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 *
「아가씨, 편지예요.」
하리엔의 연락 이후로도, 나에겐 두 통의 편지가 더 도착했다.
하나는 칼리오스, 하나는 제르비스에게서 온 것이었다. 고민하다가 제르비스에게서 온 편지부터 뜯어 보았다.
편지지를 펼치자 제르비스 특유의, 끝이 조금씩 늘어지는 필체가 나를 반겼다.
「그리운 테리.
그동안 잘 지냈어?
꽤 오랜 시간을 에버딘 저택에서 너와 함께 머물러서 그런가. 후작저에 돌아온 직후엔 낯설더라.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어머니께서 남부에서 가져오셨다는 신기한 책들을 네게도 보여 주고 싶다. 새삼 너와 한 저택에서 지냈던 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실감하게 되네.」
‘그러고 보니 제르비스랑 칼리오스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되게 오래된 것 같네.’
확실히, 한 식구처럼 지냈으니 그만큼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가 말하는 ‘남부의 신기한 책들’이 뭔지 당장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네가 공작님과 함께 동토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어. 아버지께서도 최근 그 일로 부쩍 바쁘셨거든.
사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를 따라가고 싶었어. 그도 그럴 게 동토는 미지의 땅이고, 얼음고래족은 제국인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혹시 모를 위협으로부터 너를 지켜 주고 싶었는데…….」
아이구,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지켜 주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보자마자 아쉬움은 씻은 듯 사라지고 뿌듯함이 그 자리를 메웠다.
지금의 제리는 무언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내 친구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미래의 아메트리스 후작과 에버딘 공작이 친하면 좋은 거지, 아암.’
「하지만 어머니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딜 가냐며 붙잡으시기도 했고, 나도 불쑥 따라가는 건 민폐일까 봐 참았어.
그래도 다음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꼭 옆에서 지켜 줄게.
아, 그리고 정말이지 아쉽지만, 당분간은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나도 네가 만들었다는 소원 열매를 꼭 보고 싶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동안은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자고 하셔서…….
아무래도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고 인내하는 중이야.
그래도 최대한 빨리, 너를 만나러 갈게.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많이 보고 싶다.
추신. 검댕이도 잘 있지?
-제르비스로부터」
확실히, 제르비스가 아프기 시작한 후로부터 후작 부인은 약을 구하기 위해 저택을 떠나 있었고.
제르비스가 다 나은 후로는 후작까지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수도에 있었으니까.
아메트리스 후작 일가는 새삼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한자리에 모이게 된 거구나. 그러면 오랜만에 보는 가족을 보내고 싶지 않기도 하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깨끗한 종이를 펼쳤다. 대충 ‘지켜 주겠다는 마음은 정말 고맙다, 하지만 무리하지 말고 일단은 고기 더 먹고 크렴’을 풀어 쓰고 편지를 마무리했다.
제리한테 답장 썼고……. 다음은 칼리오스의 편지인가.
‘봉투에 금박…….’
아주 편지 봉투부터 ‘나 황족이오’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휘황찬란하구먼.
질 수 없다. 나도 이리트 염료를 이용한 편지 봉투를 만들어 봐야지. 다짐하며 금색으로 번쩍이는 편지 봉투를 뜯었다.
「나의 친구 테리에게.」
첫 문장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엔 그렇게 경계하고 의심하고 신경질 내더니. 이젠 내가 아주 편해졌나 보지?
‘하긴. 나도 황태자인 카오랑 이렇게까지 허물없이 친해질 줄은 상상 못 했으니까.’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카오 역시 내가 동토에 다녀오고, 얼음고래를 밀렵하던 이들을 잡아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염려를 표했다.
「으음. 네가 정말 괜찮은지,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러 가고 싶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배움이 무척 더뎌졌다며, 스승들이 이를 갈고 가르칠 것들을 준비해 놨더라고. 사실 이 편지를 쓸 시간도 겨우 냈어…….」
……역시 황태자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구나.
나 역시 에버딘의 후계자로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있긴 하지만 칼리오스만큼은 아니었다.
아마 그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데다가, 한 가문이 아닌 한 나라의 후계자이기 때문이겠지.
어쩐지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착각인가. 어깨를 부르르 떨고 편지를 마저 읽었다.
「에버딘에서는 특별히 겨울에 ‘눈 축제’가 열린다고 했지.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이면 축제가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네.
‘소원 열매’를 열심히 광고하던데. 내가 직접 갈 수는 없으니 쪽지로 소원을 써 보내면 네가 대신 달아 줄 수 있을까? ……대신 쪽지는 절대 읽으면 안 돼, 알았지?
그럼 답장 기다릴게. 오델리아의 한숨이 네게 너무 차갑지 않길 바라며.
추신. ……혹시 <투명 신사 이야기> 관련 신상 소식은 없는 거야?
-칼리오스 드 램바드 마인하르트」
스읍, 열어 보지 말라고 하면 더 열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나는 훌륭한 후계자니까 훔쳐보지 않겠어.
‘물론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트려서 펼쳐지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런 생각을 하며 답장을 적었다.
쪽지를 보내 주면 대신 소원 나무에 걸어 주겠다는 말과 함께, 눈 축제가 끝나면 <투명 신사 이야기> 애장판이 나올 것이란 이야기도 슬쩍 흘렸다.
생각해 보니 이리트 염료가 투명 신사 그림을 그리기에 딱이더라고. 투명한 데다가, 여러 색으로 반짝거리니까.
‘한 권 보내 줄 테니까 수도에도 열심히 홍보해 주렴.’
물론 황제의 눈치가 보이니 대놓고 홍보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는 <투명 신사 이야기>의 열혈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
마침내, 눈 축제 시작 일주일 전. ‘소원 나무’와 ‘소원 열매’ 개시일이었다.
“역시 몸에 맞춘 옷이 편하다니까.”
베스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동토에 갈 때는 급하게 옷을 더 사서 껴입느라 옷이라기보다는 포대 자루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치수에 맞는 겨울옷을 입으니 훨씬 낫군.
옷이 따듯한데도 발이 보인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릭을 들고 정문에서 기다리는 친구들에게로 향했다. 공작이 정문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에이, 괜찮아요. 저 때문에 바쁘신 거잖아요. 그리고 눈 축제 마지막 날에 같이 놀러 가기로 했으니까!”
공작이 미안한 듯 나를 돌아보며 한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공작은 다소 어설픈 구석도 많던 내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가장 분주히 노력해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아직 얼음고래 밀렵 건과 관련한 논의도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사실 이렇게 내 외출 하나하나에 신경 써 주고, 배웅해 주는 것 자체가 굉장한 배려였다.
“제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후계자는 아니라고요, 엣헴.”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가슴을 통 두드리자 공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건국제 때처럼 호위들이 따라갈 거야. 저번처럼 길 잃지 말고,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일이 벌어지겠다 싶으면 바로 소리를 지르렴. 알겠지?」
“네!”
「늦지 않게 돌아오고. 재밌게 놀다가 오렴.」
공작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친구들에게 보내 주었다. 양팔로 릭을 껴안은 채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안녕!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야, 테리. 볼이 좀 야윈 것 같은데…….”
“오오. 그 유명한 ‘얼음고래족이 유일하게 인정한 제국인’의 등장이신가?”
“테리, 오랜만! 너 요즘 완전 유명인이더라?”
하리엔이 반가운 미소를 띠고 내 인사에 화답해 주었다. 리벨과 멀린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과 들떠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제르비스와 칼리오스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칼리오스야 수도에 있으니 거리상의 문제도 있다지만, 제르비스는 꽤 가까이 사는데 못 오다니. 이렇게 서글플 데가.
아쉬움에 한숨을 푹 내쉬고 중얼거렸다.
“역시 제리도 부를 걸 그랬나 봐. 부모님이 붙잡아서 외출하기 어렵다고 하긴 했지만, 가족이 다 함께 오면 괜찮지 않나……?”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엉?”
“응?”
가만히 듣고 있던 멀린이 불쑥 끼어든 건 그때였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는 외려 그런 멀린의 태도가 더 의아했다.
뭐, 뭐가?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당황해서 내 말을 되짚어 보는데, 양팔을 들어 고개를 받친 멀린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제리 걔, 부모님이 붙잡아서가 아니라 감기 걸려서 외출 금지당한 거잖아? 첫눈이 오자마자 감기에 걸려서 후작가가 뒤집어졌다던데.”
……으이잉? 나한테는 그렇게 말 안 했는데?
‘그럼 제르비스가 나한테 거짓말한 건가? 왜……?’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댕그랗게 뜨고 끔벅였다. 그때 리벨이 웃는 얼굴로 이를 악물고 팔꿈치로 멀린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악! 아파!”
“너 나중에 제리한테 한 대 맞아도 난 모른드…….”
“뭐, 뭐? 걔가 왜 날 때리는데?”
“……이 바보를 어쩜 좋아.”
리벨이 세상천지 가장 한심한 것을 보듯 멀린을 바라보는 바람에, 덩달아 움찔하고 눈을 도르륵 굴렸다.
‘……나, 나도 이해 못 했는데.’
도대체 제리가 왜 나한테만 아프다는 말을 안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