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닮았나? 아닌가?’
물론 확신은 아니었다. 아무리 잊지 않으려 애써도 축제 때의 기억은 나날이 흐릿해졌고, 당시 ‘소년’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보는 순간 곧장 누군가를 연상하게 되는 일도 흔한 건 아닌 듯한데. 실루엣이라던가, 키라던가. 이런 게 전부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쯧.”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작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저…….”
잇새로 말이 되다 만,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막 몸을 돌리던 소년이 움찔하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 혹시 이 인형의 주인이신가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나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띠었다. 보랏빛 눈이 사르르 휘어지자 그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목소리까지…… 닮은 것 같은데?’
그럼 축제 때의 머리카락은 가발이었나? 은발 쪽이 가발이고, 지금이 진짜 머리카락?
그의 웃음에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생각이 복잡한 탓에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어, 네. 맞아요.”
“금방 찾아서 다행이네요. 이 인파 속에서 주인을 어떻게 찾나 조금 난감했는데. 여기 있습니다.”
소년이 상냥한 목소리를 내고는 릭을 내밀었다. 그에게서 릭을 받아 양팔로 껴안자 안정감이 찾아왔다.
본래대로였다면 릭은 내 품에 다시 안기는 순간 위험할 뻔했다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굉장한 충격에 빠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그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좋았을 것을. 애석하게도 나 또한 눈앞의 이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터라 릭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뭐지, 진짜?’
릭을 끌어안은 후에야 머리가 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눈앞의 소년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우선 키. 춤췄을 때처럼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조금 애매하지만, 비슷하고.
머리카락. 색만 다르다 뿐이지 결이 좋은 생머리라는 점도, 길이도 비슷하고.
눈. 무표정일 때는 좀 더 차가운 느낌인데, 웃을 때는 가면 너머로 슬쩍 보이던 그 눈 같고.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눈앞의 이가 그때의 ‘소년’을 닮았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힘들 듯했다.
하지만 그가 ‘소년’이라는 걸 확신하기 어려운 건 그의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때는 분명, 자기를 찾아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물론 이 상황은 사실상 우연에 가까워서 내가 그를 ‘찾은’ 게 아니긴 하다만…….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여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망설이는 사이, 어색하게 눈을 굴리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돌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는 곰 인형을 잘 보살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 행동에 생각이라는 걸 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을 뻗어 상대의 소맷자락을 덥석 움켜쥐었다.
“저기!”
“……예?”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낯이었지만, 다짜고짜 소맷자락을 붙잡힌 것이 기껍지는 않은지 눈썹을 살풋 찌푸리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급한 마음에…….”
뒤늦게 내 행동에 놀라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가볍게 소맷자락을 툭툭 턴 그가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 나를 응시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실까요.”
“그게…….”
정말 다른 사람인가? 그래도 다른 사람이라기엔 너무 닮지 않았나?
같은 사람이라면 왜 나를 모른 척하는 걸까? 혹시, 그때랑 마음이 달라져서?
속에서 치열한 물음이 오갔다. 주저하던 끝에 그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으아악, 저질렀다. 그렇지만 만약 같은 사람인데 그냥 보내 버리면 그걸 더 후회할 것 같단 말이야……!
이거 하나 묻는 게 뭐 별거라고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그리고 애초에 찾아 달라고 한 것도 저쪽인데, 내가 왜 이렇게 초조함을 느껴야 하는 거지?
<우, 우리 애가…… 저런 고전적인 멘트를…….>
오랜만의 마실이라며 날 따라왔던 셀레나가 옆에서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상대의 답을 기다렸다. 신경이 온통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됐다.
“…….”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보라색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시선을 비스듬히 허공에 둔 채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가 이내 난처한 웃음을 띠며 제 귀를 톡 두드렸다.
“저, 죄송한데 주변이 소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듣지 못했네요. 그보다 저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 사람이 어렵게 말을 꺼냈더니 그걸 하필 못 듣냐!
“저……!”
“인연이 닿는다면 또 뵙죠. 그럼.”
당황해 그를 붙잡으려 하는데 그는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붙잡을 틈조차 없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유령이 곡할 속도였다.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에 적응하느라 제자리에서 눈만 깜박였다. 멍한 와중에도 인파 사이로 사라지던 뒷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사라지는 것까지 똑같네.”
작게 중얼거리는 동시에 품 안의 릭이 크게 움찔했다. 무의식중에 시선을 내리자 그가 뭔가 말하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달려 나가셔서 놀랐잖습니까.」
“테리! 무슨 일이야!”
그때 소란을 수습한 기사들, 뒤늦게 소란의 중심에 내가 있음을 알아챈 친구들이 황급히 다가왔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기묘하던 공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나를 둘러싸고 무어라 질문을 던져 대는 기사들, 그리고 친구들 너머를 미련스레 힐긋거렸으나 보라색 눈을 지닌 소년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축제 때와는 또 다른, 기이한 낮이었다.
* * *
머리가 극도로 복잡하면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던데, 내가 딱 그런 상태였다.
「테리.」
“으앗. 네?”
멍하니 밥을 깨작이다가 시야에 아른거리는 현란한 무지갯빛을 보고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공작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걱정스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온 후로 내내 멍해 보여. 혹시 밖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아, 아니에요. 저 다친 곳도 없고, 도둑도 잘 처리했잖아요.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후추도 뿌리지 않고 먹고 있잖니.」
“헉.”
내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어쩐지 음식에서 아무 맛도 안 느껴진다 싶더니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였군…….
뒤늦게나마 후추 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공작이 내 접시를 가져가더니 손수 후추를 뿌려 주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고기를 직접 썰어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그러다가는 날이 다 밝을 즘에야 밥을 다 먹겠어. 기운이 없는 거라면 내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얼굴은 물에 잠긴 꽃 같던 평소와 달리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좀 민망한데.
“아니, 괜찮…….”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그 틈을 탄 공작이 솜씨 좋게 입안에 고기 조각을 넣어 주었다. 항의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입에 뭔가 들어오니 턱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음식을 씹었다. 와중에 맛있네.
얼떨결에 고기 한 조각을 씹어 삼키고 다시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저 정말…….”
쏙.
“아무렇지도…….”
쏙.
하지만 공작은 그때마다 재빠르게 음식으로 내 입을 막았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우물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공작이 포크를 내밀 때마다 자연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이거 좀…… 편하다?
‘나…… 생각보다 이런 게 체질이었나?’
다른 때였다면 좀 더 오래 민망해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굳이 생각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민망함을 집어던지고 공작이 먹여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혼란을 잠재웠다.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인지, 생각을 정리하기가 한결 편안했다.
‘지금으로서는 같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봐야겠지.’
낮에 보았던 검은 머리카락의 또래. 그는 내가 축제 때 만났던 ‘소년’과 지나치리만큼 많은 부분이 닮았다.
만약 둘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게 더 놀라울 것이다. 신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희박한 확률을 뚫고 일어난 우연일 테니까.
‘그렇다면 낮에는 역시 나를 못 알아본 척한 건가. 내가 자기를 찾아낸 게 아니어서……?’
……근데 그런 이유면 너무 쫌생이 아냐?
따져 볼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추측도 어려웠다. 정말이지 ‘소년’은 생각할 때마다 나한테 고뇌만 안겨 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난! 그 춤 한 곡 추고 홀랑 사라져 버린 놈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는 거냐고! 아오!
‘으으으. 그런데 축제 때는 좀 더 막…… 반짝반짝하게 보였던 것 같은데. 머리 색 때문인가? 아니면 축제라 기분이 들떠서 한 착각……?’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끙끙대는데 공작과 세바스찬의 대화가 들렸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잘 먹었어.”
“주방장이 기뻐하겠군요.”
띠용.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고 나서야 내가 어느새 후식까지 야무지게 해치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가 바람을 넣은 자루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무서운 사람……!’
도대체 못 하는 게 뭘까. 그런 생각으로 공작을 바라보는데, 그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세바스찬이 네게 편지가 왔다고 주고 가더구나. 다과회 초대장이라는데.」
다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