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 작자는 회유도 통하지 않는데. 귀찮게 되었군.’
만약 이번 일의 당사자가 아메트리스 후작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클라센 후작은 그자가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쥐여 주고 이번 일을 묻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제론 아메트리스.
그는 완전히 ‘황제’의 편이라고 할 수 없는, 엄밀히 따지자면 ‘제국’에 충성하는 귀족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황제의 마음에 들었다.
딱히 권력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귀족들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잡아내니 곁에 두면 민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메트리스 후작은 본인이 딱히 원하진 않았지만 나름 황제의 비호를 받는 이였다.
다른 이였다면 회유 대신 협박이라도 써 볼 텐데, 황제의 눈치도 보이거니와 제론 아메트리스 자체가 협박이 먹힐 인간이 아니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생각을 이어 갈수록 짜증스러움만 늘었다. 클라센 후작은 제 앞에서 덜덜 떠는 이를 향해 까딱 턱짓했다.
“나가 봐라.”
“네, 네……!”
그의 사용인은 살았다는 듯 화색을 띠고는 빠르게 물러났다. 후작은 그에게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러자 창이 소리 없이 열리며 검은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이가 나타났다. 그가 후작의 앞에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후작은 나직이 물었다.
“머저리처럼 붙잡혀 있는 것들이 몇이라 했지?”
“……셋입니다.”
“팔론 남작을 죽이며 그것들도 처리해라. 어차피 조사도 대부분 끝났을 테고, 아는 게 많은 놈들은 아니나 일을 그르쳤는데 굳이 살려 둘 이유도 없지. 타살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존명.”
머리 숙인 사내는 별다른 대꾸 없이 주인의 명을 행하기 위해 사라졌다. 후작은 창문을 닫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당분간 바쁘겠군.”
이럴 때를 위해서 후계자를 키우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말썽이었다. 그러니 홀로 감당하는 수밖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작은 집사를 불러들였다. 그가 정중히 허리를 굽히는 집사를 향해 물었다.
“부인은 지금 어디 있지?”
“랑바드 공작 부인께서 주최하는 파티에 가셨습니다만…….”
“데려와라. 그리고 당분간 바깥출입을 삼가라 해.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숙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후작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가려는 집사를 붙잡았다. 그가 짧게 머리를 굴렸다.
운 나쁘게 일이 꼬인 탓이라지만, 후작은 결과적으로 팔론 남작이 벌인 촌극을 자신이 일부 책임지게 된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을 꼬이게 만든 것이 에버딘이라는 것 또한.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클라센 후작의 신조였다. 그것이 원한이라면 더더욱.
‘지금은 공녀라 불리는 그 애……. 원래는 오블렌 자작가의 아이라고 했던가.’
물론 호적에서 정리되어 더는 자작가 소속이라 할 순 없다지만. 어쨌거나 생물학적 친부라는 인간이 살아 있다고 들었는데.
‘카드는 많을수록 좋겠지.’
설령 그것이 실제로는 하잘것없는 카드이더라도. 카드를 뒤집어 보이기 전까지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상대방에게 충분한 압박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생각을 정리한 클라센 후작이 덧붙였다.
“랑바드 공작께도 연통을 넣도록.”
“뭐라고…….”
“가신 하나를 거두실 생각이 없으시냐 물어보아야겠다. 마침 최근에 눈여겨보고 있던 자가 사라졌다고 하셨으니 딱 좋군.”
* * *
<테리,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요. 이만 잠드는 게 어떻습니까?>
“끄으응.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릭이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 부름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옆으로 내던지고 데굴 굴러 누웠다. 침대에 엎드린 채 중얼거림을 흘렸다.
“분명 몸은 피곤한 것 같은데,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그런가. 잠이 잘 안 오네…….”
동토에서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에버딘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며칠.
「이것들은 내가 맡으마.」
머리 아픈 계약 조율 같은 건 공작이 전부 맡았지만, 그는 그 외에 얼음고래족으로부터 사들인 이리트 염료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는 전부 내게 맡기겠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며칠째 밤잠까지 줄여 가며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이리트 염료를 잘 쓰기만 하면 에버딘의 위상도 한층 높이고, 오블렌 영지도 금방 사들일 수 있을 텐데……!
행복한 상상을 하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자 침대 옆 바닥에 무수히 굴러다니는 종이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희망이 또다시 저만치 멀어지는 듯해 급격히 우울해졌다.
벌써 종이를 저만큼이나 썼는데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할 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니……!
“흐으윽, 난 돌머리야…….”
<자학은 그만하고 일단 잠부터 자요. 뭐든 몸과 정신이 멀쩡해야 해낼 수 있으니까.>
“히잉, 엄마…….”
<엄마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얼른 똑바로 누워요.>
베개에 엎어져 훌쩍이는데 릭이 내 볼을 꾸욱 눌렀다.
나를 똑바로 눕히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좀 처량해서 미적거리며 바로 누웠다. 그랬더니 릭이 이불을 끌어당겨 제대로 덮어 주었다.
<얼른 자요. 내일은 셀레나와 함께 저택의 유령들 의견이라도 모아 볼 테니까.>
“그렇지만…… 정말 잠이 안 오는걸.”
아까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그런가.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생각이 끊이질 않는 탓에 결국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면 피로로 인해 머리가 더욱 둔해지고, 나는 둔한 머리 때문에 다시 괴로워하고. 악순환이었다.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깔자, 릭이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곤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이불 위를 통통 두드리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놀리면 안 됩니다.>
“뭐가?”
<일단 눈 감고,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뭐가 끝날 때까지라는 거지? 의아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길 얼마. 불현듯 나지막한 흥얼거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놀라서 대번에 눈을 번쩍 뜨고 릭을 돌아보았다.
“뭐야, 자장가야?”
<뭐, 뭡니까. 눈 뜨거나 말 걸지 말라니까요!>
“놀리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그래. 누가 가르쳐 준 노래야? 엄청 좋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짧은 흥얼거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가 부른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릭 역시 내가 자신을 놀리려 드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가 제 목에 묶인 리본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머릿속에 있던 거라서.>
“흠.”
그럼 혹시, 릭이 인간이었을 때 자장가로 듣던 노래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릭의 마음을 생각해서 굳이 ‘인간’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크흠 헛기침을 한 릭이 조용히 베개를 두드렸다.
<질문 끝났으면 다시 누워요. 잠들 때까지 불러 줄게요.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응!”
자장가는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엄마가 불러 주던 게 전부였는데. 왠지 기분이 좋아져 헤헤 웃으며 다시 누웠다.
눈을 감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끊어졌던 흥얼거림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별들의 나라는 하늘 너머에 있어서, 잠들지 않으면 갈 수 없죠…….>
아주 낮지도, 높지도 않은.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릭의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가만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지기 전, 잠자코 곁을 지켜 주는 곰 인형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네가 인간이 아니면 어때.’
이렇게나 따듯한 마음을 지녔는데.
릭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그런 건 이제 상관없었다.
그가 무엇이든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직후 의식이 스르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이었다.
* * *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바쁘시대?”
“예.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최근 팔론 남작이 벌인 일 때문에…….”
“그렇구나…….”
흰빛이 도는 은색 곱슬머리를 지닌 자그마한 소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 앞에서 클라센 후작가의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신음을 삼켰다.
소년은 곧 자신이 집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따스한 분홍색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볼게. 집사도 쉬어.”
“……작은 도련님께서도 평안한 밤 되십시오.”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소년은 그와 헤어져 제 방으로 향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슬그머니 발길을 틀었다.
끼익-
소년은 복도를 지키고 있던 사용인이 꾸벅꾸벅 조는 틈을 타, 저택의 외진 곳에 있는 방으로 숨어들었다.
방은 어둡고 조용했다. 소년은 커튼 틈으로 비치는 달빛에 의존해 방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옆에 서서 까치발을 들자 죽은 듯 잠들어 있는 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에 은색 머리카락이 희게 빛났다. 그 아래 자리한 얼굴은 꼭 그만큼 창백하고, 달빛을 그러모은 듯 고왔다.
분홍 눈의 소년은 저와 다른 듯 닮은 이를 가만히 눈에 담다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