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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84) (84/124)

<84화>

<꾸우우웅-!>

그리고 동시에, 아가 고래가 길고 커다란 울음을 토해 냈다. 평소와 달리 뭔가 기묘한 울림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꿍-!”

마치 그 울음소리를 들은 것처럼, 큰 고래 두 마리가 사납게 울며 검을 쥔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어지간한 성인 두 명을 합쳐 놓은 듯한 덩치의 고래들이 작정하고 무게를 싣자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윽!”

콰당탕!

온몸을 검은 옷으로 휘감은 정체불명의 습격자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넘어갔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검은 감옥 저편으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챙-!

검이 바닥에 떨어지자 쇳소리가 울렸다.

굳어 있던 몸과 머리가 종을 치듯 땡 하고 제 기능을 찾았다.

“히이익.”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문자 그대로 벌렁벌렁했다.

뭐, 뭐야! 뭔데!

혹시 얼음고래족이 쫓아간 밀렵꾼 중 하나가 돌아온……!

“……어?”

습격자가 몸통 박치기의 충격으로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는 사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데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복장이…… 달라.’

아까 공작의 어깨 너머로 살짝 봤을 땐 저런 모양이 아니었는데?

나를 습격한 사람. 그리고 공작이 처리한 밀렵꾼들.

그들은 모두 검은 옷, 그리고 검은 복면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다. 언뜻 보면 똑같은 밀렵꾼이라고 착각할 법도 했지만, 자세히 관찰하니 묘하게 차림새가 달랐다.

그럼 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지?

“크윽…….”

혼란스러워하던 중, 바닥에 쓰러져 있던 습격자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손으로 바닥을 더듬대더니 떨어져 있던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큰 고래들이 위협적으로 울음을 뱉었지만, 뿔이 예민한 탓에 몸으로 들이받는 것 외에는 다른 공격 수단도 없는 상황.

나는 어린 고래들을 몸으로 가리며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공……!”

“테리!”

퍽-!

그때 바로 앞에서 공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막 몸을 일으키던 습격자가 공작의 주먹에 얻어맞고 다시 바닥으로 엎어졌다.

털썩.

단번에 기절했는지 습격자는 엎어진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 뒤로 당황한 얼굴의 공작이 보였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다가 멈칫하고 급하게 반지를 눌렀다.

「다친 곳은 없니?」

“어어, 네! 공작님은요?”

「몇 놈이 등 뒤를 노리긴 했지만 바로 처리했어. 그나저나 혹시 싶어 달려왔더니…… 어디서 감히…….」

공작이 서늘한 눈빛으로 쓰러진 습격자를 노려보았다. 처연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단숨에 온기를 잃고 싸늘하게 변했다.

그에 뒷덜미로 소름이 삐죽 돋아났다. 등 뒤에서 어린 얼음고래들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꾸웅.>

아가 고래도 익숙하게 끙끙거리며 내 볼을 툭툭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어? 모습이…….’

아가 고래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자루 모양 유령처럼 변해 있었다.

힘을 소진할 때마다 비실대며 작아지긴 했는데, 갑자기 왜…….

‘아.’

그제야 큰 얼음고래들이 아가 고래의 울음소리에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가 고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동족들에게 나를 도와 달라 외친 것이다.

왠지 목이 메는 탓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아가 고래에게 볼을 살짝 비볐다.

‘고마워.’

<꿍.>

짤막한 울음을 뱉은 아가 고래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모습을 잃은 것이 슬플 법도 하련만, 어쨌거나 동족을 구해 냈으니 기쁘다는 걸까.

<사실 이미 죽은 마당에 저렇게 동족들을 위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게.’

릭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동물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선한 아이일 거라는 생각에 설핏 웃음이 지어졌다.

“……깁니다!”

“……리 깊진 않아 보이는데.”

“조심히, 한 명씩 날 따라와라.”

마침 그때 입구 쪽에서 얼음고래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이 보낸 신호를 보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밀렵꾼, 그리고 정체불명의 습격자들 검거에 성공했다.

* * *

상황이 일단락된 후, 우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밀렵꾼들의 주인, 그리고 습격자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300까지만 세고 계세요, 아가씨.」

“알아내야 할 게 꽤 많은 것 같던데…… 너무 짧지 않아요?”

「에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레딘이 개구쟁이처럼 씩 미소 지었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 모습이 언뜻 소년 같으면서도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보였다면 착각…… 이 아니겠지.

‘밀렵꾼들이나 어린애한테 검 휘두르던 놈들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뭐. 흥이다.’

나는 캐묻는 대신 잘 다녀오라며 손을 휘적휘적 저어 주었다. 엄지발톱을 잘 밟으면 무척 아플 거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공작이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레딘, 다른 기사 한 명과 함께 마을에서 창고로 쓰인다는 얼음집 안으로 들어갔다.

“……113, 114, 116.”

<테리. 하나 건너뛰었습니다.>

“앗.”

얼음집 바깥쪽에 철퍼덕 주저앉아 수를 세기 시작했다. 맑디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수를 세다가 실수할 때면 릭이 짚어 주었다.

대충 250쯤 세었을 때 공작과 기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언뜻 그들이 소매 안쪽으로 피 묻은 손을 숨기는 것을 보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같은 편 아닌 게 맞대요?”

공작은 아무리 두껍게 입고 있어도 찬 바닥에 앉아 있으면 좋지 않다며 나를 홀랑 안아 들고 답했다.

「그래. 밀렵꾼들 쪽은 팔론 남작의, 나중에 난입한 쪽은…….」

공작은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렸다. 잠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그가 나직이 말을 맺었다.

「클라센 후작가의 사람들이더구나.」

클라센? 처음 듣는 가문인데.

고개를 갸웃하고 공작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한숨처럼 웃으며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랑바드 공작가와 함께 황제 폐하의 가장 강력한 우방을 자처하고 있는 가문이야. 선대 황후 폐하의…… 친정이기도 하지.」

“으엑.”

황제랑 친하다니.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별로다.

질색하는 반응을 고스란히 내보였더니 공작이 조금 더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당시 우릴 따라 지하로 난입한 자들이 가장 먼저 노린 것은 공작이 아니라 밀렵꾼들이었다고 한다.

「입을 막으려 드는 것 같기에 일부러 살려 뒀지.」

듣고 보니 건국제 직전에 보았던 복면인들도 라이넬 남작을 죽이려 들었었지.

‘왠지 겹쳐 보이네. 그때도 클라센 후작가에서 보낸 사람들이었으려나? 증거도 없는데 이건 너무 억측인가.’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릭이 차분히 말했다.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고, 혹은 일 처리 방식이 비슷한 것을 보니 저번의 배후와 클라센 후작이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겠네요.>

‘흐으음…….’

확실히 우연치곤 절묘하긴 한데. 일단은 증거가 없으니 이 추측은 접어 두자.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번에는 ‘팔론 남작’과 ‘클라센 후작’이라는 배후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네가 알려 준 방법이 효율적이었단다.」

엥. ……농담이겠지? 표정이 한결같이 담담해서 헷갈리는데.

심각하게 공작의 표정을 관찰하는데, 그의 어깨 너머로 기사가 입술을 꾹 말아 문 채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레딘은 아예 허리를 접고 소리 없이 폭소하고 있었다.

……이익, 놀리는 거 맞잖아.

분노를 가득 담아 공작의 머리카락을 공격했는데 그는 아프다며 웃기만 했다.

하나도 안 아파 보여서 열 받지만, 참자……. 나는 어른스러운 후계자니까, 응.

‘후, 후작께선 가신의 방자함을 눈치채고 그것을 막기 위해 우리를 보내신 거요!’

아무튼. 습격자들은 이번 일이 팔론 남작의 독단 행동이며, 클라센 후작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분노해 남작을 단죄하기 위해 보낸 것이라 항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작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랬다면 나까지 죽이려 들지는 않았겠지. 내가 죽으면 너희의 그 ‘단죄’를 증명해 줄 사람도 없어지지 않나?」

‘그건 실수였……!’

「정확히 목을 향해 단검을 날리고, 심지어는 내 아이를 베어 넘기려 했음에도 실수라…….」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 클라센 후작이 팔론 남작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수하들을 보낸 거였다면 공작과 나까지 해치려 들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결국 클라센 후작은 팔론 남작의 만행이 알려져,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책임이 돌아오는 게 싫었던 거다. 그러니 싹 다 죽이려던 거겠지.

‘역시 싫은 인간이야.’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생각은, 역시 클라센 후작인지 뭔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뿐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떼잉. 역시 황제랑 친한 사람들은 멀리하는 게 맞나 봐.

아무튼 알아낼 건 다 알아낸 관계로, 공작은 밀렵꾼들의 신병을 얼음고래족에게 넘겼다.

부족장이 살기 형형한 눈빛으로 끌고 갔으니 그 끝은 대충 짐작이 갔다.

명복은 빌지 않았다. 부디 그들의 죽음이 죽은 얼음고래들에게 조금의 위안이나마 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 거기. 큼.”

멀어지는 밀렵꾼들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주먹을 등 뒤로 숨기고 돌아보자 족장이 세상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핫. 봐, 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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