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여전히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으음.’
역시 아직 나를 지키겠다느니 하는 말을 듣기에는 너무 일렀나 보다. 걘 대체 언제쯤 완전히 건강해지는 걸까.
눈 한 번 내렸다고 심한 감기라니. 그 정도면 후작 부부가 기겁하며 외출을 막을 만도 하지.
아메트리스 후작저가 있을 듯한 방향의 하늘을 아련히 올려다보자니, 릭이 언뜻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나약하군요. 저는 아무리 춥다고 해도 감기에 안 걸리는데.>
‘그렇겠지, 곰 인형이니까…….’
쟨 그걸 뭐 저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까……. 제르비스나 릭이나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뒤로하고 친구들과 함께 소원 나무가 세워질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저거! 저거지?”
중앙 광장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멀린이 탄성을 지르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슴뿔 같은 가지를 지닌, 새하얀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나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알록달록한 열매들을 확인하고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저게 ‘소원 나무’야.”
에버딘 영지의 나무들은 특이하게도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겉껍질이 모두 벗겨져, 미끈하고 새하얀 모습으로 바뀐다.
기후 특성인지, 땅의 특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자라지 않는 나무이다 보니, 그것이 곧 에버딘의 상징이 되었다.
‘머리핀 같은 장신구로 써도 예쁘고, 이렇게 실물을 써도 예쁘고.’
그래서 흰가지나무, 그리고 이리트 염료를 이용해 ‘소원 열매’와 ‘소원 나무’를 만들어 냈다.
작은 쪽지에 소원을 적고, 그것을 동그란 나무 공 안에 넣어 이리트 염료로 물들인 포장지로 감싼다.
그렇게 탄생한 ‘소원 열매’를 나뭇가지에 매달면, 짠!
색색의 알사탕이 열매처럼 맺힌 듯 보이는 ‘소원 나무’가 완성되는 것이다.
‘아이고, 예뻐라.’
햇빛에 아름답게 빛나는 열매를 보고 사르르 녹았던 마음은, 소원 나무 근처의 바글바글한 인파를 보고는 완전히 흐물흐물해졌다.
소원 열매를 매달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을 내야 했다.
물론 그 수익의 반은 여러 자선 단체에 기부할 거라지만, 나머지 반만 해도 지금까지 모았던 돈과 합치면……! 자작령쯤이야 한입에 털어 넣을 수 있단 말씀!
“얼른 가자!”
“멀린, 혼자 가면 어떡해! 같이 가!”
“얘들아, 그러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흐뭇한 상상에 젖어 있는 사이. 들뜸을 이기지 못한 멀린이 총알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어서 리벨이 버럭 소리치며 그를 쫓아갔고, 하리엔은 차분히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테리, 너도 얼른 와. 소원 적으러 가야지.”
“아, 나는 일이 잘 진행되고 있나 한 바퀴만 둘러보고 갈게. 먼저 적고 있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구상해서 그런가.
되도록 눈축제가 끝날 때까지 소원 나무 사업을 무사히, 잘 진행하고픈 마음이 컸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고 이렇게 직접 보러 나온 거 아니겠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들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리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 다른 아이들을 따라 소원 나무 근처에 놓인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친구들을 먼저 보내 놓고, 나는 소원나무 근처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을 걸 고려해서, 친구들과 일부러 장식이 없고 편한 옷으로 골라 입고 왔다. 덕분에 시선을 끌지 않고 편하게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흐음. 아직까진 그럭저럭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네.’
첫날부터 인파가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에버딘에서 고용한 이들이 인파를 잘 통솔하고 있었다.
일부는 테이블 뒤에 앉아 사람들이 쪽지를 작성하는 걸 도왔고, 한쪽에서는 그렇게 적힌 쪽지를 열매로 만들어 나뭇가지가 상하지 않도록 매달았다.
거기에 혹시라도 사람들이 나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소원 나무 근처에는 경비병들까지 세워 놓았으니, 이만하면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
준비했던 것들이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감이 찾아왔다.
필요한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제대로 놀아 볼까! 고개를 푸르르 털고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어라?’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던 중.
어떤 남자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도우미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이리트 염료로 물들인 포장지 일부를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일이기도 했고, 주변이 워낙 소란스러워서 처음엔 잘못 본 것인 줄로만 알았다. 혼란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방금…….”
<……저 남자. 포장지를 훔친 것 같은데요.>
하지만 릭도 나와 같은 광경을 봤다면 말이 달라지지.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저 오블렌 자작 같은 도둑놈이 소원 나무 첫날부터 재수 없게 말이야, 앙?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었다. 내가 머리를 올려 묶는 건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였기에 곧 모습을 감추고 있던 호위들이 접근해 올 것이다.
그사이 남자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릭을 안은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순진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주머니가 반짝거리는데, 그거 사탕이에요?”
“……무, 뭐?”
예상했던 대로 남자는 별안간 누군가 제게 말을 걸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호라, 이렇게 보니 네놈. 눈이 음습한 게 오블렌 자작을 똑 닮았구나.
기분이 두 배로 나빠졌다. 그만큼 한껏 입꼬리를 치켜올려 해사한 미소를 자아낸 채 그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사탕은 혼자 먹으면 이 썩는댔는데. 나눠 먹어요, 아저씨!”
일부러 ‘반짝’, ‘사탕’ 등의 단어를 골라 쓴 탓인지 인파에 치여 정신없던 도우미들도 심상찮음을 감지했는지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다들 어디 있는…… 어라라.’
자, 앞은 막았고. 호위들은 어디까지 왔나 싶어 뒤를 힐끔 일별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호위들은 아직도 인파 너머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떠올라 자그맣게 탄식을 흘렸다.
나야 아직 몸집이 작으니, 사람들 다리 사이를 쇽쇽 빠져나올 수 있었다지만. 유달리 건장한 기사들은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한데.
소원 나무를 살펴보는 데 신경을 기울이느라 너무 당연하게 내 기준으로 생각해 버렸네.
‘스읍. 근데 이러면 좀 곤란한데?’
호위들이 금방 도와줄 수 있으리라 여겨서 일단 도망 못 가게 붙잡고 본 거였는데……. 이, 일단 물러나야 하나?
당황해 소매를 놓지도, 당기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하던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도둑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팔을 휘둘렀다.
“뭐야, 이 애새끼는……! 놔!”
<테리!>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주먹 쥔 손이 순식간에 얼굴 앞까지 다가왔다.
그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릭이 다급히 몸을 기울여 남자의 주먹을 막아 냈다.
퍽-!
나를 대신해 남자의 주먹을 맞은 릭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갔다. 동시에 어떻게든 이쪽으로 다가오려 애쓰던 호위들에게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거기, 꼼짝 마라!”
“으아악! 지나가요! 부딪혀도 모릅니다, 지나간다고요!”
지금까지는 일반인들이 다칠까 몸을 사리던 호위들이 일제히 콧김을 내뿜으며 들썩였다. 그 기세에 눌린 사람들이 길을 터 주자 그들은 순식간에 먹잇감을 덮치는 맹수처럼 도둑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몇몇은 내게 그렇게 묻는 것도 같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릭에게 쏠려 있었다.
“릭!”
나도 모르게 릭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히 팔을 뻗어 보았지만 내 팔 길이로는 턱도 없었다.
아무리 곰 인형이라 아픔을 느끼지는 못한다지만, 저렇게 떨어지면 바로 사람들에게 짓밟힐 텐데!
릭은 가뜩이나 더러운 걸 싫어하는데. 흙바닥을 구르는 걸로도 모자라서 사람들 발에 잘근잘근 밟히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릭 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미친 듯이 사람들의 다리 사이를 헤치고 달려갔다.
그러나 릭이 떨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의 몸체가 인파 사이로 낙하하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곰 인형?”
툭-
하지만 직후. 솜 뭉치를 붙잡아 쥐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음성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딘지 익숙한 음성이었다. 놀라서 눈을 반짝 뜨자 인파 사이로, 릭을 손에 들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멍하니 눈을 몇 번 끔벅여 보아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묘하게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무, 무슨.>
릭이 묘하게 충격받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게 언뜻 들렸다. 다른 때였다면 그가 왜 저러는지를 궁금해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흰 피부. 보랏빛 눈.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어쩐지 축제 때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소년’을 연상케 하는 아이가, 손에 든 릭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