“……정말 기억하고 있는 거면, 지난번에 소원나무 앞에서는 왜 그렇게 가 버렸어요?”

“아, 그때는 정말 더 지체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니 운명이라는 게 단지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닌 모양입니다.”

오우,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하네. 하긴 건국제 때도 아무렇지 않게 내 이마에 뽀뽀했었지…….

뽀뽀당한 상황을 생각하고,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신기하게 얼굴에 열이 오르지 않았다. 그동안은 문득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르륵 화르륵 잘도 불타는 탓에 난감했는데.

낯선 느낌에 괜히 손등으로 볼을 문지르다가, 데미안의 어깨 너머로 뚫어질 듯한 시선 한 무더기를 발견했다.

이런, 생각해 보니 아까부터 다들 데미안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지……. 역시 저 범상치 않은 외모 때문인 걸까.

‘신제품에 관한 소문은 환영이지만, 그 외에는 굳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은데.’

여기는 이메그 백작 영애를 비롯해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그것을 인지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데미안에게 속삭였다.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카펜디어 백작저로 초대해 주시겠어요?”

데미안은 내 말을 듣고 눈을 한번 깜박였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흰 얼굴에 이유 모를 만족감이 떠올랐다. 보랏빛 눈이 내 얼굴과 머리카락 부근을 배회했다.

“……기꺼이. 영광입니다, 에버딘 공녀님.”

* * *

이후 이어진 다과회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이메그 백작 영애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나와 데미안의 관계가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우리가 입을 다물자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데미안의 존재에 잠시 잊고 있던 신제품 홍보도, 한 영애가 머리 장식에 관심을 보여 준 덕에 성공적으로 마치고 왔다.

의도했던 바도 이뤘고. 거기에 뜻하지는 않았으나 그토록 찾던 애까지 찾은…… 것 같고.

그야말로 얻은 것밖에 없는 하루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석연찮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