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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87) (87/124)

<87화>

고작 그 짧은 부름뿐이었는데도 울컥 목이 메었다.

소년은 입술을 당겨 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행여 이불에 눈물 자국이라도 남는다면, 거기 들를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자 더 읽으라는 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질 테니까.

그것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몸 안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잠든 채 깨어나지 않는 형을 대신해 후계자 교육을 받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이반. 또 땡땡이야? 그러면 안 된다니까.’

오히려 언제나 다정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형, 아이릭이 얼마나 혹독한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 뒤늦게나마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 와…….”

이 저택은 어리디어린 아이반이 감당하기에는 지독히도 외로운 곳이었다.

“힘든 건 내가 다 할게. 응? 그러니까…….”

두서없이 말하던 아이반은 뒤늦게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가를 붉힌 채 미동도 없는 아이릭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별들의 나라는 하늘 너머에 있어서, 잠들지 않으면 갈 수 없죠.”

아이반은 얼른 깨어나라는 말을 애써 삼키고, 대신 아이릭이 가르쳐 줬던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행여 깨어나라는 말조차 형에게 부담이 될까 봐. 그래서 그가 정말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되어서.

아이반은 제 형이 부디 조금 긴 꿈을 꾸는 것뿐이길. 그리고 그 꿈속에서나마 평안하길 바라며 새벽이 깊도록 조용조용 자장가를 불렀다.

* * *

릭이 유령들과 함께 합창하는 요상한 꿈을 꾸다가, 미나가 들뜬 얼굴로 날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빠져나왔다.

「아가씨, 일어나 보세요! 눈이 왔어요!」

뭣!

팔락팔락 흔들리는 종이를 보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창가로 다가가니 창 바깥쪽에도 새하얗게 눈이 쌓인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가려다가 미나에게 붙들려 외투를 세 겹 입었다.

릭을 집어 들고 계단을 구르듯 내려가 정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흰빛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쏟아졌다.

“꺄으앙.”

<……그 강아지 같은 소리는 대체 뭡니까?>

입에서 괴상한 감탄사가 새어 나오고, 릭이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에버딘 저택은 온통 새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정원의 분수대는 3단 케이크처럼 보였고, 눈밭은 마치 설탕 가루를 듬뿍 뿌린 브라우니…….

<테리, 무슨 생각을 하길래 입에서 침이…….>

“핫.”

그제야 릭의 말이 들려왔다. 황급히 소매로 입가를 닦자 저 멀리서 검댕이가 겅중겅중 신나게 뛰어왔다. 나도 질세라 후다닥 눈을 밟았다.

물론 눈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에 동토에도 다녀왔고.

하지만 자작저에서는 항상 자작 일가가 눈밭을 독차지했기에 밖에서 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동토는 눈을 즐길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춥고 정신없었다.

에버딘이 제국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동토에 한번 다녀왔더니 이 정도는 포근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눈 내린 정원을 실컷, 마음 편히 굴러다닐 수 있었다.

“컹!”

<……얜 어떻게 볼 때마다 커지는 것 같지.>

릭은 온몸에 눈 뭉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검댕이를 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제는 나름 익숙해졌는지 전처럼 질색하지는 않았다.

검댕이와 릭에게 해후의 시간을 제공하고, 나는 옆에서 눈을 모아 눈으로 된 성을 지었다.

“완성!”

엉성하게나마 성을 완공하고 사용인들과 공작을 데리고 나와 그것을 자랑했다.

미나가 이걸 그대로 퍼서 보관하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걸 듣고는 황급히 몸을 던져 무너트려야 하긴 했지만, 아무튼 정말이지 오랜만에 기분 좋은 첫눈이었다.

* * *

“헷츄.”

스읍. 아무리 동토에 비해 포근하다고 해도 내 몸은 여전히 허약하기 짝이 없군……. 그거 잠깐 굴러다녔다고 바로 재채기가 나올 일인가.

‘운동하지 않고 강한 몸을 가지고 싶다.’

뚜하게 입술을 내민 채 미나가 준 생강차를 들이켰다. 어쨌든 아프긴 싫으니까.

“으, 코 찡해.”

코가 조금 고통스럽긴 했지만, 아무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동토에서의 일도 얼추 마무리되었고, 머리를 싸맨 끝에 이리트 염료를 어떻게 쓸지도 대강 정했고, 아가 고래도 성불시켜 줬고.

앞에서는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오르고, 검댕이가 발치에 몸을 말고 있고, 폭신한 안락의자에서 두꺼운 담요에 돌돌 싸여 있자니…….

‘나른하구먼.’

<테리, 잘 거면 침대에 가서 자요. 그러다가 허리 다칩니다.>

온몸이 녹진녹진해져 졸고 있자니 릭이 익숙하게 잔소리를 했다. 하여간 저놈의 잔소리는 쉬는 날이 없네.

쫑알거리는 그를 무시하고 잠에 빠지려던 차, 하리엔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미나의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편지 봉투는 하리엔을 닮아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 강했다. 조심조심 봉투를 뜯고 편지를 펼쳤다.

「안녕, 테리!

그동안 잘 지냈어? 나는 드디어 부모님을 도와 새 사용인을 뽑는 일을 끝마치고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어.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

듣자 하니 너도 이번에 동토에 다녀왔다며? 혹시 감기에 걸리진 않았니? 동토는 어땠어? 이외에도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여기에 다 적으려니 자리가 부족할 것 같으니 참을게.

대신 이번에 네가 만들었다는 ‘소원 열매’를 같이 보러 갈 겸, 한번 만나지 않을래? 다른 친구들도 같이 말이야.

그럼 답장을 기다릴게.

-하리엔으로부터 」

“흐음.”

다 읽은 하리엔의 편지를 무릎에 내려 두자 릭이 그것을 훑어보고 물었다.

<갈 거죠?>

“응. 어차피 ‘소원 열매’ 개시 첫날에 한번 들러서 살펴 보려 했으니까.”

‘소원 열매’는 내가 이리트 염료를 가지고 구상한 사업 중 하나였다. 담요를 풀고 안락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미나를 불렀다.

“며칠 후에 친구들이랑 놀러 가기로 했는데, 겨울옷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베스를 불러 줄래요, 미나?”

「네, 아가씨.」

베스와도 사업 하나를 하기로 했으니까. 겸사겸사 그것도 물어봐야지.

미나를 보내고 몸을 쭉쭉 늘리며 남은 잠기운을 마저 쫓았다. 릭이 등 뒤에서 픽 웃었다.

<아이디어가 없다고 머리 싸매고 울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누가? 내가? 나처럼 훌륭하고 똑똑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후계자 봤어?”

<역시 당신은 뻔뻔한 모습이 더 잘 어울려요. 누구한테 맞고 울 바에는 차라리 때리고 다니십시오.>

……봐 봐. 하여간 쟤가 은근히 나보다 성격 나쁘다니까?

* * *

베스는 바로 다음 날 방문했다. 간단히 안부 인사를 나눈 뒤 곧장 부탁했던 것에 관해 물었다.

“옷도 옷이지만, 그건 완성됐나요?”

“마침 어제 완성되었는데 불러 주시기에 챙겨 왔지요.”

베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품에서 둘둘 말린 천 뭉치를 꺼냈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펼치자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자그마한 사슴뿔 모양의 핀과 몇 개의 수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편하게 들고 살펴보셔도 됩니다. 공정이 끝나서 만져도 염료가 손에 묻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 말에 사슴뿔 모양의 핀을 집어 들어 살폈다. 흰 가지들이 섬세히 퍼져 있는 데다가, 움직일 때마다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굉장히 예뻤다.

“엄청 잘 만들었네.”

“에버딘의 상징을 대충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공녀님의 부탁이기도 했고요.”

베스의 말대로, 이것은 에버딘의 상징인 ‘흰 가지 나무’를 본떠 만든 장신구에 이리트 염료를 입힌 것이었다.

‘이리트 염료는 바르면 반짝반짝 빛이 나게 만드니까, 수정이나 장신구, 의류에 쓰면 반응이 좋을 것 같았지.’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제품을 보니 그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거 분명히 먹힌다.

‘첫 출시하는 장신구의 모양이 흰 가지 나무라, 따로 홍보를 안 해도 자연스럽게 이 예쁜 게 에버딘에서 나온다는 걸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을 테고.’

좋아, 좋아. 이 방면으로 이리트 염료가 굉장히 효과적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다음은 어디에 써 볼까? 역시 옷이려나?

전에 건국제에서 얻었던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가 아이디어를 줄 줄이야. 역시 엄마 말대로 급할수록 주위부터 차근히 다시 살펴봐야 한다니까.

이후 베스와 겨울옷을 맞추며 이리트 염료를 또 어디에 쓸 것인지 논의했다. 심장이 기대감으로 동당동당 뛰었다.

‘이번에 아이디어 낸 사업들만 잘되면……!’

정말로 오블렌 영지를 살 수 있다!

크윽, 엄마! 우리를 속여 먹은 망할 자작을 엿 먹일 수 있는 날이 정말 머지않았어요……!

이제 정말, 정말 조금이면 된다. 특별한 일만 없다면 정말로 오블렌 영지를, 엄마와 토미를 그 작자들에게서 되찾아올 수 있어.

‘제발 변수만 없어라!’

물론 지금까지의 상황만으로 따지면 문제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양손을 모으고 열심히 기도했다.

자작이 허튼짓을 하지 않길. 쓸데없는 맘을 먹어서 영지를 팔아먹거나 날리지 않길.

……물론, 돌이켜 보면 과한 기대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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