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온기.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살의로 부옇게 흐려졌던 시야가 순식간에 개었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빠르게 이성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으앗.”
급한 마음에 엉성하게 매달린 탓인지 테레지아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발레리안이 테레지아를 제대로 고쳐 안았다. 그 바람에 아이의 옷에 묻어 있던 피가 제 옷에도 묻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테리, 괜찮니? 옷에 묻은 피는…….」
“그게, 제 피가 아니라…… 부족장님 아들 피예요.”
테레지아가 어두운 얼굴로 발레리안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몸을 돌리자, 인파 너머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은!”
“여, 여기요!”
부족장은 누군가 건넨 대야를 받아 들다가 엎을 뻔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한번 꾹 말아쥔 그녀가 깨끗한 천을 물에 적셨다.
“으윽…….”
부족장의 옆에는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소년이 누워 있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고통이 큰지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흘렸다.
소년의 몸에는 대각선으로 큰 상처가 나 있었다. 부족장이 물에 적신 천으로 피를 닦아 내자 드러난 모습은 더욱 참혹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조, 족장님!”
그때 족장이 발레리안을 따라 광장에 도착했다. 그는 광장 바닥에 어지러이 흩뿌려진 피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죄, 죄송해요. 제가 대신, 다쳤어야 했는데. 베니가 저를 지키려다가…….”
쓰러진 소년의 곁에 주저앉아 울던 소녀가 울음과 말을 반씩 토해 냈다.
테레지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작게 설명했다.
“부족장님의 아들과 친한 누나래요. 얼음고래들의 뿔을 관리해 주러 갔다가 밀렵꾼들을 마주쳤다나 봐요.”
아이의 말에 따르자면, 몇 분 전. 울고 있는 저 소녀가 베니라 불린 소년을 부축하며 나타났다고 한다.
‘도와주세요!’
‘반대쪽에 어린 얼음고래가 있길래, 상태를 보려고 다가갔는데 뿔에 이상한 줄이 묶여 있더라고요.’
‘줄을 살펴보려는데 갑자기 밀렵꾼들이 나타나더니 목격자라며 저희를 죽이려 들었어요. 가까스로 빠져나오긴 했는데 얼음고래들은…….’
소녀의 설명에 따르자면, 두 사람은 마을 근처를 돌며 얼음고래들의 뿔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린 얼음고래 한 마리가 떨고 있는 걸 목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가가 보았더니 얼음고래의 뿔에는 이상한 줄이 묶여 있었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복면인들이 그들을 덮쳤다고.
‘너희 같은 야만인 따위가 물라고 드리워 놓은 낚싯대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여태 밀렵꾼들이 마을 근처에 접근한 적은 없어, 둘이라지만 아이들끼리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아버지.”
“…….”
베니의 상처를 치료하던 부족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족장을 올려다보았다. 목이 꽉 멘 딸의 음성에 족장 역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심해처럼 깊은 눈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손자를 응시했다.
이윽고 족장의 입에서 동토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냐, 그놈들이 있던 곳이.”
* * *
베니의 부상이 어느 정도 수습된 뒤. 나는 족장을 포함한 얼음고래족 일부, 공작, 그리고 호위들과 함께 복면인들이 나타났다는 장소로 향했다.
<꾸웅.>
아차, 아가 고래랑 릭도 함께.
사실 공작은 나를 데려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여기에 온 이유가 그를 돕기 위함이었으므로 후계자라는 지위를 박박 내세워 간신히 합류할 수 있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공작과 얼음고래족은 내게 핏자국이 낭자한 곳은 보여 주지 않았다.
“……심하군.”
“목격자가 생존해 도망간 탓에 일부러 흔적을 여러 갈래로 나눈 것 같은데.”
“애들이 본 게 몇 명이라고 했지?”
“8명.”
“딱 사람 수대로 흩어졌나 보군.”
등 뒤로 얼음고래족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주위를 살폈다.
베니와 소녀가 발견한 ‘어린 얼음고래’의 위치를 중심으로 복면인들이 이동한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추적을 따돌리거나 분산시키기 위해 일부러 남긴 흔적이었다.
‘습……. 아슬아슬한데?’
밀렵꾼인 것이 확실한 복면인들은 총 8명. 반면에 이쪽의 인원은 나를 포함해도 총 10명이었다.
얼음고래족들이 복면인을 추적하는 사이, 또 다른 밀렵꾼이 마을을 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동토에서 가장 많은 수의 얼음고래가 머무르는 곳이 얼음고래족의 마을이니까.
마을을 지킬 인원. 거기에 베니의 상처를 돌볼 사람까지 빠지니 실제로 추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나마 한 사람당 흔적 하나를 맡아서 추적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확률이 너무 낮아.’
복면인들이 어린 얼음고래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다고 했지. 낚싯대 운운한 걸 보아하니 어린 얼음고래를 미끼로, 다 큰 얼음고래를 잡는 듯했다.
그렇다면 밀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얼음고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 중에 한 명은 얼음고래와 함께 본거지로 돌아갔겠지.
다만 ‘누가’ 본거지로 돌아간 건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 남아 있는 건 죄다 썰매가 쓸린 자국뿐이라서.
끙끙대다가 결국 원시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해 보기로 했다.
“릭, 찍어 봐.”
<……왜 절 시키는 겁니까?>
“나보다는 네 감이 정확할 수도 있으니까? 야생 유령의 감, 뭐 그런 거 없어?”
<야생이라면 저보다는 저쪽이 더 가까워 보이는데요.>
<꾸우.>
릭의 말에 화답하듯 아가 고래가 짧에 울었다. 하지만 실상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우연에 불과하겠지.
나는 혀를 차며 대꾸했다.
“쟤한테는 하나 찍어 달라고 설명할 수가 없잖아. 바보 곰돌이.”
<바보라서 아무런 조언도 생각나지 않는군요. 미안합니다.>
“……잘못했어요. 진짜 방법 없어?”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토박이라는 얼음고래족도 뚜렷한 방법은 없어 보이네요.>
릭의 말대로 얼음고래족과 공작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만일을 위해서라도 모든 흔적을 추적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다.
<……꿍?>
그때 내 어깨 위에 늘어져 있던 아가 고래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허공으로 떠올라 두리번거렸다.
왜 저러지? 동족의 울음소리라도 들은 건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들리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꾸웅! 꾸우웅!>
뭔가를 찾듯이 주변을 서성거리던 아가 고래가 별안간 내 손가락을 물고 당기기 시작했다. 줄에 매단 인형이 된 것처럼, 허공으로 팔이 휙 들리는 모습에 기겁하며 손가락을 빼내려 애썼다.
‘히익. 누가 보면 어쩌려고!’
대체 왜 이러는…….
‘……아?’
그때 발밑에서 툭, 하고 눈 차이는 소리가 났다. 시선을 내리니 흔적 중 하나에 발이 걸쳐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가 고래가 구슬프게 끙끙거렸다.
번뜩 직감이 스쳐 갔다.
‘이 방향이구나.’
대화가 통하지 않으므로 상당히 근거 없는 믿음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다. 서둘러 공작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쭉 잡아당겼다.
“공작님, 공작님.”
「왜 그러니, 테리.」
그리 세게 당기지 않았으나 공작은 곧장 돌아보았다. 친절하게도 몸을 낮추어 주기에 나도 까치발을 들고 속삭였다.
“공작님 혼자서 몇 명까지 이길 수 있어요?”
「……?」
뜬금없는 물음에 공작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옷자락을 흔들며 재촉했다.
“몇 명까지 이길 수 있냐니까요. 10명?”
그래도 10명은 좀 많나? 일단 뱉어 놓고 돌이켜 보니, 공작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환경이 환경인 만큼 힘들 것 같아서 입안으로 말을 고르던 때였다.
눈을 깜박인 그가 선선히 답을 뱉었다.
「상대의 실력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베니라는 아이에게 남아 있던 상처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역시 10명은 너무 많나요? 앗, 그래도 8명은 이길 수 있었으면 좋겠는…….”
「100명 정도.」
“에?”
뭐라굽쇼?
순간 너무 당황해서 얼빠진 소리를 뱉어 버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릭을 안은 팔에 슬쩍 힘을 주었다.
<100명 맞아요.>
……사람이세요?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입이 헤 벌어졌다.
‘백……?’
아, 아니. 내가 이상한 건가? 사실 기사들한테는 저 정도가 당연한 건가?
「여기가 동토인 걸 감안해도 너무 겸손하십니다, 주군.」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니 아가씨께서 주군을 살인 기계라고 생각하시면 어떡해.」
「앗, 그렇군요.」
하지만 눈치 빠르게 몸으로 얼음고래족의 시야를 차단해 주던 호위들의 말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맞다. 이 사람 전쟁귀라고 불렸다고 했지. 연극 보고 손수건에 눈물 찍던 모습이 강렬해서 그런가 까먹고 있었다.