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100명…….”
기계…… 맞을지도……?
새삼 충격적이어서 다시 한번 중얼거리고 있자니 공작이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앗. 그 얘기 하려고 했었지, 참.
공작 덕분에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났다.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아가 고래가 이끌었던 방향을 가리켰다.
“저희는 저쪽으로 가면 안 돼요?”
「이유라도 있니?」
사실 지금 공작님 머리 위에 얼음고래 유령이 한 마리 떠 있답니다. 걔가 저기로 가자고 해서요!
……라고 할 수는 없는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공작이 나랑 동행해 줄 만한 그런 핑계…….’
이 무슨 뜨거운 얼음 같은 소리인지. 답을 하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심만 짙어질 것 같아서, 결국 머릿속을 스쳐 가는 말을 툭 뱉어 버렸다.
“그으, 어…… 찍었어요.”
“…….”
“……제 감 완전 잘 맞아요.”
“…….”
“……짱짱.”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길래 소심하게 양 엄지를 치켜세우며 덧붙였으나 여전히 침묵.
젠장, 역시 이유가 너무 조잡한가?
‘하지만 끌려갔다는 얼음고래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이 상황에선 다른 방법이 없어…….’
“음? 거기서 뭘 하나?”
힐끔힐끔 공작의 눈치를 살피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음고래족들이 논의를 끝내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족장이 다가오는 모습에 한층 더 초조해져 눈을 질끈 감고 딱 잘라 말해 버렸다.
“다른 방향은 안 돼요! 저쪽으로 가요!”
으앙, 우겨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지금은 믿어 달라는 말밖에……!
「그래. 알았다.」
할 수가 없…… 어?
직후 믿기지 않는 답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지, 진짜요?”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근거 없는 고집이었는데. 이렇게 순순히 따라 준다고?
공작이 저렇게 나오니 오히려 불안했다. 막 알고 보니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든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공작이 정말로 내가 유령을 볼 수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진즉 추궁했겠지. 왜 지금까지 티도 안 내고 가만히 있겠어?
속으로 하핫 웃으며 되지도 않는 추측을 털어 냈다. 사실 믿고 싶지 않다는 것에 가깝긴 했다.
공작은 내 말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제가 이렇게 물어보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왜……?”
「너잖니.」
“…….”
「내가 보아 온 너라는 아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란다.」
담담히 말한 공작이 자세를 바로 하며 족장에게 말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이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아, 우리는…….”
어른인 공작이 나서서 태연히 말을 뱉자 다른 이들도 크게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공작이 내게 보여 준 신뢰가 너무 크고 깊어서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엄지와 검지로 코를 꼬집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크흑, 고맙습니다. 제가 더 잘할게요……! 에버딘을 위해서라면 황제 따위는 없앨 줄 아는 후계자로 자랄게요……!
‘앗, 그러면 칼리오스가 슬퍼하려나. 없애진 말자.’
감동에 좀 과하게 취했던 모양이다. 상념을 털어 내고 공작과 함께 썰매 하나에 올랐다.
마찬가지로 썰매 위에 오른 족장이 출발 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신호는 알고 있겠지. 누구든 본거지를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거든 목숨을 최우선으로 챙길 것. 알겠나?”
“알겠습니다.”
“빠르게 흩어진다. 만약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해가 질 때까지 다시 이 자리에 모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사람들은 각자가 맡은 흔적을 따라 흩어졌다. 밀렵꾼들을 상대하러 가는 것이니만큼, 얼음고래가 끄는 썰매가 아니라 손수 땅을 박차야 하는 썰매를 타고서.
촤아악-
공작과 내가 탄 썰매는 빠르게 얼음 위를 나아갔다.
인간의 힘으로 미는 썰매가 얼마나 빠르려나 싶었는데, 공작이 발을 한번 구를 때마다 썰매가 화살처럼 얼음을 가로지르며 튕겨 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머리카락이 미친 듯 볼을 때려 쓰라릴 정도였다.
일당백 정도는 해야……! 썰매도 잘 몰 수 있구나……!
‘나도 운동할까?’
상황에는 맞지 않는 감정이지만, 썰매의 속도감이 두근거리고 기분 좋았다. 순간적으로나마 운동을 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그만두자.’
하지만 역시 공작과 기사들이 훈련하던 걸 떠올리면 ‘까불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고개를 내젓게 된다.
그래. 잠깐의 속도감을 위해 불구덩이에 스스로를 내던질 수는 없지, 아암.
<꾸우우웅-!>
그때 머리 위에 늘어져 있던 아가고래가 긴 울음을 토해 냈다. 동시에 공작이 땅에 발을 콱 박으며 썰매를 멈췄다.
“으왁!”
그 반동으로 썰매가 크게 덜컹거렸다. 기겁하며 난간을 붙들었는데 공작이 재빠르게 뒷부분을 밟아 눌러 다행히 썰매가 뒤집히지는 않았다.
“왜, 왜요?”
깜짝이야. 말도 없이 썰매를 멈추는 바람에 심장이 벌렁거려 뒤를 돌아 물었다.
그러자 미간을 슬쩍 찌푸린 공작이 답했다.
「……흔적이 끊겼다.」
“잉?”
저게 뭔 소리람.
당황해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그의 말대로 얼음 위로 이어지던 흔적이 가위로 잘라 낸 것처럼 뚝 끊겨 있었다. 아마 내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처 보지 못한 듯했다.
우선은 공작과 썰매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가 유심히 근처를 살피는 사이, 아가 고래에게 몰래 손짓, 발짓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아까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흔적을 마저 찾아볼 수는 없어? 여긴 아닌 것 같은데.’
<꾸웅.>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여기가 아니라는 뜻을 강력하게 피력했으나, 아가 고래의 반응이 이상했다.
알 수 없는 뜻을 담아 낑낑거리던 아가 고래가 돌연 얼음 위에 털썩 배를 깔고 눕더니 꼬리로 땅을 쿡쿡 찔렀다. 그 행동을 말미암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이 아래라고……?’
망연히 시선을 내리자 주위는 온통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얼음뿐이었다.
분명 출발하기 전에 본거지가 지하라고는 했었지.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근처에 건물이라거나 입구라고 할 만한 건 보이지 않는걸?
‘틈새라고 할 만한 것도 안 보이는데……. 근처의 얼음을 죄다 파내거나 두드리면서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아무리 일당백의 공작이라도 혼자서 이 드넓은 얼음 밭을 확인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는데 곧장 공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흠칫 튀어 오르며 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설마 내가 허공에 대고 손짓 발짓 하던 것도 다 봤나?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할 말을 찾는데, 공작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손짓했다.
「테리, 이쪽으로.」
“왜, 왜요?”
「근처에 은신처라도 있는지 찾아보려는데, 떨어져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위험……?”
은신처 찾는 거랑 내가 위험해진다는 게 무슨 상관이지……? 의아했지만 우선 그의 곁으로 총총 다가가 섰다.
「옆에 바짝 붙어 있으렴.」
그렇게 말한 공작이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다.
뭘 하려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는데, 그가 검을 수직으로 움켜쥐더니 그대로 얼음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땅이 흔들렸다.
콰아앙!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직전에 공작이 땅에 검을 박아 넣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어디서 건물 하나가 터져 나갔겠거니 싶을 정도였다.
‘오, 오메.’
나는 땅이 흔들리는 순간,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귀를 막은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턱이 떨어질 것처럼 벌어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여!
‘사람이…… 땅을 흔들리게 할 수가 있나?’
도저히 내가 책을 통해 배웠던 상식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내 입이 마름모꼴로 우스꽝스럽게 벌어져 있음을 지적했을 릭도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발밑에서 믿기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쩌적-
‘……에이, 아니지?’
어이가 없어 소리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애매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천천히 아래를 내려 보자, 그런 나를 비웃듯 근처로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쩍-
근처의 얼음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틈 없이 매끈하기만 하던 얼음 한가운데 누가 봐도 입구로 보이는 네모반듯한 금이 생겨났다.
“후.”
정작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음성으로, 가볍게 숨을 고를 뿐이었다.
검을 집어넣은 그가 이마에 흐른 땀 한 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나를 돌아보았다. 유달리 순해 보이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네 말대로 이쪽이 본거지였나 보구나. 덕분에 얼음고래족에게 생색도 낼 수 있을 듯하고. 고맙다, 테리.」
“딸꾹.”
지나치게 놀란 탓인지 대답 대신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공작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양손으로 입을 막고 다짐했다.
‘꼭 저주를 풀고 나서 말해야지…….’
물론 공작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화낼 사람은 아닐 것 같지만. 기왕이면 저주를 풀고 고백하는 게 낫잖아? 절대 내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