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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85) (85/124)

<85화>

“…….”

“…….”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괜스레 민망한 마음에 눈을 도르륵 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거기에 뒷걸음질까지 치며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웠는데, 족장은 반대로 내게 다가와 머리 위에 턱 손을 올렸다.

뭐, 뭐지? 당황스럽긴 했지만 일단 때리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아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동안 머리 위에 손을 얹어둔 채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대뜸 머리카락을 휘적휘적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구나. 네 아비와는 다르게 말이다.”

오잉.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곧장 대꾸했다.

“지금 공작님 욕하시는 거예요? 공작님 욕하면서 하는 칭찬은 듣기 싫은데.”

“……제국의 아이들은 원래 다 이렇게 당돌한가?”

“엣헴. 제가 좀 뛰어난 후계자인 것 같긴 해요.”

“…….”

한 손은 허리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팍을 가볍게 통 치자 족장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왜, 뭐요. 이런 후계자 처음 보시나? 흥.

얼음고래족이 제멋대로 에버딘을 밀렵꾼이라고 오해했음에도 직접 나서서 진범을 잡아 줬는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비이이?

못마땅함에 입술을 삐죽이며 족장을 흘겨보았다. 그가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조금 전의 말은 사과하마.”

“맨입으로요?”

“뭐?”

“아이, 농담이에요. 저 막 보답이랍시고 이것저것 뜯어내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먼저 선물이라고 주시면 모를까.”

“…….”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이번에야말로 말을 잃은 듯 한참을 침묵하던 족장이 이윽고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고마움의 뜻으로 선물……을 주려 하니, 공작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겠느냐?”

“썰매 뒤쪽에 클라센 후작가에서 보낸 사람들을 묶고 오겠다고 하셨는데…… 앗, 저기 오시네요.”

팔론 남작의 수하인 밀렵꾼들은 얼음고래족에게 넘겼다. 하지만 그들을 죽이기 위해 클라센 후작이 보내온 사람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밀렵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데려가기로 했다.

족장이 항복하는 것과 비슷하게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공작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리.」

공작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낮추고 팔을 벌렸다. 검을 휘두르던 모습을 보다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또 인지 부조화가 오려고 하네.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어 쫄래쫄래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순식간에 시야가 훅 높아지는 게 꽤 좋아서 다리를 동당거렸다.

안정감 있게 나를 안아 든 공작이 그제야 족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수상쩍다는 듯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아이와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거지?」

“별말 안 했으니 그렇게 추궁하듯 묻지 말게. 오히려 자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했다고 호되게 혼났으니까.”

「……혼이 났다고?」

“그래. 딸아이가 자네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야.”

앗, 저걸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밝힐 줄은 몰랐는데.

공작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민망해서 볼을 긁적이다가 결국 헤헤 웃어 버렸다. 뭐, 사실이긴 하니까?

「그래서, 내 얘기는 왜 꺼낸 거지?」

잠시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공작이 고개를 돌려 족장에게 물었다. 족장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이쪽을 주시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일을 해결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말이네.”

「고마움이라면…….」

“이리트 염료를 거래하겠네. 단, 오직 자네를 통해서만.”

“헤엑.”

대답은 공작이 아니라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사실 대답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소리이긴 했지만.

<테리, 턱이요.>

릭이 작게 조언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만큼 족장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저거 때문에 전쟁도 했다면서…….’

자연의 선물을 사고팔 수 없다며 크렘위든 제국이 몇 번이고 쳐들어오게 한 이리트 염료를? 그것도 에버딘을 통해서만……?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개인적으로는 무척 반가운 말이었다.

이리트 염료의 독점 유통권이라니. 이는 곧 에버딘의 부와 권력을 한 번에 치솟게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다만.

‘황제가 싫어할 텐데.’

<투명 신사 이야기> 때도 칼리오스를 보내서 우리를 압박하려고 한 황제인데. 그런 사람이 에버딘에서 ‘이리트 염료’라는 무기까지 손에 쥐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아니라! 자기가 가만히 안 두고 보면 어쩔 건데!’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속에서 울컥 열이 치받았다.

만일 황제가 우리가 먼저 나서서 눈치를 본다고 해서 에버딘에 잘해 줄 사람이었으면, 공작이 칩거를 시작했을 때 뭐라도 도와주려 했었겠지.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내버려 뒀잖아. 오히려 내가 오기 전까지, 에버딘이 서서히 망해 가는 걸 지켜보면서 즐거워했다잖아?

그런 사람이 우리가 이리트 염료를 포기한다고 해서, 에버딘을 압박하기를 그만둘까?

‘그럴 리가 없지.’

황제는 에버딘이 무엇을 하든 고깝게 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스스로를 지킬 무기를 하나라도 더 쥐고 있는 것이 낫겠지.

그리 생각하니 결론이 명쾌해졌다.

‘이 먼 동토까지 와서 와들와들 떤 보람이 차고 넘치는구나!’

느이 황실에는 이런 거 없지? 저런, 우린 있는데.

에버딘으로 돌아가는 즉시 우리가 이리트 염료 독점 유통권을 거머쥐었다고 수도까지 소문내야지. 아주 배가 아파 한바탕 뒤집어질 거다.

<당신 그렇게 웃으니까 정말…… 악당 같네요.>

속으로 낄낄 웃고 있자니 릭이 또 딴지를 걸었다. 조용히 팔에 힘을 주며 그의 입을 닫게 만드는 사이.

「흠…….」

뭔가를 고심하는 듯 보이던 공작이 불현듯 이쪽을 돌아보았다.

‘잉?’

왜 나를 보지.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는데,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내 머리카락을 한 차례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다시금 추슬러 안으며 족장을 향해 말했다.

「그 제안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군.」

“음?”

족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이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이번 일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테리 덕분이니까.」

“켁.”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 대신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 나 대놓고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저 말은 뭐지?

「아,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아이의 감 덕분이라고 해야겠군. 그러니 내가 아니라 내 딸에게 잘했으면 좋겠는데.」

‘휴, 휴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작이 직후 문득 덧붙인 말에, 발끝까지 떨어졌던 심장은 무사히 제자리를 찾았다.

“크하핫!”

한편, 족장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까지 떨어 가며 웃던 그가 이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이 꼬마 아가씨를 극진히 대하도록 하지. 약속하겠네.”

그 말을 듣자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의문 하나가 퍼뜩 눈앞을 스쳐 갔다. 공작의 귓가에 대고 심각하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공작님, 그럼 제가 이리트 염료 거래 이야기를 주도해야 하는 거예요? 실수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 테레지아 에버딘. 나름 영리하고 뛰어난 후계자라지만 아직 8살인디…….

<투명 신사 이야기> 때는 메리 제인과 친한 셀레나의 도움으로 좋은 조건에 계약할 수 있었다지만. 염료 같은 거에 대해서는 아는 거 하나 없는데!

걱정이 되어 물었는데, 의외로 답은 쉽고 산뜻하게 돌아왔다.

「내가 도울 텐데 뭐가 걱정이니.」

“앗.”

그, 그러네. 생각해 보니 아무리 공작이 나를 많이 믿어 주는 편이라고 해도, 이런 중요한 일을 전부 나한테 맡길 리는 없구나.

‘으음. 괜히 사서 걱정했군.’

멋쩍음에 볼을 긁적였다.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지켜보던 공작이 입술을 달싹였다.

「테리.」

“네에.”

「전에도 말했었지만,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있을 거라는 걸 기억해 주렴.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눈은 더없이 따듯했고, 나를 안은 팔은 흔들림 없었다.

그게 새삼 참 든든해서, 충동적으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놀랐는지 공작의 어깨가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그가 나를 안아 ‘들기만’ 했지, 이렇게 내 쪽에서 폭삭 안긴 적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팔을 풀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후, 공작이 조심조심 뒤통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괜히 코가 시큰해져,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어른에게 이렇게 마음 놓고 안긴 것은 처음이라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포근함에, 이후로도 한참이나 그렇게 공작에게 안겨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동토의 찬바람조차 그 순간에는 우리를 비껴가는 듯했다.

* * *

늦은 밤, 수도 위덴. 황궁 부근의 한 대저택.

“……그래서, 처리에 실패했다는 말인가.”

동토의 찬바람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싸늘한 목소리가 밀실을 울렸다.

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는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제 주인에게 더듬더듬 사실을 고했다.

“예, 예. 에버딘 공작과 그 후계자가 직접 얼음고래족을 찾아가서, 진상을 밝혔다고…….”

“이번 일의 담당자가 누구지?”

“아메트리스 후작입니다.”

“……쯧, 하필이면.”

보고를 듣던 클라센 후작이 냉랭한 얼굴로 혀를 찼다. 남색과 보랏빛이 뒤섞인 눈에서는 온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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