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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공작의 딸이 되었다(83) (83/124)

<83화>

속으로 다시금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하는 사이.

공작이 발을 뻗어 네모나게 금이 난 곳을 콱 눌렀다. 그러자 덜컹, 소리가 나며 얼음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퍽!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저 아래에서 얼음 뚜껑이 어딘가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검은 구덩이 안을 살펴보려는데 공작이 손을 뻗어 나를 제지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던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이 어수선하구나. 여기가 맞는 모양이야.」

‘하긴, 저 인간들한테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을 테지.’

나 같아도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뭐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 지진이라고 생각하지, 누가 검으로 땅을 내리쳐서 생긴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할 테니까. 사실 어지간해서는 그게 맞긴 하다.

‘공작님이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공작은 네모난 입구 근처에 신호용 불을 피웠다.

얼음고래족에게서 받아 온 풀은 작은 마찰만으로도 쉽게 불이 붙었다. 이윽고 세 줄기의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로 피어올랐다.

「테리.」

공작이 상체를 살짝 낮추고 팔을 벌렸다. 똑같이 팔을 벌리고 다가가자 그가 안정감 있게 나를 안아 들었다.

덕분에 어느새 이렇게 안기는 것도 꽤 익숙해졌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감상에 잠깐 휩싸였다.

「뛰어내릴 건데, 너무 놀라진 말고. 꽉 잡으렴.」

“네?”

어라, 잠깐. 안정감 취소합니다.

“흐억.”

미처 입술을 뗄 틈도 없이 몸이 낙하했다. 그 바람에 공작의 목을 조르듯 끌어안은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혀, 혀 깨물 뻔했다.’

와중에 공작이 짐 덩이 하나를 끌어안은 채로 상당한 높이를 뛰어내렸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사뿐히, 그리고 조용히 착지한 그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나를 내려 주고 몸을 폈다.

공작이 사람보다는 거대 고양이, 흑표범…… 뭐 그런 거에 가깝다는 추측에 확신이 더해졌다.

워낙 순식간에 이곳까지 떨어진 터라 뒤늦게 질문이 떠올랐다. 근처를 한번 휘 둘러보며 속삭였다.

“그런데 저 여기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내가 이곳을 정리하는 사이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던 놈들이 돌아오면 큰일 나니까. 그렇다고 너 혼자 얼음고래족의 마을로 돌려보낼 수도 없고. 내 뒤에서, 너무 멀어지지만 않게 따라오렴.」

“네!”

공작이 다시 검을 뽑아 들며 제 등 뒤를 손짓했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며 천천히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게 다 무슨 일이야!”

“방금 입구 쪽에서……!”

“설마, 벌써 찾아냈다고? 그럴 리가 없……!”

“젠장, 고래들부터 챙겨! 정 어려우면 뿔이라도 자르든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밀렵꾼들의 목소리도 점차 선명해졌다. 누군가 외친 말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음고래의 뿔은 예민해서, 잘못 만지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 자르란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

‘저러다 자기도 어디 한 군데 없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검 한 자루로 지진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네.

공작의 무력이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무섭지만, 그 힘이 내가 아니라 못된 놈들을 향하는 거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른쪽으로 난 통로 하나, 그리고 정면으로는 탁 트인 공간이 있었다.

그동안 유령들에게 듣기만 했던 고대의 잔인한 어쩌고 형벌을 곧 눈으로 볼 수 있는 건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공작이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서기 직전 뒤를 돌고 말했다.

「잠깐만 눈 돌리고 있으렴.」

앗, 표정을 보니 절대 못 보게 할 것 같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저 표정을 지을 때의 공작은 단호해서, 절대로 밀렵꾼들을 퇴치하는 장면을 보여 줄 것 같지 않았다. 입맛을 쩝 다시고 차선을 선택했다.

“전 그럼 고래들 좀 풀어 주고 있을게요. 아까 슬쩍 보니까 통로가 감옥으로 이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음. 얼음고래들은 쉽사리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조심하거라.」

“공작님이야말로 다치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푸스스 웃음을 흘린 공작이 손을 뻗어 가볍게 내 머리를 토닥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장 땅을 박차고 밀렵꾼들에게 달려들었다.

“치, 침입…… 커헉!”

밀렵꾼들이 당황해 무어라 외쳐 댔지만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비명이 난무했다.

‘음, 지금 생각하니 저 광경을 안 본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비명이 1초에 하나씩 들리는 것 같네. 이러다가 내가 뭐 해 보기도 전에 공작이 저쪽을 다 정리하고 오겠다.

그건 안 될 말이지. 번듯한 에버딘의 후계자로서 한 사람 몫을 다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복도를 조금 돌아가자 아까 보았던, 옆으로 쭉 뻗어 있는 통로가 나왔다.

“어떡해…….”

<……잔인하네요.>

통로로 들어서자마자 반사적으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릭도 신음했다.

“꾸웅…….”

“꿍…….”

통로 끝에는 굵은 쇠창살이 들어찬 감옥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얼음고래들이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 가고 있었다.

감옥 안에 있는 얼음고래는 총 열 마리였다. 그중 여덟이 아가 고래만큼이나 작은 크기였고, 둘은 마을에서 본 성체 얼음고래보다 조금 더 작았다.

<꿍, 꾸웅…….>

아가 고래는 아까 통로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쪽으로 날아와 있었다. 아가 고래가 동족들 사이에서 구슬프게 울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열쇠, 열쇠 어딨지?”

<테리, 옆쪽이요.>

우선 감옥 문을 열고 얼음고래들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감옥 문에 단단한 자물쇠가 걸려 있어 당황했는데, 우습게도 열쇠는 문 바로 옆의 벽에 걸려 있었다.

‘……얼마나 서러웠을까.’

열쇠를 향해 손을 뻗으며 절로 이를 악물게 되었다. 성인에 비해 키가 작은 나조차 까치발을 들면 닿을 법한 높이.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대충 걸려 있는 이 열쇠 하나가, 저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마음이 너무 아파 분통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인간의 등장으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고래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열쇠로 감옥 문을 열고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꾸웅.”

그나마 성체에 가까운 고래 둘이 대번에 경계심 어린 울음을 뱉으며 작은 고래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의 뿔에는 정돈되지 않은 껍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몸을 낮췄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무릎이 닿자 쓰라린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무릎걸음으로 조심조심,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쉬이, 착하지. 너희 동생…… 의 부탁으로 도우러 왔어.”

<꾸우웅.>

최대한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가며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검은 구슬 같은 고래들의 눈에는 여전히 적의가 스며 있었다. 그래서 더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물론 인간들이 너무나 밉겠지만, 그래도…….”

“…….”

“도와주고 싶어.”

“…….”

“그래도 될까?”

첫 시작은 분명 에버딘이 누명을 쓸까 염려되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아가 고래와 함께 다니며, 또 마을에서 얼음고래족과 사이좋게 어울려 다니는 얼음고래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진심으로 이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

조심스럽게 물은 후 눈치를 살폈다. 내가 고래들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두 쌍의 검은 눈도 나를 유심히 살폈다.

분명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도 눈이 마주친 찰나, 마음이 공명하는 듯한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꾸웅.”

내내 침묵하던 큰 얼음고래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짧게 울었다. 그러더니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것뿐이었지만 전해지는 의사는 확실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고마워!”

천천히 큰 고래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큰 고래들은 내 행동을 주시할 뿐 달려들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안심하고 부족장에게 받아 온 뿔 관리 도구 등을 꺼냈다.

‘일단 아기들부터.’

미끼로 자주 쓰이며 밧줄을 여러 번 묶었다 풀었다 해서 그런지 작은 고래들의 뿔 표면은 유독 더 울퉁불퉁했다.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천으로 작은 고래 한 마리의 뿔을 감싸는 순간이었다.

쿵-

“응?”

뭔가 묵직한 것이 추락한 듯, 작은 울림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살폈으나 복도는 조용했다. 공작이 밀렵꾼들을 모두 제압하고 뒤처리를 하고 있는지 간간이 밧줄 쓸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공작이 밀렵꾼들이랑 싸우다가 뭔가를 떨어트리기라도 했나 보지. 그리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조심…….’

아가 고래는 부드러운 천으로 뿔을 감싼 것만으로도 통증이 느껴지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행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고, 솔을 꺼내 가장 바깥쪽 각질부터 없애려던 차였다.

<테리! 뒤에……!>

<꾸웅! 꿍!>

“꾸웅……!”

옆에 내려 두었던 릭이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아가 고래와 얼음고래들이 다급히 울부짖었다.

후웅-

‘바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감각 속. 등 뒤에서 바람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이마로 날아오고 있는…….

‘……검?’

온몸을 검은 옷으로 휘감은 누군가 내게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입에서 채 비명조차 되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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